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횃불을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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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간성읍 신안리 136
탐방로그
고성군 간성읍 신안리 165-2 달홀공원(옛 신안근린공원) 내에 위치 고성 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을 찾아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1930년 간성보통학교 / 1960년 간성보통학교
해동지도(고성군:북고성) 1722~1746년도
그날에 – 이선국

겨레여, 동포여
새벽이 처음 열리던
오천년 역사의 자존감으로
단박에 일어나라 소리쳤으리라

뜨거운 가슴
피 끓은 함성으로
어둠의 사슬을 끊고
깨어나라 일어나라 외쳤으리라

삼천리 금수강산
끝없는 아우성으로 길을 열고
선열의 핏빛으로 물든 이 땅에
민족의 뜨거운 혼불을 들길에 흩뿌렸으리라

아, 그날의 함성으로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목 놓아 불렀으리라
대한독립 만세! 우리나라 만만세!
해동지도(고성군:남고성) 1722~1746년도
1958년 간성(현 농협사거리)
고성군 간성읍 신안리 165-2 달홀공원(옛 신안근린공원) 내 고성 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을 찾아왔다.
3.1독립선언서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이 선언은 오천 년 동안 이어 온 우리 역사의 힘으로 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은 것이다. 우리 민족이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하려는 것이며, 인류가 양심에 따라 만들어가는 세계 변화의 큰 흐름에 발맞추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고 시대의 흐름이며,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정당한 권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 독립을 가로막지 못한다.
그동안 우리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 고통은 헤아릴 수 없으며, 정신을 발달시킬 기회가 가로막힌 아픔이 얼마인가. 민족의 존엄함에 상처받은 아픔 또한 얼마이며, 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 얼마인가.
아. 그동안 쌓인 억울함을 떨쳐 내고 지금의 고통을 벗어던지려면, 앞으로 닥쳐올 위협을 없애 버리고 억눌린 민족의 양심과 사라진 국가 정의를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이천만 조선인은 저마다 가슴에 칼을 품었다. 모든 인류와 시대의 양심은 정의의 군대와 인도의 방패가 되어 우리를 지켜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아가 싸우면 어떤 강한 적도 꺾을 수 있고, 설령 물러난다 해도 이루려 한다면 어떤 뜻도 펼칠 수 있다.
우리 땅을 빼앗고 우리 문화 민족을 야만인 대하듯 하며 우리의 오랜 사회와 민족의 훌륭한 심성을 무시한다고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탓하지 않겠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지금의 잘못을 바로잡기에도 급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도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결코 오랜 원한과 한순간의 감정으로 샘이 나서 남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낡은 생각과 낡은 세력에 사로잡힌 일본 정치인들이 공명심으로 희생시킨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 민족이 바라지 않았던 조선과 일본의 강제 병합이 만든 결과를 보라. 일본이 우리를 억누르고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따라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이 생겨나고 있다. 과감하게 오랜 잘못을 바로잡고, 진정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사이좋은 새 세상을 여는 것이 서로 재앙을 피하고 행복해지는 지름길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또한 울분과 원한에 사무친 이천만 조선인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다. 이는 동양의 안전과 위기를 판가름하는 중심인 사억만 중국인들이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하여 결국 동양 전체를 함께 망하는 비극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다.
오늘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이 정당한 번영을 이루게 하는 것인 동시에, 일본이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 또 중국이 일본에 땅을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중요한 부분인 동양 평화를 이룰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조선의 독립이 어찌 사소한 감정의 문제인가!
아, 새로운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지난 수천 년 갈고 닦으며 길러온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 새봄이 온 세상에 다가와 모든 생명을 다시 살려내는구나. 꽁꽁 언 얼음과 차디찬 눈보라에 숨 막혔던 한 시대가 가고, 부드러운 바람과 따뜻한 볕에 기운이 돋는 새 시대가 오는구나.
온 세상의 도리가 다시 살아나는 지금, 세계 변화의 흐름에 올라탄 우리는 주저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다. 우리는 원래부터 지닌 자유권을 지켜서 풍요로운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 원래부터 풍부한 독창성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세계에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꽃피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떨쳐 일어나는 것이다. 양심이 나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나와 함께 나아간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어둡고 낡은 옛집에서 뛰쳐나와 세상 모두와 함께 즐겁고 새롭게 되살아날 것이다. 수천 년 전 조상의 영혼이 안에서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기운이 밖에서 우리를 지켜 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저 앞의 밝은 빛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뿐이다.

세 가지 약속
하나.
오늘 우리의 독립 선언은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한 민족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로운 정신을 드날릴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마음껏 드러내라.
하나.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을 세운 지 4252년 3월 1일(1919년 3월 1일)
조선 민족 대표
손병희 김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고성군 3·1독립만세운동사

현재의 고성군으니 3·1독립만세운동 당시에는 간성군(杆城郡)이었다. 이곳은 강원도 동해안에서 가장 먼저(3월 17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이며, 일본 경찰이 주둔한 다른 지역과 달리 독립운동이 활발하여 일제 헌병의 관할이었다. 고성면에서는 1919년 3월에 이미 일제의 보병부대인 20사단 74연대 1개소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간성면 신북면(新北面) 계월리(桂月里) 청년 김동원(金東元, 22세)이 초순에 「조선독립선언서」 1통을 입수하여 3월 13일 밤에 고성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자택으로 가지고 와 첫머리에 '고성재판'이라는 제목을 붙인 독립선언서 50매를 등사하였다. 다음날 14일 고성읍 밖에서부터 간성가도, 지경리(地境里)까지 게시판에 붙이거나 길위에 뿌려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고 독립운동의 분위리를 조성하였다. 이 일로 김동원은 출판법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판결을 받았다.
한편 강원도 철원 일대를 중심으로 조직된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 단원인 토성면(土城面) 출신 김형석·이근옥·이석규·김연수·문명섭 등이 태극기를 준비하고 주민 약 300여 명을 규합하여 3월 14일 토성면 교암(橋岩)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이어서 군내면(郡內面) 하리(下里) 출신인 이동진(李東鎭)은 개성 한영서원에 다니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친구인 간성보통학교 학생 함기석(咸基錫)과 함께 1919년 3월 17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자택에서 '지금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일으키니 문명교육을 받은 누구라고 독립을 위하여 만세를 부르자'라는 내용의 선전문을 만든 후 간성보통학교 4학년 교실 입구에 붙였다. 이 선언문을 읽고 자극받은 정정구 외 12명이 학생 150여명을 운동장으로 모으로 대한독립을 외쳤다.

3월 27일 군중과 함께 간성군 교암·죽도·봉평·간성장터에서 태극지를 흔들며 격렬한 만세운동을 펼쳤고, 이를 계기로 양양등 동해안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통분하게도 이를 주도하였던 김백운 등 22명은 헌병에 체포되어 1년 이상의 고문을 겪으면서 옥고를 치렀다.

아울러 통천군 임남면(臨南面) 장전리(長箭里, 1919년 5월 15일 고성군 편입) 기독교인 최상린(崔祥麟)을 중심으로 신북면 사무소에서 김두만 안홍식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90여 매를 등사하고, 3월 31일에는 태극기 250개를 만들어 4월 1일 장전리 기독교인의 집을 찾아다니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4월 2일에는 기독교인 약 20여 명이 모아 미리 만든 태극기를 배부하고 앞장서서 동리(고성읍) 다리까지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다음날 100여 명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경찰주재소까지 행진하는 등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거사를 도모한 최상린, 김두만, 안흥식, 우낙영, 박성준, 유시국 등은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 소위 보압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구속·수감되었으며, 또한 1년 이상의 모진 고문을 당하며 옥고를 치러야 했다.

국제적 이목을 꺼려한 일제는 3·1독립만세운동의 규모를 고의로 축소하여 그들의 만행을 감추려하였다. 실제로 헌병에 검거되고 투옥된 독립운동자 수는 일제의 기록보다 훨씬 많았다.

3·1독립만세운동은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자주독립운동이며, 한민족(韓民族)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에 천명하며 우리 민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이로써 일제가 통치정책을 바꿀지 않을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었다.

특히 3·1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고, 횃불이 된 3.1독립만세운동은 아시아 약소국가의 민족운동과 저항정신의 선구가 되었다.
고성 지역 항일애국지사(85명)
1907년 의병(7인)
권형원, 권석근, 김백룡, 박광봉, 이덕근, 주광석, 최용구
1919년 3.1독립만세운동(31인)
김동원, 김두만, 김백운, 김연수, 김영집, 김응섭, 김형석, 권기수, 남기봉, 남기일, 박마리아, 박성준, 박종진, 서병택, 이근옥, 이내구, 이동진, 이석규, 이응규, 우낙영, 유시국, 안흥식, 임갑용, 문명섭, 정남용, 정종구, 최상린, 최화길, 함기석, 함성희, 함청일
1920년대 항일운동(8인)
김용득, 김종화, 박대일, 박태선, 하용락, 한명찬, 함연호, 함창래
1930년대 항일동운(26인)
김감섭, 김은규, 김종희, 김춘봉, 권오경, 권충일, 남익환, 박용덕, 박웅남, 박춘섭, 우종국, 장수연, 장홍섭, 전인목, 정재현, 정의경, 정평국, 천성환, 최봉수, 최용규, 하명식, 한귀현, 한봉현, 함재순, 황동연, 황창갑
1940년대 항일운동(13명)
강경석, 김상정, 김운봉, 김인석, 김학조, 권원호, 서주원, 성현호, 신형균, 이완익, 정훈, 최창규, 홍태식
고성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 건립문
우리가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고 그 포악무도한 압정에 시달리던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의 울분과 강개가 멍울진 독립선언은 반만년 역사를 이어온 배달겨레의 위대한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하였다.
우리 지역 청년, 학생, 농민과 노동자 등 수 많은 민초들은 일본제국주의 광포한 칼날 앞에서도 고성 강토를 휘달리며 고성재판이라는 독립선언서를 만인에게 알렸으며, 조선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나눠주고 독립의 열망을 심어주었다.
이들은 총칼을 든 헌병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여 결국 좌절하고 말았으나, 당시 김동원 등과 간성보통학교 150명의 학생들, 300여 민초들이 피를 토하며 외친 그날의 함성은 독립의 횃불이 되었다.
이처럼 고성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 강점기 가장 빛나는 민족운동으로서 자주독립의 열망과 의지를 확인하는 횃불이었다.
장하다 그 충절! 조국을 되찾고자 항거한 그 절규를 어띠 잊으리오!
여기에 비를 세우는 것은 동해안 최초 자주독립 의지로 횃불을 높이 들어 항거한 고성지역 애국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이 강토를 지키고자 함이다.
2020년 3월 27일
고성군수 세움
작품설명
작품명: 횃불을 들다
재료: 대리석, 화강암, 청동, 스텐레스 스틸
규격 : 9.7m X 10.3m X 8m(H)
사업 위치: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신안리 137(달홀공원)
빛과 횃불의 형상을 모티브로 주탑의 형상을 디자인 하였다. 3.1운동을 의미하는 3개의 주탑은 단단한 하부에서 날렵한 상부로 이어지는 유려한 곡선을 통해 그날의 횃불을 표현하며 웅장 하게 하늘로 솟아오른다.
기념탑의 중심은 독립운동이 이루어진 장소를 의미하고 바닥에는 우리나라 꽃 무궁화의 패턴을 적용하였다. 또한, 주탑의 양 옆에 동상을 세워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독립운동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주탑의 뒤편으로 고성군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와 독립운동가의 공적 등을 담은 설명판을 설치하여 주민들이 고성군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사를 이해하고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 받도록 하였다.
계단과 슬로프를 적용하여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제단과 향로를 설치하여 추모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하였고, 전체적인 재료는 화강석을 사용하여 유지관리가 용이하도록 하였다.
이곳의 3.1 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을 찾은 많은 후손들이 선열들의 그날 힘찬 함성과 독립의 열망을 다시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2020년 3월 1일
조각가 신종택
(간성초 44회, 고성중 18회, 고성고 17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