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진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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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파주시 금촌동 산89-5
탐방로그
경기 파주시 금촌동 산 89-5 파주시중앙도서관 옆에 위치한 정태진 선생의 생가를 다녀왔다. 기념관이 세워진 곳은 그의 생가와 묘소가 자리잡고 있던 고향마을로, 최근 택지개발이 되면서 묘소는 광탄면 영장리 선영으로 이장하였고 생가는 철거 후 주초석, 상량목 등을 기념관 건축에 사용하여 유지(遺址)를 보존하게 되었다. 석인 정태진 기념관은 그의 유업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건립하였으며, 인근에 문학비도 함께하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정태진(1903-1952) 선생은 본관이 나주이며 호는 석인이다. 경기도의 파주군 금촌읍 능리에서 정규원과 죽산박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한글학자요 독립운동가인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고등여학교 교사로 봉직했다가 그 뒤 미국으로 유학해서 우스터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31년에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교육학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다시금 영생고등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1년에는 조선어학회(한글학교)에서 조선말큰사전 편찬을 맡았다. 1942년 9월에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경도 의홍원경찰서에 구금되어 징역2년을 선고받아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국이 광복되자 조선어학회를 복구하고 큰사전의 편찬을 다시 시작하는 한편 연희대학 중앙대학 홍익대학 동국대학등에서 강의를 했다. 1951년에 부산으로 피란했다가 이듬해에 서울로 올라와 큰사전 속간에 전념하다가 같은해 11월에 뜻밖의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저서로는 한자안쓰기 문제 시가집 아름다운 강산과 조선고어 방언사전과 중등국어독본 고어독본 등을 남겨놓았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받고 1997년 11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뽑혔다. 1998년 10월에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이에 선생의 아름다운 시와 문장 그리고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기려 후세에 거울이 되게 하고자 온 나라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이곳 파주시의 연고지에 문학비를 세운다.
2006년 7월 일 명지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이응호 삼가 짓고 파주시예총회장 솔뫼 임제철 삼가 쓰다
경기 파주시 금촌동 산 89-5 파주시중앙도서관
독립운동가이며 한글학자인 석인 정태진 선생의 기념관을 찾았다.
석인 정태진 기념관(石人 丁泰鎭 記念館)
이 기념관은 파주가 낳은 한글학자이며 독립 운동가인 석인 정태진(石人 丁泰鎭) 선생의 유업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건립되었다. 기념관이 세워진 이곳은 선생의 생가와 묘소가 자리잡고 있던 고향마을로 최근 택지개발이 되면서 묘소는 광탄면 영장리 선영으로 이장하였고 생가는 철거하여 주초석, 상량목 등을 기념관 건축에 사용하여 선생의 유지(遺址)를 보존하게 되었다. 정태진 선생은 1903년 음력 7월 25일 파주군 금촌읍 금능리 406번지에서 아버지 정규원과 어머니 죽산박씨 사이의 3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31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과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41년 6월 조선어학회 <조선말큰사전> 편찬원이 되었으며 1942년 9월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남 흥원경찰서에서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월 조국이 광복되어 조선어학회를 복구하고 <큰사전> 편찬을 다시 시작하였으며 틈틈이 연희대학, 중앙대, 홍익대, 동국대 등에서 국어학을 강의하였다. 1951년 1.4후퇴때 부산으로 피란하였다가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큰사전> 속간에 전념하였고 1952년 11월 2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받았으며 1997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98년 10월 이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되었다. 저서로는 <중등국어교본> <고독> <조선고어방언사전> 등과 많은 국어학 논문들이 있다.
정태진 - 한글 지킴에 온몸을 바친 독립 운동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한글은 창제에서 반포까지 험난한 길의 연속이었습니다. 또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도 온갖 시련의 길이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이 우리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의 말과 글을 이 땅에서 아주 없애려고 한 것이야말로 가장 큰 장벽이었습니다. 이런 암흑 시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한글을 지키고 연구한 석인(石人) 정태진(丁泰鎭) 선생의 노력으로 우리 말과 글은 활짝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석인 정태진 선생 문학비

한 생각
어버이 주신 입 겨레에게 받은 붓을
헛되이야 쓰오리만 어디 거져 두오리까
무거운 임의 은혜를 못 갚을까 두려워
우리말 크나큰 홰에 한글의 불을 다려
백두산 상상봉에 높이높이 세우고자
배달의 넓은 들 위에 고루고루 비치리
우리말 크나큰 배에 한글의 돛을 달고
먼 먼 바다 밖에 두루두루 다니고자
고려의 귀한 보배를 온 누리에 전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