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산99-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有韓 判敦寜院事 梧泉 金先生 奭鎭 之墓 貞敬夫人 海平尹氏 祔
(유한 판돈령원사 오천 김선생 석진 지묘 정경부인 해평윤씨 부)
(유한 판돈령원사 오천 김선생 석진 지묘 정경부인 해평윤씨 부)
돈녕부 참봉 증 의정부 참정 안동김공 도균 지묘 증 정경부인 연일정씨 부
유명 조선국 수록대부 창녕위 안동김공 병주 지묘 복온공주 부우
여초 안동김공 응현 지묘 배 우림 진주 강영순 부좌
대한민국 필원 종장 일중 김선생 충현 지묘 배 은율송씨 용순 부좌
서예가 일중 김충현 선생 조선의 마지막 선비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중은 중학시절 우리 글씨쓰는 법 교과서를 준비하고 훈민정음 고판본을 기초로 한글 고체를 창안하셨지만 스스로 천재에 비유한적이 없으며 평범한 시민으로 자처했습니다. 이것이 일중을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기념비문을 위당 정인보가 짓고 일중 김충현이 쓴 삼인의 인간관계 속에는 민족의 긍지를 지키는 선비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상형문자가 아닌 한글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예술로 승화시킨 어린 일중의 마음에 이미 나라 사랑의 충정이 깃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서예는 그냥 예술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의 혼이 들어있어서 빛납니다. 시적 향기가 묵향 속에 들어 있어서 빛납니다.
조선의 선비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빈 공간이 너무 큽니다. 하나의 일에 열중하고 찬 내에 손을 담고 얼굴을 씻는 일중으 모습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긴 유훈을 간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삶 나라와 의를 생각하는 삶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천칠년 가을 둘째 사위가 지은 조사를 큰딸 쓰다.
충무공 이순신의 기념비문을 위당 정인보가 짓고 일중 김충현이 쓴 삼인의 인간관계 속에는 민족의 긍지를 지키는 선비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상형문자가 아닌 한글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예술로 승화시킨 어린 일중의 마음에 이미 나라 사랑의 충정이 깃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서예는 그냥 예술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의 혼이 들어있어서 빛납니다. 시적 향기가 묵향 속에 들어 있어서 빛납니다.
조선의 선비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빈 공간이 너무 큽니다. 하나의 일에 열중하고 찬 내에 손을 담고 얼굴을 씻는 일중으 모습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긴 유훈을 간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삶 나라와 의를 생각하는 삶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천칠년 가을 둘째 사위가 지은 조사를 큰딸 쓰다.
공조참판 증 영의정 안동김공 연근 지묘 정경부인 남양홍씨 부
증 의정부 좌찬성 행 나주목사 안동김공 이석 지묘 증 정경부인 남양홍씨 부
유명 조선 문간공 화서 김선생 학순 지묘 정경부인 덕수이씨 부
工保亭(공보정)
위성사진으로 분석한 결과 이곳 (죽능리 742) 저 길로 가야한다.
이 길은 매우 좁은 농로이기 때문에 네비게이터는 인지를 못하고, 위성지도를 보면서 찾아가고 있다.
안동김씨 동강공파 죽능 선영 지기
경기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는 산자수명하고 주룡과 문맥이 해동명구를 이루어 려조 이래 명현의 유택이 산재하여 일대의 옥토는 실로 물화의 보고이다. 양주 율북리 목식동 설곡일원이 병참으로 지정됨에 따라 300년래의 선영을 천봉하게 되어 이곳 죽능리에 택지하고 해주오씨가 선점하는 1만 여평의 임야를 매입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정묘 1987년 가을 양주 선영 전체를 이곳에 옮겨 모시니 비로소 죽능선영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택재공 이하 사평공 영유공 나주공 및 참봉공 번계공 경인공에 이르는 7위를 옮겨 모시고 또 오현 선영이 수도 발전으로 인하여 오천공 묘소를 이곳에 천봉한 것은 병자 1996년 봄이라 현재 오현 선영에는 문간공 참판
경기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는 산자수명하고 주룡과 문맥이 해동명구를 이루어 려조 이래 명현의 유택이 산재하여 일대의 옥토는 실로 물화의 보고이다. 양주 율북리 목식동 설곡일원이 병참으로 지정됨에 따라 300년래의 선영을 천봉하게 되어 이곳 죽능리에 택지하고 해주오씨가 선점하는 1만 여평의 임야를 매입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정묘 1987년 가을 양주 선영 전체를 이곳에 옮겨 모시니 비로소 죽능선영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택재공 이하 사평공 영유공 나주공 및 참봉공 번계공 경인공에 이르는 7위를 옮겨 모시고 또 오현 선영이 수도 발전으로 인하여 오천공 묘소를 이곳에 천봉한 것은 병자 1996년 봄이라 현재 오현 선영에는 문간공 참판
공 효정공 동강공 창애공에 이르는 5위 분묘가 계시어 안동김씨 동 강공파 선영은 죽능과 오현 두 곳에 존재한다. 이곳 죽능에는 지난 연말에 서거하신 백아공묘를 합하여 현재 9위의 분묘가 동일 능선에 모시어졌다. 그러나 앞으로 오현 선영이 죽능으로 옮겨지고 또
생사존몰은 인지상정이라. 동강공파 구성원으로 이곳에 모이게 되면 일문이 단?하는 현상이 빚어지리라 여겨져서 일대 묘원을 이루게 되리라. 춘추묘제와 회전이 한 곳에서 행하여진다면 자자손손 영원히 선조를 숭모하고 일문이 단합하여 선영수호 및 일족의 돈목이 더욱 몇 배로 더할 것이다. 동산의 푸른 송백과 함께 근고엽무할진대 위로 선조는 지하에서 자손들의 번영함을 굽어 살피시고 그릇됨이 없도록 영우하실 새 이 어찌 자손으로서 큰 소망이 아니리오. 조선은 대를 이어 도덕과 학문에 앞서 충효를 실천하시어 일월과 함께 빛나신 우리 민족의 사표이시라. 이륜을 타고 나온 자손이라면 의당 조훈에 패역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나아가 가문을 빛내고 또 민족의 정수로 빼어날 것을 확신하며 아울러 앞으로 태어나는
자손들의 호만한 천자와 송죽 같은 기질을 기약할 수 있는 터전이 바로 이곳 죽능 선영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행동에 신중하고 큰 뜻을 잃지 말지어다.
기묘 광복절 11대손 응현 근식서병전
기묘 광복절 11대손 응현 근식서병전
순국선열 묘역 -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 산 99-1
이곳은 순국선열 오천 김석진 선생(헌종 9년 1843 ~ 융희 4년 1910)의 묘역이다. 선생은 조선말기의 문신으로 항일지사이며 경술(1910) 망국에 순절하였으니 본관은 안동, 자는 경소, 호는 오천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신 좌의정 청음 김상헌, 영의정 문곡 김수항, 택재 김창립 선생의 후로 순조부마 창녕위 김병수 선생의 손자이다. 철종 11년(1860)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 사간원 정언, 호조정랑, 사헌부 지평.장령, 통례원 좌통례, 철종실록 편수관, 사간원 사간, 증지, 병조참의.참지, 수안군수, 성균관 대사성, 경주부윤, 이조참의, 예조참판, 지성균관사, 이조.호조.형조.공조 참판, 한성좌.우윤, 좌.우승지, 광주부유수 겸 남한수어사, 형조판서, 지춘추관사, 대호군, 비서원경, 장례원경, 유족원경, 숭록대부, 판돈령원사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다음해 1월 22일 5적신의 처형을 상소하되 협박에 의한 조약은 공법상으로 폐기하기로 되어 있으니 외국 공사에게 성명을 내고 매국노를 주살하여 국헌을 바로잡아 백성을 생지옥에서 구하라고 하였다. 이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상주하기를 매국노들과는 불공대천이라, 하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반열에 설 수 없으니 의효전 향관의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하였다. 을미 고종 32년(1895) 양근 연양으로 은거하였다가 을사늑약으로 국가 위기를 맞아 경사로 돌아오니 10년이 지났고 정미 융희 원년 (1907)에 오현병사로 돌아왔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고 전직 고위관료에게 작위와 돈을 주어 회유책을 쓰되 선생에게도 남작위가 돌아오매 1910년 9월 8일(양력 10월 10일) 일사보국의 결심으로 미리 준비하였던 아편을 마시고 순국하니 순국하니 향년이 68세이다. 선생은 오현 선영(서울 강북구 번동)에 장하였다가, 양주군 와부면 율석리 선영을 이곳으로 면봉함에 1993년 5월 천봉하였다.
이곳은 순국선열 오천 김석진 선생(헌종 9년 1843 ~ 융희 4년 1910)의 묘역이다. 선생은 조선말기의 문신으로 항일지사이며 경술(1910) 망국에 순절하였으니 본관은 안동, 자는 경소, 호는 오천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신 좌의정 청음 김상헌, 영의정 문곡 김수항, 택재 김창립 선생의 후로 순조부마 창녕위 김병수 선생의 손자이다. 철종 11년(1860)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 사간원 정언, 호조정랑, 사헌부 지평.장령, 통례원 좌통례, 철종실록 편수관, 사간원 사간, 증지, 병조참의.참지, 수안군수, 성균관 대사성, 경주부윤, 이조참의, 예조참판, 지성균관사, 이조.호조.형조.공조 참판, 한성좌.우윤, 좌.우승지, 광주부유수 겸 남한수어사, 형조판서, 지춘추관사, 대호군, 비서원경, 장례원경, 유족원경, 숭록대부, 판돈령원사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다음해 1월 22일 5적신의 처형을 상소하되 협박에 의한 조약은 공법상으로 폐기하기로 되어 있으니 외국 공사에게 성명을 내고 매국노를 주살하여 국헌을 바로잡아 백성을 생지옥에서 구하라고 하였다. 이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상주하기를 매국노들과는 불공대천이라, 하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반열에 설 수 없으니 의효전 향관의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하였다. 을미 고종 32년(1895) 양근 연양으로 은거하였다가 을사늑약으로 국가 위기를 맞아 경사로 돌아오니 10년이 지났고 정미 융희 원년 (1907)에 오현병사로 돌아왔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고 전직 고위관료에게 작위와 돈을 주어 회유책을 쓰되 선생에게도 남작위가 돌아오매 1910년 9월 8일(양력 10월 10일) 일사보국의 결심으로 미리 준비하였던 아편을 마시고 순국하니 순국하니 향년이 68세이다. 선생은 오현 선영(서울 강북구 번동)에 장하였다가, 양주군 와부면 율석리 선영을 이곳으로 면봉함에 1993년 5월 천봉하였다.
안동김씨 동강공파 죽능선영지기(11대손 응현 근식서병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정묘 1989년 양주 율석리 목식동 선영 전체와 병자 1996년 오현 선영 오천공 묘소를 천봉하고 기묘 1999년 입표하였는데 이후 신사 2001년 길일에 문간공, 참판공, 효정공, 동강공, 창애공 묘소를 이곳 죽능 선영으로 천봉하니 두 곳으로 나뉘었던 선영이 모두 한곳으로 되고 또 앞으로도 안동김씨 동강공파 직계자손은 누구나 이 선영에 장사할 수 있도록 결의하니 명실 이곳이 우리 집안의 성스러운 곳이 되어 자손만대에 무궁번창할 것을 소원한다. - 12대손 귀년 추기
여초 선생 안동김공 응현 묘갈명
경인 안동김공 문현지묘
유한 번계선생 안동김공 윤동지묘
유한 동강 김선생 영한 지묘
제일 아래단. 가묘처럼 보인다.
아래에서 두번째 단
경인 안공김공 문현 지묘 유인 우봉이씨 부좌 자좌
번계선생 안동김공 윤동지묘
전혀 판독이 안 된다.
아래쪽에서 세번째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