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덕성리 368-16
- 탐방로그
- 유해는 광무 9년 7월 고향인 용인에 안장되었으며,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내부협판(內部協瓣)에 추서되었으며, 장충단(奬忠壇)에 배향되었다. 이한응의 묘는 용인시 이동면 덕성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5년도에 설치한 상석과 촛대석, 곡담, 묘비가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한응 묘소(李漢應 墓所) Tomb of Lee Han-eung
지정번호: 용인시 향토유적 제49호
지정년월일: 1999. 7. 14
시대: 1905년(광무 9)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산70-1
분류: 무덤 / 봉토분
이한응 열사(1874~1905)의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이며, 본관은 전의(全義)로서 용인시 이동면 화산리에서 출생하였다. 현재 묘소의 위치는 이동면 덕성리 산70-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5년도에 설치한 상석과 촛대석, 곡담묘비가 있다. 그리고 전해오는 유품으로는 친필유서, 일기, 유방첩 등이 있다. 16세때 관립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21세에 성균관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으며, 28세 때인 광무 5년(1901) 3월 주한 영국, 벨기에 양국 공사관의 참사관으로 부임하였으며 광무 6년(1902)에는 공사 민영돈이 귀국함에 따라 특명서리 공사로 임명되었다.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있는 동안 대한제국의 위상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기울어져가는 대세를 일개 청년 외교관의 노력만으로는 돌이키기는 어려웠다.
마침내 광무 9년(1905) 음력, 4월 9일 3통(조국과 형과 부인에게)의 유서를 남기고 타국땅에서 순절하였다. 꽃다운 나이 방년 32세였다. 이한응 열사의 순절은 국내외의 큰 방향을 일으켰다. 고종황제가 일본의 강압적인 한일신약(韓日新約)체결로 인해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음을 슬퍼하였으며 친히 치제문을 보내어 고인의 애국충정을 치하하고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내부협판(内部協辦)에 추서되어 장춘단에 향사(享祀)했다. 또한 황성신문을 통해 그의 순절 소식이 전하여져 많은 애국지사들이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조문하였다. 이로부터 7개월 후 민영환 선생이 순절하였으며, 2년 후 이준열사 헤이그 순절이 이어졌다. 이렇게 한말의 입절한 여러 순국열사 중에서 범(絶)을 보였다는 점에서 선생의 순절은 더 한층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대외적으로도 선생의 유체와 유품을 보내온 주 런던 영예총영사 마켕톤의 편지을 통해 볼 때 그가 타국의 외교관들에게 눌리지 않고 대한제국의 위상을 드높였음을 알 수 있다. 해방이후 순국열사 이한응선생 추모회가 만들어져 유사(遺史)가 간행된 바 있고 그의 행적과 사상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지정번호: 용인시 향토유적 제49호
지정년월일: 1999. 7. 14
시대: 1905년(광무 9)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산70-1
분류: 무덤 / 봉토분
이한응 열사(1874~1905)의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이며, 본관은 전의(全義)로서 용인시 이동면 화산리에서 출생하였다. 현재 묘소의 위치는 이동면 덕성리 산70-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5년도에 설치한 상석과 촛대석, 곡담묘비가 있다. 그리고 전해오는 유품으로는 친필유서, 일기, 유방첩 등이 있다. 16세때 관립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21세에 성균관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으며, 28세 때인 광무 5년(1901) 3월 주한 영국, 벨기에 양국 공사관의 참사관으로 부임하였으며 광무 6년(1902)에는 공사 민영돈이 귀국함에 따라 특명서리 공사로 임명되었다.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있는 동안 대한제국의 위상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기울어져가는 대세를 일개 청년 외교관의 노력만으로는 돌이키기는 어려웠다.
마침내 광무 9년(1905) 음력, 4월 9일 3통(조국과 형과 부인에게)의 유서를 남기고 타국땅에서 순절하였다. 꽃다운 나이 방년 32세였다. 이한응 열사의 순절은 국내외의 큰 방향을 일으켰다. 고종황제가 일본의 강압적인 한일신약(韓日新約)체결로 인해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음을 슬퍼하였으며 친히 치제문을 보내어 고인의 애국충정을 치하하고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내부협판(内部協辦)에 추서되어 장춘단에 향사(享祀)했다. 또한 황성신문을 통해 그의 순절 소식이 전하여져 많은 애국지사들이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조문하였다. 이로부터 7개월 후 민영환 선생이 순절하였으며, 2년 후 이준열사 헤이그 순절이 이어졌다. 이렇게 한말의 입절한 여러 순국열사 중에서 범(絶)을 보였다는 점에서 선생의 순절은 더 한층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대외적으로도 선생의 유체와 유품을 보내온 주 런던 영예총영사 마켕톤의 편지을 통해 볼 때 그가 타국의 외교관들에게 눌리지 않고 대한제국의 위상을 드높였음을 알 수 있다. 해방이후 순국열사 이한응선생 추모회가 만들어져 유사(遺史)가 간행된 바 있고 그의 행적과 사상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菊隱 李漢應 烈士 墓(국은 이한응 열사 묘)
菊隱 李漢應 烈士 墓(국은 이한응 열사 묘)
서기 1965년 9월 일 자 상룡
菊隱 李漢應 烈士 墓(국은 이한응 열사 묘)
목숨을 홍모처럼 가벼이 여기고 의를 태산같이 무겁게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곧 의인이요 정신은 곧 정기다. 세상에 사람은 제제할지라도 사람마다 의인이 아니오. 시대는 면면히 흐르지만 언제나 의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의인은 국가불운의 제에 혜성처럼 출현하나니 그 광망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안태의 정도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의인이 나타난 곳에 반드시 나라는 부흥되고 겨례는 회생한다. 의인의 정기야 어찌 숭고하고 갸륵하지 않으랴. 전의후인 이한응 공은 고종 11년 갑술 서기 1984년 9월 21일에 태어난 의인이니 출생준층 첩출하는 한말의 내환과 외우로 풍운이 가장 암담하고 파란이 심히 음악한 속에 부대끼게 되었으며 또 갑오에는 엄친 남영우령관 경고공이 관군의 영장으로 동학란을 토벌하다가 전사하였으니 공은 이때 약관의 나이로되 그 흉중에는 강극한 비통과 함께 만곡의 감회가 서려 있었다. 공은 천성이 영오한 위에 이와같은 환경의 자극을 받아 범인과 다른 뜻을 품고 사숙에서 한학을 수습하다가 16세에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연마하였고 21세에는 사마방에 응시하여 성균관지사에 합격하였으나 이해에 전기한 바 불의의 변상을 당하고 칩거 근신 중에 3년을 집상하였다. 24세에 한성부주사에 26세에는 모교인 영어학교 교관에 임명되어 맡은 바 직무에 진체면려하였다. 이에 그 인격과 재분이 인지되어 28세때 3월에는 주각여의양국 공사관 3등 참서관으로 발탁되었으니 이것이 곧 공으로 하여금 방명을 만대에 전하는 기연이 되었든 것이다. 처음에는 공사 민영돈과 함께 영경륜돈에 부임하여 그를 보좌하더니 2년 후 계유에는 통훈대부에서 정삼춤 통정대부로 승진되었고 갑진에는 민공사가 귀국하게되매 서리공사로서 영의양국과의 외교직무를 전담하였다.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한 여세로 호시탐탐 한반도
목숨을 홍모처럼 가벼이 여기고 의를 태산같이 무겁게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곧 의인이요 정신은 곧 정기다. 세상에 사람은 제제할지라도 사람마다 의인이 아니오. 시대는 면면히 흐르지만 언제나 의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의인은 국가불운의 제에 혜성처럼 출현하나니 그 광망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안태의 정도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의인이 나타난 곳에 반드시 나라는 부흥되고 겨례는 회생한다. 의인의 정기야 어찌 숭고하고 갸륵하지 않으랴. 전의후인 이한응 공은 고종 11년 갑술 서기 1984년 9월 21일에 태어난 의인이니 출생준층 첩출하는 한말의 내환과 외우로 풍운이 가장 암담하고 파란이 심히 음악한 속에 부대끼게 되었으며 또 갑오에는 엄친 남영우령관 경고공이 관군의 영장으로 동학란을 토벌하다가 전사하였으니 공은 이때 약관의 나이로되 그 흉중에는 강극한 비통과 함께 만곡의 감회가 서려 있었다. 공은 천성이 영오한 위에 이와같은 환경의 자극을 받아 범인과 다른 뜻을 품고 사숙에서 한학을 수습하다가 16세에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연마하였고 21세에는 사마방에 응시하여 성균관지사에 합격하였으나 이해에 전기한 바 불의의 변상을 당하고 칩거 근신 중에 3년을 집상하였다. 24세에 한성부주사에 26세에는 모교인 영어학교 교관에 임명되어 맡은 바 직무에 진체면려하였다. 이에 그 인격과 재분이 인지되어 28세때 3월에는 주각여의양국 공사관 3등 참서관으로 발탁되었으니 이것이 곧 공으로 하여금 방명을 만대에 전하는 기연이 되었든 것이다. 처음에는 공사 민영돈과 함께 영경륜돈에 부임하여 그를 보좌하더니 2년 후 계유에는 통훈대부에서 정삼춤 통정대부로 승진되었고 갑진에는 민공사가 귀국하게되매 서리공사로서 영의양국과의 외교직무를 전담하였다.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한 여세로 호시탐탐 한반도
에 대한 침략의 독아를 더욱 날카롭게 하여 로일전쟁에 체결한 영일동맹의 조약을 개정 강화하니 그중에는 일본이 한국의 정치 경제 군사상에 대하여 지도감독 및 보호할 권리를 영국은 인지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갑진 2월에 체결한 한일의정을 동 8월에는 더욱 굴욕적인 한일협약으로 바꾸어 한국의 재정과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공은 한일조약의 불가를 강력히 건의하고 영일동맹의 개정을 극력저지하려고 하였으나 대세 불리하여 공의 주장이 하나도 관철되는 바 없으므로 만사휴의하다가 필경 을사 5월 12일 음 4월 9일에 자결하고 말았으니 방년 32세라. 꽃답도다 공의 위국단성이여 빛나도다. 공의 고매장렬한
정기여. 공은 진실로 애국의 화신이요 의인 중의 의인이로다. 공은 또한 한말 순국열사의 최선봉이 되었으니 당시 조정에서는 공의 절의를 현창하기 위하여 종2품 가선대부 내부협판에 추서하고 장충단에 향사하였으며 작년 가을에는 적시 장충단에 기념비를 건립하여 그 대의를 길이 사모하려 하였다.
전의 이희승 찬
안동 김충현 서
서기 1965년 을사 11월 일 국은 이한응 열사 추모회 회장 이은상 건립
전의 이희승 찬
안동 김충현 서
서기 1965년 을사 11월 일 국은 이한응 열사 추모회 회장 이은상 건립
앞에는 선생의 양자의 묘가 있었다. 민의원 전의 이공 상용 니콜라의 묘
民議院 全義李公 相龍 니콜라의 墓(민의원 전의이공 상룡 니콜라의 묘)
공은 고려 개국공신 삼중대광 태사 전의 이공 휘 탁의 32세손이요 예문관 대제학 문의공 휘 언중의 24세 후손으로서 이름은 상용이며 신명은 니콜라요 호는 국정이다. 1911년 음력 9월 12일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화산리에서 한승의 차남으로 탄생되고 영국 런던에서 1905년 주영 전권공사 서리로 순국한 중부 국은 한응 열사에 입계하다. 1930년 경복중학을 거쳐 1933년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 경상남도 속으로 관계에 투신하다. 광복 후에 밀양군수 창원군수 경남상공국장 진주부윤 경남내무국장을 거쳐 1954년 경상남도지사 1957년 내무부차관을 역임하고 1958년에 제4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 1959년 내무분과위원장을 맡다. 집안에서는 근검하고 나라일에 공명정대하였으며 믿음이 두터운 성공회교인이었다. 1968년 5월1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영면하니 향년이 58세러라.
1969년 4월 일
1969년 4월 일
미망인 전주이씨 옥용
사자 진섭 민섭 영섭
손 기동 기준 기홍
사자 진섭 민섭 영섭
손 기동 기준 기홍
이 묘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단으로 바뀌었다.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덕성리 368-16 이한응 열사 묘소 앞에 용인독립운동유적 안내판이 건립되어서 찾았다.
[용인 독립운동 유적] 국은 이한응(李漢應) 열사 묘
[용인 독립운동 유적] 국은 이한응(李漢應) 열사 묘
향토유적 제 49호 /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산 70-1
이곳은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앞두고 순국한 이한응열사가 안장된 묘역이다. 이한응은 1874년 용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의이고 자는 경천이며 호는 국은이다. 1892년 한성관립영어학교를 졸업,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897년 한성부주부를 거쳐 1899년 한성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선출되었다. 1901년 3월 영국, 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런던에 부임하였다.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의 귀국으로 서리공사가 되어 외교의 모든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같은 해 8월 제1차 한일협약이 강제로 성립되어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자,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 재외사절단이 공동 항쟁을 하도록 토의하였다. 그러나 영국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강탈할 음모를 획책하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자살하였다. 사후 고종의 특명과 주영한국공사관 명예총영사 마틴턴의 주선으로 유해는 용인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장충단 배향 및 가선대부 내부협판에 추증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향토유적 제 49호 /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산 70-1
이곳은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앞두고 순국한 이한응열사가 안장된 묘역이다. 이한응은 1874년 용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의이고 자는 경천이며 호는 국은이다. 1892년 한성관립영어학교를 졸업,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897년 한성부주부를 거쳐 1899년 한성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선출되었다. 1901년 3월 영국, 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런던에 부임하였다.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의 귀국으로 서리공사가 되어 외교의 모든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같은 해 8월 제1차 한일협약이 강제로 성립되어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자,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 재외사절단이 공동 항쟁을 하도록 토의하였다. 그러나 영국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강탈할 음모를 획책하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자살하였다. 사후 고종의 특명과 주영한국공사관 명예총영사 마틴턴의 주선으로 유해는 용인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장충단 배향 및 가선대부 내부협판에 추증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용인 독립운동 유적] 국은 이한응(李漢應) 열사 묘
향토유적 제 49호 /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산 70-1
이곳은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앞두고 순국한 이한응열사가 안장된 묘역이다. 이한응은 1874년 용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의이고 자는 경천이며 호는 국은이다. 1892년 한성관립영어학교를 졸업,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897년 한성부주부를 거쳐 1899년 한성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선출되었다. 1901년 3월 영국, 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런던에 부임하였다.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의 귀국으로 서리공사가 되어 외교의 모든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같은 해 8월 제1차 한일협약이 강제로 성립되어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자,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 재외사절단이 공동 항쟁을 하도록 토의하였다. 그러나 영국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강탈할 음모를 획책하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자살하였다. 사후 고종의 특명과 주영한국공사관 명예총영사 마틴턴의 주선으로 유해는 용인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장충단 배향 및 가선대부 내부협판에 추증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향토유적 제 49호 /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산 70-1
이곳은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앞두고 순국한 이한응열사가 안장된 묘역이다. 이한응은 1874년 용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의이고 자는 경천이며 호는 국은이다. 1892년 한성관립영어학교를 졸업,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897년 한성부주부를 거쳐 1899년 한성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선출되었다. 1901년 3월 영국, 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런던에 부임하였다.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의 귀국으로 서리공사가 되어 외교의 모든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같은 해 8월 제1차 한일협약이 강제로 성립되어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자,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 재외사절단이 공동 항쟁을 하도록 토의하였다. 그러나 영국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강탈할 음모를 획책하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자살하였다. 사후 고종의 특명과 주영한국공사관 명예총영사 마틴턴의 주선으로 유해는 용인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장충단 배향 및 가선대부 내부협판에 추증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