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순 순국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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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현방리 99-2
탐방로그
1993년 11월 임형순의 구국정신을 기리고자 순국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가 향토의 제현들의 뜻을 모아 순국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義兵將 任亨淳 殉國追慕碑(의병장 임형순 순국추모비)
의병장 임형순 순국열사 추모비
임공의 휘는 형순이고 자는 행원이며 본관은 풍천이다. 문과급제하고 가선대부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한 휘 내신 호 어음공의 후손으로 임진왜란시 선무훈에 오른 승정원 좌승지이신 위가 12대조이고 통정대부 돈영부도정이신 수호가 조부이고 고는 생원 규재이며 비는 전주유씨이다. 공은 1891년 고종 신미5월11일에 여주군 흥천면 내사리에서 2남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고 학문에 전념하니 청년 유생으로 이름이 났으나 공명에 뜻이 없고 가도만을 착실히 지키는 청년처사라고 까지 일컬었다. 또한 집한채를 뛰어넘을 정도로 날렵한 용맹이 있으며 상항 언행이 신중하고품서이 강직하며 애국충절에 불타는 의리의 청년유생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간교한 침략행위가 노골화 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한반도에서 청의 세력을 몰아내고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노일전쟁으로 러시아세력을 추출한후 소위 을사조약을 빙자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의 불법적임을 해아특사로 하여금 만국공의에 호소한 고종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국군을 해산하는등 간악한 일본의 만행은 천인을 공노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땅에 배달민족의 분노는 요원한 불길되여 을미의병을 위시하여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우리강토 방방곡곡에서 창의의 불길이 하늘을 뒤덮고 왜적을 저주하는 함성이 강산을 진동시켰다. 이를 바라보는 공은 향토에서 학문만 연수하고 평안히 있을 수 없어 분연히 떨쳐일어나 1907년 7월에 이천창의를 선포하니 당일로 300여명이 모여들어 창의소장이 되니 여주 양평등지의 의병과 연계하여 용문산에 본영을 두고 대장에 이인영, 우군장에 박관일, 좌군장에 정대일 좌군부장에 임형순이 되어 이천 여주 광주 양평 음죽 지평 죽산 양지 용인 안성등지에서 일군과 십수차 전투를 하였다. 한때는 원주에서 오는 민긍호부하와 함께 합세하여 여주를 공격하기도 하였고 충주에서 오는 이강년 부하와도 합세하여 음죽 죽산등지
에서 전투하였다. 그 뒤 임형순 의병장은 본거지를 이천과 광주의 접경인 원적산에 두고 양평 용문산과 광주의 대화산과 연계 교차하면서 이천 광주 양평 지평 여주 등지로 유격전으로 수시로 습격하여 일군에게 맏대한 피해를 주는 동시에 치열한 격전도 여러번 하였다. 특히 일군이 서울에서 이천 충주로 가는 연도와 수원에서 이천 여주로 왕래하는 일군을 산속에서 매복하였다가 기습을 하하여 수십차의 전과를 갖기도 하였다. 또한 일보병 51연대에서 충주로 군량을 수운할때 이를 탐지한 공의 부대와 양근의병 천 여명이 이포 근처에 도달할 무렵 불시기습하여 두 시간 교전 끝에 군량을 노획하였는데 수 명의 병력을 잃고 여주로 도주한 일군은 다음날 여주수비대와 합세하여 이포에 왔으나 의병들이 없는고로 민가 수십 호만을 불태웠다. 공은 양지 추계리에 매국노 송병준의 집을 밤중에 습격하여 일군 순사를 사살하고 무장을 노획한 후로는 일군 40여 명이 주둔하였다. 그해 11월 4일, 이포 방면으로 정탐 나가던 일본군과 한인 순사 5명을 산중에 매복하였다가 불시에 포위공격으로 전멸시키었다. 이포와 이천 사이는 일군이 나루를 이용하여 서울에 왕래하는 주요 통로였는데 수시로 의병의 습격을 받으니 당시 일군의 고심이 심하였다. 이천 북방 원적 산하에서 일군과 대격전이 몇 차례 있었는데 의병은 산고지에서 공격하고 일군은 산하에서 응전하게 되니 일군이 불리하여 큰 피해를 받게 된 일군은 그 보복으로 이천읍을 위시하여 백사면 신둔면 부발면 일대의 각 동리를 충화한 것이 900여호에 이재민이 5000여 명에 달하도록 초토전의 만행을 자행하였다. 매국행위하는 일진회의 응징에 있어서 매일 밤 회원을 사살하는 것이 각 군에서 파생적으로 자행되었고 1908년 2월에는 이천 일진회원을 19명이나 사살하는 대토벌전이 있었다. 그리하여 일진회원들은 추계 매국노 송병준 집으로 집결 피신했는데 그 수가 400여 명에 달하였다한다. 공의 부하는 일군의 야간기습에 큰 타격을 받은데 이어 원적산 토벌작전으로 패전을 거듭하여 제천 방면으로 갔다가 1908년 5월 안동 전투에서 전멸하니 시신조차 거둬주는 이 없이 30의 의기청년 유생은 천추의 한을 남기고 일생을 마치니 애석하도다! 산마루에 두견새만 홀로 슬피울어 고혼을 위로하였도다. 일제는 공의 가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추출하여 공의 고와 제 그리고 어린아들 기빈은 유리하다가 객사하였고 유족이란 다만 어린 딸 영단만이 살아남아 박공 정호에게 부양되어 자부를 삼으니 그가 바로 박운한의 자당이다. 이렇듯 숭고한 공의 애국충절의 의거가 역사에 매몰된 채 빛을 보지 못한지 80여 성상만에 이천군 향토사연구회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자 만시지탄이 있으나 향토의 제현들이 뜻을 모아 공을 추모하는 비를 건립하여 자손만대에 귀감을 삼고자 명하는 바이다.
오호통재라!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창의해서 좌충우돌하였으나 큰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젊은 기개가 넘칠 나이에 원통하게도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니 이에 배달민족의 비통은 하늘에 사무칠 뿐이로다. 공이 살신성인에 뿌리신 숭고한 피로 이 강토에는 광복이 왔고 되찾은 금수강산은 번영을 구가하는 지금에 당신의 명복을 비노니 기뻐하소서!
1993년 11월 의병장 임형순 순국열사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 건립
교육학박사 정암 김동옥 지음 담양후인 전광홍 서
위원명단
회장 김동옥, 상임부회장 국희영, 부회장 박영신, 부회장 김송현, 고문 박영문 박완구 이갑균 김선용 전우학, 총무 최종규
종중대표 임창일 임창학, 위원 강성환 강충일 김관식 김노길 김용택 김천봉 서세기 성광용 신현익 안금식 엄기주 엄동국 오정출 원중재 유광수 유상철 윤인상 윤필영 이강우 이경완 이상완 이은구 이인수 이재구 이종국 이종렬 임갑순 임관순 임광빈 임선재 임용순 임응빈 임창규 임창복 임창호 임택순 임학규 전영표 정석우 정용민 조한택 최종욱 최현식 한상의 한승남 홍봉표 홍유표 황동근
유족 자 기빈, 현자 성빈, 자부 엄정용, 녀 금단, 서 박돈이, 손자 창만, 외손자 박운한, 외손부 정순희, 외손자 박운성, 외손부 김정녀,
외종손자 박정우, 외증손부 권미경, 외증손자 박정하, 외증손자 박정림, 외증손부 염혜선
뒷편에 서있는 善隣會紀念碑(선린회 기념비)
이천시 백사면 현방리 99-2 검바위공원 내 의병장 임형순 순국추모비를 찾았다.
의병장으로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및「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지배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같은 시기에 임형순을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1907년 이후 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1908년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 끝에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義兵將 任亨淳 殉國追慕碑(의병장 임형순 순국추모비)
義兵將 任亨淳 殉國追慕碑(의병장 임형순 순국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