- 주소
-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127-4
- 탐방로그
- 경기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125-1에 있다는 파주 3.1운동기념비를 찾아왔다. 하지만 이곳도 주소가 잘못되어 있다. 125-1은 길 건너 아파트가 있는 곳이고, 이곳의 주소는 GPS상으로 127-4로 나온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한일합병과 동시 할복 자결하신 분 : 교하면 반학영
한일합병 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왜헌을 살해하시고 교수형을 당하신 분 : 문산 교산리 정홍준
한일합병 후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옥고를 당하신 분 : 권중삼 김윤종 김은중 백영현 송영종 윤치대 이대유 이용현
한일합병 이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시다가 해외로 일시 망명하시어 임정에 참가하신 분 : 김웅권 박찬익 임정내무부장관 심상각 홍종만 황유현 황병주
서기 1978년 3월 1일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이숭녕 근찬
한일합병 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왜헌을 살해하시고 교수형을 당하신 분 : 문산 교산리 정홍준
한일합병 후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옥고를 당하신 분 : 권중삼 김윤종 김은중 백영현 송영종 윤치대 이대유 이용현
한일합병 이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시다가 해외로 일시 망명하시어 임정에 참가하신 분 : 김웅권 박찬익 임정내무부장관 심상각 홍종만 황유현 황병주
서기 1978년 3월 1일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이숭녕 근찬
파주 삼일운동 기념비 건립위원회 임원
고문 파주군수 강도희, 파주경찰서장 백석춘, 파주군 교육장 김형희, 문학박사 이숭녕, 명예회장 3,4대 국회의원 정대천, 위원장 8,9대 국회의원 박명근, 부위원장 송낙포 송낙설 이규환 이상진 조수천, 감사 최병덕 윤한용, 총무이사 최인태 김민태, 재무이사 이한수 김대영, 섭외이사 김영국 안응식
1978년 3월 1일 정연철 근서
동양대리석주식회사 대표이사 김명래 시공
봉일천감리교회 부지 51평 희사
고문 파주군수 강도희, 파주경찰서장 백석춘, 파주군 교육장 김형희, 문학박사 이숭녕, 명예회장 3,4대 국회의원 정대천, 위원장 8,9대 국회의원 박명근, 부위원장 송낙포 송낙설 이규환 이상진 조수천, 감사 최병덕 윤한용, 총무이사 최인태 김민태, 재무이사 이한수 김대영, 섭외이사 김영국 안응식
1978년 3월 1일 정연철 근서
동양대리석주식회사 대표이사 김명래 시공
봉일천감리교회 부지 51평 희사
파주3.1운동기념비 건립취지문
서기 1919년 3월 1일 하오 2시 서울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선포되자 전국은 즉시 불뿜는 항일독립의 싸움터로 변했다. 우리 파주의 선배들도 이 의거를 획책하여 드디어 공릉장날 3월 27일을 택하여 독립의거에 들어선 것이나 왜경의 흉탄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것 어찌 잊으랴 잊을 수 있으리요. 해방도 30년 파주의 유지들은 기념비 건립을 위하여 1977년 9월 3일 파주군민회관에서 그 위원회가 조직되자 군민 제위는 즉시 이에 호응하여 건립을 위한 격려와 성금이 답지하니 위원 일동의 감격 이루 형언할 바 아니었다. 이 3.1운동기념비야말로 위로 파주 선열의 위훈을 만세에 들어냄이요 아래로는 우리 후배들에게 그 정신을 본받게 함에 있다. 여기 제막식에 즈음하여 또한 성의를 보인 군민 제위의 방명을 사겨 두고자 한다.
서기 1978년 3월 1일 파주 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 위원장 국회의원 박명근
서기 1919년 3월 1일 하오 2시 서울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선포되자 전국은 즉시 불뿜는 항일독립의 싸움터로 변했다. 우리 파주의 선배들도 이 의거를 획책하여 드디어 공릉장날 3월 27일을 택하여 독립의거에 들어선 것이나 왜경의 흉탄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것 어찌 잊으랴 잊을 수 있으리요. 해방도 30년 파주의 유지들은 기념비 건립을 위하여 1977년 9월 3일 파주군민회관에서 그 위원회가 조직되자 군민 제위는 즉시 이에 호응하여 건립을 위한 격려와 성금이 답지하니 위원 일동의 감격 이루 형언할 바 아니었다. 이 3.1운동기념비야말로 위로 파주 선열의 위훈을 만세에 들어냄이요 아래로는 우리 후배들에게 그 정신을 본받게 함에 있다. 여기 제막식에 즈음하여 또한 성의를 보인 군민 제위의 방명을 사겨 두고자 한다.
서기 1978년 3월 1일 파주 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 위원장 국회의원 박명근
각 읍,면별 성금을 지원한 분들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경기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125-1에 있다는 파주 3.1운동기념비를 찾아왔다. 하지만 이곳도 주소가 잘못되어 있다. 125-1은 길 건너 아파트가 있는 곳이고, 이곳의 주소는 GPS상으로 127-4로 나온다.
坡州三.一運動記念碑(파주3.1운동기념비)
파주3·1운동기념비
Paju March First Movement Monument
관리번호 15-1-11
건립자 : 파주 파주3·1운동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관리자: 파주시장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125-1
1919년 파주시 3·1운동 발상지인 광탄면에서 우산 심상각, 석천 김웅권선생의 주동으로 1919년 3월 27일 봉일천 장날 19인 동지회원이 앞장서 광탄면사무소에 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행진을 하여 조리, 아동, 월롱, 광탄, 교하 등지에서 모여든 5천여 군중과 함께 조리읍사무소와 주재소를 2중 3중으로 포위 습격한 바 당황한 왜경의 무차별적인 발포로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후생들이 선열의 유지를 받들고 3.1운동 정신을 이어받고자 기념비를 설립하였다.
Paju March First Movement Monument
관리번호 15-1-11
건립자 : 파주 파주3·1운동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관리자: 파주시장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125-1
1919년 파주시 3·1운동 발상지인 광탄면에서 우산 심상각, 석천 김웅권선생의 주동으로 1919년 3월 27일 봉일천 장날 19인 동지회원이 앞장서 광탄면사무소에 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행진을 하여 조리, 아동, 월롱, 광탄, 교하 등지에서 모여든 5천여 군중과 함께 조리읍사무소와 주재소를 2중 3중으로 포위 습격한 바 당황한 왜경의 무차별적인 발포로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후생들이 선열의 유지를 받들고 3.1운동 정신을 이어받고자 기념비를 설립하였다.
坡州三.一運動記念碑(파주3.1운동기념비)
여기는 파주 임진의 나루를 뒤에 지고 의주로 가는 국도의 길목이며 군사의 거점이어서 옛부터 자주 전란에 휩쓸린 곳이다.
가까이 이씨왕조에 들어서도 임진왜란에는 왜군의 북상과 그 퇴거의 길이 되고 추격의 명군도 벽제관 싸움에 앞서 여기에 진을 쳤고 선조 26년 9월 환가가 임진나루의 싸움터를 지날때 진망수사를 제지내게 한 곳이고 인조 반정 시 이천부사 이중로와 장단부사 이서가 군사를 이끌고 합류한 곳도 여기이고, 인조 25년 이괄의 반군이 여기서 관군을 물리치고 남하했고 그 5년에 금군이 강홍립을 앞세우고 여기를 거쳐 동진했고, 병자호란에도 청군이 여기를 짓밟고 남하했다.
이제 6.25사변을 겪고도 북역의 공산군을 지호의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으니 국토양분도 슬프거니와 이처럼 애끓는 시련이랴. 그러나 이런 역사환경에서 우리 파주군민의 피속에는 유달리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정신이 연면히 계속되어 온 것인데 1919 기미3.1운동이 일어나자 군민의 끓는 피는 어찌 이를 좌시할 수 있었으랴. 우산 심상각 선생을 주도로 한 19인의 결사가 즉각 조직되고 군민의 동원 그 시기의 결정 결행작전의 책정이 순조로이 진행되어
가까이 이씨왕조에 들어서도 임진왜란에는 왜군의 북상과 그 퇴거의 길이 되고 추격의 명군도 벽제관 싸움에 앞서 여기에 진을 쳤고 선조 26년 9월 환가가 임진나루의 싸움터를 지날때 진망수사를 제지내게 한 곳이고 인조 반정 시 이천부사 이중로와 장단부사 이서가 군사를 이끌고 합류한 곳도 여기이고, 인조 25년 이괄의 반군이 여기서 관군을 물리치고 남하했고 그 5년에 금군이 강홍립을 앞세우고 여기를 거쳐 동진했고, 병자호란에도 청군이 여기를 짓밟고 남하했다.
이제 6.25사변을 겪고도 북역의 공산군을 지호의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으니 국토양분도 슬프거니와 이처럼 애끓는 시련이랴. 그러나 이런 역사환경에서 우리 파주군민의 피속에는 유달리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정신이 연면히 계속되어 온 것인데 1919 기미3.1운동이 일어나자 군민의 끓는 피는 어찌 이를 좌시할 수 있었으랴. 우산 심상각 선생을 주도로 한 19인의 결사가 즉각 조직되고 군민의 동원 그 시기의 결정 결행작전의 책정이 순조로이 진행되어
그 밀령이 왜경의 감시를 누비면서 각 면의 유지에게 전달되었으니 폭풍전야의 정적과도 같이 긴장의 시간이 흐른 것이라 공릉시장의 장날이 거사의 그날이었다. 운집한 5천여 명의 군중은 생동개시의 본부 지시를 기다렸다가 지시가 내리자 일대 시위로 들어가니 독립만세의 함성은 노도와도 같이 지축을 뒤흔들고 그 시위의 방향은 자연 왜경 주재소로 잡고 이중 삼중으로 포위를 좁혀갔다. 왜경들은 떨고 당황했다. 시위가 일보 일보 닥아들자 왜경은 미친듯이 총을 들고 무차별 사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독립만세의 고함은 더욱 높아갔지만 공거 이 어찌 총기에 맞설 수 있었으랴. 10명의 순국자와 7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부득기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선배들은 의거를 과시하거나 선전함이 없이 겸허와 과묵으로 자못 성현의 몸가짐과 같이 처신했으니 후배들은 어렴풋이 이 의거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점점 망각에 가까이 잊어지려 함에 있어 우리는 이 사실을 글로 엮어서 돌에 사겨 자손만대에 전하려 한다. 이제야 우리는 누구나 선열의 의거를 되사길 수 있고 그 정신을 본받아 향토의 보람을 드높이게 되었으니 의거의 선열들이시여 안심하시고 고이 잠드오시라. 안심하시고 고이 잠드오시라.
파주3.1운동을 주도하신 분 : 심상각, 김웅권 권중환 박우용 백기수 심의봉 염규호 유영 윤두영 윤홍섭 이근영 이남기 이문섭 이영진 이종구 이학로 황유현 황병주 황학주
독립만세를 부르시다가 총탄으로 희생되신 분 : 강복산 김남산 노동식 박원선 안동환 안명환 오준상 이남기 정시화 최홍주
3.1운동에 참가하시여 옥고를 당하신 분 : 김동철 김정중 김창실 남동민 남정채 염규호 유극로 유화진 윤홍섭 이기하 이인옥 이주택 임명애 정갑석 정봉화 정천화 정영의 조무쇠 한은동 황의동 황인수
파주3.1운동을 주도하신 분 : 심상각, 김웅권 권중환 박우용 백기수 심의봉 염규호 유영 윤두영 윤홍섭 이근영 이남기 이문섭 이영진 이종구 이학로 황유현 황병주 황학주
독립만세를 부르시다가 총탄으로 희생되신 분 : 강복산 김남산 노동식 박원선 안동환 안명환 오준상 이남기 정시화 최홍주
3.1운동에 참가하시여 옥고를 당하신 분 : 김동철 김정중 김창실 남동민 남정채 염규호 유극로 유화진 윤홍섭 이기하 이인옥 이주택 임명애 정갑석 정봉화 정천화 정영의 조무쇠 한은동 황의동 황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