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현수 공적비

4

주소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254-6
탐방로그
200m 떨어진 곳에 청주 경씨 종중묘원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경현수 선생 공적비를 찾았다.
愛國志士 悟菴 慶賢秀 先生 功績碑(애국지사 오암 경현수 선생 공적비)
愛國志士 悟菴 慶賢秀 先生 功績碑
(애국지사 오암 경현수 선생 공적비)
나라의 주권이 외세의 침략으로 위태로울때 나라 있음만을 알고 집안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으며 민족이 있음만을 알고 내 몸이 있음을 알지 못한채 신명과 가산을 바쳐 국권을 지키려다 통한의 생애를 마치신 애국지사가 여기 누워 계시니 바로 오암 경현수(자 희백) 선생이시다. 공의 관향은 청주로 시조는 고려조 평장사 진이요 청운부원군 복흥은 21대조가 되시고 부제학 관은 12대조가 되시며 돈녕부 도정 선은 조부가 되시니 1861년(신유) 정월 28일 파주군 적성면 관동에서 순호공의 장자로 출생하시어 후에 백부 원호공에게 출사하시다. 일찌기 아우 문수와 함께 중암 김평연 선생에게 수학하여 맹자의 도와 정주의 법을 익히고 성균관 교수에 제수되어서
는 이나라 동량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시다. 을미년 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분노를 참을 길없어 아우 문수(성균관 박사) 홍재구 유기일 유응두 등과 철원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고종의 특사로 석방되었으나 나라의 운명이 시시각각으로 위태로와지매 원주 의병진의 이인영 등과 기병하는 한편 고종황제의 밀서를 받들고 중국혁명당에 군사원조 교섭 특사로 밀파되어 활약하고 귀국하여서는 전국유약소의 경문수 유인석 전덕원 등과 궁문 밖에서 을사5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일본의 간계를 폭로하는 격문을 각국공관에 비밀히 보내다가 발각되어 재차 구금의 몸이 되시다. 이어 7조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성균관 교수직을 사퇴하시고는 향리로 돌아와 왕산 허위 김진묵 등과 손잡고 적성 삭령 안협 토산 등지에서 일군과 싸우는 한편 관동지방에 산재해 있던 각 의병진을 통합하여 연합의병대를 조직하는 한편 세전되던 가산을 군자금으로 쾌척하였다. 기미년 고종의 국상을 당하여는 장자 우현과 상경하여 유림역사대를 조직하고 청량리에서 만세시위 중 우현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이듬해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서는 신조선 주간인 이달을 비롯하여 김영만 백의수(초월) 등과 의거 모의 중 일경에게 탐지되어 경성검사국에 검거 송치되었다. 1920년 8월에는 미국의회 극동관찰단이 내방하자 일본의 비인도적 행위를 규탄하는 「신명서」를 수교하고 국권회복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1922년 8월에는 일본대의사 황천오랑일행의 민정관찰단을 맞아 윤길병 전문 신긍선 동지들과 더불어 공동여관(현 조선호텔)에서 만나 대한의 자주독립 필요성과 일본의 신의배반을 통박하였다. 반평생을 오직 구국일념으로 동분서주하시던 공께서 드디어 1928년(무진) 10월 9일 한서린 임종을 고하시니 향년 68이시다. 후학들이 포천 운담사에 우암과 중암 그리고
오암 선생을 함께 배향하는 발문에 「그 글은 춘추의 강목이요, 그 법은 예악과 형정이라」고 적어 공의 학덕과 인품을 칭송하였다. 공이 가신지 반세기 만인 1977년 공의 구국공적이 공인되어 대통령표창이 추서됨에 보훈처의 후원과 후손 및 후학들이 한 조각돌을 다듬고 그 공적을 새기어 공께서 일군과 싸우시던 저 푸른 임진강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세우니, 공의 곧은 충절과 숭고한 구국정신은 강산과 더불어 영원히 기억되리라.

1985년 11월 일 서울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이응백 짓고
건립위원장 한국일보사 논설고문 윤종현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