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813-18
- 탐방로그
- 경기 의정부시 신곡2동 경기도 북부도청 앞 윤원세 선생 추모비를 찾아왔다. 윤원세 공적기념비와 같은 장소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기 의정부시 신곡2동 경기도 북부도청 앞 윤원세 선생 추모비를 찾아왔다.
애국지사 면암 윤공 원세 추모비
고 면암 윤원세선생은 1890년 11월 7일 의정부시 금오동 84번지 향리에서 파평윤문 경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시어 소년시절부터 부모에게 효심이 극지하고 성품이 강직하셨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긴 암흑기 난국의 일제치하가 시작되자 선생은 망국의 한을 농촌계몽운동과 진흥사업에 불살라 부업장려와 절미운동 부녀자들의 물산장려와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당 개설등 민족의 거울로 흠모받아 부족함이 없게 농촌운동에 정진하셨다. 1919년 조국의 독립을 외치는 민족의 함성이 전국을 흔들때 선생은 나이 29세로 기미독립운동대열의 선봉에 서서 그해 3월5일 금오리를
거점으로 이윤의씨등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켜 의정부를 휩쓸었으니 그 용기와 애국심은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했으며 계속되는 항일독립운동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삶이라 하겠고 그 시대의 사표라 할 수 있다. 또 1936년 8월 선생은 천도교 양주교구장 자격으로 황해도 은율에서 가진 전국 멸왜 기도집회에서 천도교구장 대표 특별기도회에 참석 암약하다 발각되어 왜경에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이른바 무인멸왜기도사건으로 신의경찰서에 구금 수감도시니 옥중에서 왜경의 가혹한 고문을 당하시면서도 초지일관 굽힘없이 심한 고문때마다 큰 소리로 "멸왜기도문"을 외쳐 왜경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게 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1939년 봄 극심한 고문으로 신병을 얻어 출옥은 되었으나 동년 5월 2일 혹독한 장독을 못이겨 순절하시니 향년 49세로 일생을 마치셨다. 젊어서는 농촌 민중계몽과 물산장려의 애향운동 그리고 장년에는 천도교인으로써 일제 침략에 대항하여 항일독립투사로 투쟁해온 애국일념의 높은 기상과 곧은 절개는 낮은 듯하지만 진정 높은 기상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높은 성품과 넓은 포부 깨끗한 정신은 우국의 지사로서 후인들에게 나라사랑의 귀감이 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묘소는 서기
1998년 7월 6일 의정부 신곡동 산5번지에서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해 모셨다. 자로는 창현 중현 두 아들을 두셨으며 손에는 한홍 한성과 상훈 정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