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313
- 탐방로그
- 높이 200㎝ 정도의 자연석 좌대 위에 170㎝ 정도 크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자연석 좌대 앞면에는 “의병장옥여임경재상(義兵將玉汝任景宰像)”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추모 비문이 기록되어 있으며, 용인문화원장이던 박용익이 임경재의 후손과 풍천임씨 문중의 후원을 받아 1993년 6월 18일에 건립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농상공부 주사 풍천임공 휘 경재지단
서기 1979년 기미 3월 9일 근수
앞쪽 가족 계보도에 의하면 의병장의 둘째 아드님 내외분과,이분의 둘째 아드님 묘비이다.
풍천임공천순지묘
1905년 음 4월 16일 ~ 1988년 음 3월 12일
덕수이씨문영지묘
1909년 음 8월 21일 ~ 1989년 음 5월 2일
1905년 음 4월 16일 ~ 1988년 음 3월 12일
덕수이씨문영지묘
1909년 음 8월 21일 ~ 1989년 음 5월 2일
풍천임공성빈지묘
1941년 음 3월 8일생, 2011년 음 7월2일졸
1941년 음 3월 8일생, 2011년 음 7월2일졸
경기 용인시 양지면 평창리 313 임옥여 의병장 동상을 찾았다.
의병장 옥여 임경재상
의병장 김경재(1872~1907)는 본관은 풍천, 호는 옥여로 1872년 4월 29일 양지군 주동면 평촌리(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장리)에서 선락장군 임낙호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요한데 이어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자, 당시 재직하고 있던 농상공부 주사직을 미련없이 버리고 1907년 8월 이천에서 의병단을 만들어 일본
기병대를 급습하고 이천읍 우편취금소와 순사분파소를 습격하였다. 또한 광주 실촌면에서 원주의병대와 합류해 일본근을 격퇴하였으며 광주 상림과 백암장터에서 일진회원을 총살하는 등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이밖에도 용인 굴암산 주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는 한편 이천,여주,안성,양근(양평) 등지에서 일본군을 습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7년 11월 10일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수원수비대로 압송되었다. 그 후 모진 고문과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함은 나의 길'이라 외차묘 일본인과 매국노들을 꾸짖다 끝내 수원수비대장에게 총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8월 15일 의병장 임경재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추모비는 1993년 6월 건립되었다.
의병장 김경재(1872~1907)는 본관은 풍천, 호는 옥여로 1872년 4월 29일 양지군 주동면 평촌리(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장리)에서 선락장군 임낙호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요한데 이어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자, 당시 재직하고 있던 농상공부 주사직을 미련없이 버리고 1907년 8월 이천에서 의병단을 만들어 일본
기병대를 급습하고 이천읍 우편취금소와 순사분파소를 습격하였다. 또한 광주 실촌면에서 원주의병대와 합류해 일본근을 격퇴하였으며 광주 상림과 백암장터에서 일진회원을 총살하는 등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이밖에도 용인 굴암산 주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는 한편 이천,여주,안성,양근(양평) 등지에서 일본군을 습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7년 11월 10일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수원수비대로 압송되었다. 그 후 모진 고문과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함은 나의 길'이라 외차묘 일본인과 매국노들을 꾸짖다 끝내 수원수비대장에게 총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8월 15일 의병장 임경재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추모비는 1993년 6월 건립되었다.
의병장 옥여 임경재상
의병장 옥여 풍천임공 경재 추모비
공의 휘는 경재이며 옥여는 그의 자이니 세간에는 옥녀로 더 많이 알려있다. 공은 임진왜란때 호성공신에 오른 명고공 전의 후손으로 풍천인이다. 공의 고조는 통덕랑 성직이요 증조는 통덕랑 태관이며 조부는 절충장군 원준이고 고는 선략군 낙호이고 비는 한양조씨이다. 공은 서양세력이 점차 동양으로 몰려 옴에 동양평화에 먹구름이 감돌던때인 1872년 임신 4월 29일 경기도 양지군 주동면 평촌리에서 3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담대하며 언행이 신중하고 인품이 출중하였으며 효제충진의 자품이 남달랐으니 조국의 장래를 위해 하늘이 내려준 분이 분명하다. 때는 바야흐로 일본제국주의자의 침략으로 국망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일제는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한토에서 청을 구축하였고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함은 물론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마져 축출한후로는 이른바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상상의 비준없이 외교권을 박탈하였으며 이의 불법성을 해야특사로 하여금 만국공론에 호소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국군마저 해산하는등 천인이 공노할 미증유의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에 배달민족의 분노는 요원의 불길이 되어 을미년을 시발로 정미년에 이르도록 한토 곳곳에는 창의의 깃발이 하늘을 뒤덮고 저주의 함성이 산하를 진동했다. 이를 바라본 공은 풍전등화같은 조국을 구하고자 농공상부의 주사직을 미련없이 버리고 분연히 궐기하여 구국동지를 규합한후 을사5적의 죄상을 25개항목으로 지적하여 낱낱이 성토하니 때는 1907년 7월 20일이었다. 공은 그해 8월에 이근풍 전봉기 주하용 신규희 조상현등과 더불어 이천에서 창의하여 스스로 좌익장을 맡은다음 이천에 주둔한 일본기병도를 급습하여 크게 타격을 가하고 이천우편취급소 순사분파소를 파괴하니 공의 혁혁한 항일의전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송은 광주군 귀촌면에서 원주의병대와 합류하여 일본군과 접전한후 포군 70며을 모집하여 용인 굴암산에서 일군불파토벌대와 유격전으로 맞서니 공의 전법은 신출귀몰하였다. 광주와 양근에서 적을 연파한후 다시 이천읍에서 일군중촌소대와 격전을 벌였고 9월에 접어들어 공의 의병부대는 더욱 증강되어 사기충천이었으니 포군 1천8백명으로 안성의 일군을 습격하고 다시 포군 30명으로 양근일대에서 수일간 전투를 벌인후에 죽산군으로 이동하여 문촌리 학일리 고초골등지의 일군 중원소대및 순사대와 교전하고 일암장터에서 일경 주본용사랑들과 교전하였다. 이어 10월에는 광주군 쌍림에서 일진회원 한명을 총살하고 백암장터에서 일진회원 한명 순사 한명 순검 한명을 총살하고 죽산군내에서 순검 한명을 생매장하였다. 공은 의병들간의 연대도 도모하여 정주원부대와는 양지 죽산 음죽과
공의 휘는 경재이며 옥여는 그의 자이니 세간에는 옥녀로 더 많이 알려있다. 공은 임진왜란때 호성공신에 오른 명고공 전의 후손으로 풍천인이다. 공의 고조는 통덕랑 성직이요 증조는 통덕랑 태관이며 조부는 절충장군 원준이고 고는 선략군 낙호이고 비는 한양조씨이다. 공은 서양세력이 점차 동양으로 몰려 옴에 동양평화에 먹구름이 감돌던때인 1872년 임신 4월 29일 경기도 양지군 주동면 평촌리에서 3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담대하며 언행이 신중하고 인품이 출중하였으며 효제충진의 자품이 남달랐으니 조국의 장래를 위해 하늘이 내려준 분이 분명하다. 때는 바야흐로 일본제국주의자의 침략으로 국망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일제는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한토에서 청을 구축하였고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함은 물론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마져 축출한후로는 이른바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상상의 비준없이 외교권을 박탈하였으며 이의 불법성을 해야특사로 하여금 만국공론에 호소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국군마저 해산하는등 천인이 공노할 미증유의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에 배달민족의 분노는 요원의 불길이 되어 을미년을 시발로 정미년에 이르도록 한토 곳곳에는 창의의 깃발이 하늘을 뒤덮고 저주의 함성이 산하를 진동했다. 이를 바라본 공은 풍전등화같은 조국을 구하고자 농공상부의 주사직을 미련없이 버리고 분연히 궐기하여 구국동지를 규합한후 을사5적의 죄상을 25개항목으로 지적하여 낱낱이 성토하니 때는 1907년 7월 20일이었다. 공은 그해 8월에 이근풍 전봉기 주하용 신규희 조상현등과 더불어 이천에서 창의하여 스스로 좌익장을 맡은다음 이천에 주둔한 일본기병도를 급습하여 크게 타격을 가하고 이천우편취급소 순사분파소를 파괴하니 공의 혁혁한 항일의전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송은 광주군 귀촌면에서 원주의병대와 합류하여 일본군과 접전한후 포군 70며을 모집하여 용인 굴암산에서 일군불파토벌대와 유격전으로 맞서니 공의 전법은 신출귀몰하였다. 광주와 양근에서 적을 연파한후 다시 이천읍에서 일군중촌소대와 격전을 벌였고 9월에 접어들어 공의 의병부대는 더욱 증강되어 사기충천이었으니 포군 1천8백명으로 안성의 일군을 습격하고 다시 포군 30명으로 양근일대에서 수일간 전투를 벌인후에 죽산군으로 이동하여 문촌리 학일리 고초골등지의 일군 중원소대및 순사대와 교전하고 일암장터에서 일경 주본용사랑들과 교전하였다. 이어 10월에는 광주군 쌍림에서 일진회원 한명을 총살하고 백암장터에서 일진회원 한명 순사 한명 순검 한명을 총살하고 죽산군내에서 순검 한명을 생매장하였다. 공은 의병들간의 연대도 도모하여 정주원부대와는 양지 죽산 음죽과
용인등지에서 전봉기부대와는 광주 이천 여천등지에서 협동작전을 전개했다. 단기단에 이토록 혁혁한 전과로 일군을 괴롭히던중 그해 11월 10일 일진회원이 추계리의 매국노 송병준 집에 주둔한 일군에게 공을 밀고함으로써 용인 주둔헌병대에 체포되어 수원수비대로 압송되었다. 공은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함은 나의 길' 이라고 외치며 일본인과 그 앞잡이인 친일매국노의 만행을 힐책하니 공은 수원수비대장에게 총살당하였다. 향년 36세로 한많은 생을 마감했으니 동료인 신주사 김주사등과 함께 총살되었다고 전해질뿐 그 순국한 정확한 날짜를 알수가 없고 공의 시신마저 거두지 못하였다. 이렇듯 숭고한 공의 의거가 역사에 매몰된채 빛을 보지못하다가 80여 성상만에 용인 향토문화연구회의 노력으로 세상에 공개되어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제현들의 뜻을 모아 공을 추모하는 비를 세움에 명하노니
아! 슬프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창의했건만 웅지를 펴지 못한채 한창 기개가 넘칠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니 배달민족의 비탄만 구천에 사무칠뿐 광복을 보지못한 당신의 고혼을 달랠길 없구나. 당신께서 뿌리신 숭고한 피로 광복이 왔고 되찾은 금수강산은 지금 번영을 구가하나니 명부의 당신이여 기뻐하소서 조국을 위해 의분에 울고 민족을 위해 형극을 격던 당신의 위대한 삶을 영원토록 추모하고자 이 비에 새기노라
아! 슬프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창의했건만 웅지를 펴지 못한채 한창 기개가 넘칠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니 배달민족의 비탄만 구천에 사무칠뿐 광복을 보지못한 당신의 고혼을 달랠길 없구나. 당신께서 뿌리신 숭고한 피로 광복이 왔고 되찾은 금수강산은 지금 번영을 구가하나니 명부의 당신이여 기뻐하소서 조국을 위해 의분에 울고 민족을 위해 형극을 격던 당신의 위대한 삶을 영원토록 추모하고자 이 비에 새기노라
용인등지에서 전봉기부대와는 광주 이천 여천등지에서 협동작전을 전개했다. 단기단에 이토록 혁혁한 전과로 일군을 괴롭히던중 그해 11월 10일 일진회원이 추계리의 매국노 송병준 집에 주둔한 일군에게 공을 밀고함으로써 용인 주둔헌병대에 체포되어 수원수비대로 압송되었다. 공은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함은 나의 길' 이라고 외치며 일본인과 그 앞잡이인 친일매국노의 만행을 힐책하니 공은 수원수비대장에게 총살당하였다. 향년 36세로 한많은 생을 마감했으니 동료인 신주사 김주사등과 함께 총살되었다고 전해질뿐 그 순국한 정확한 날짜를 알수가 없고 공의 시신마저 거두지 못하였다. 이렇듯 숭고한 공의 의거가 역사에 매몰된채 빛을 보지못하다가 80여 성상만에 용인 향토문화연구회의 노력으로 세상에 공개되어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제현들의 뜻을 모아 공을 추모하는 비를 세움에 명하노니
아! 슬프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창의했건만 웅지를 펴지 못한채 한창 기개가 넘칠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니 배달민족의 비탄만 구천에 사무칠뿐 광복을 보지못한 당신의 고혼을 달랠길 없구나. 당신께서 뿌리신 숭고한 피로 광복이 왔고 되찾은 금수강산은 지금 번영을 구가하나니 명부의 당신이여 기뻐하소서 조국을 위해 의분에 울고 민족을 위해 형극을 격던 당신의 위대한 삶을 영원토록 추모하고자 이 비에 새기노라
아! 슬프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창의했건만 웅지를 펴지 못한채 한창 기개가 넘칠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니 배달민족의 비탄만 구천에 사무칠뿐 광복을 보지못한 당신의 고혼을 달랠길 없구나. 당신께서 뿌리신 숭고한 피로 광복이 왔고 되찾은 금수강산은 지금 번영을 구가하나니 명부의 당신이여 기뻐하소서 조국을 위해 의분에 울고 민족을 위해 형극을 격던 당신의 위대한 삶을 영원토록 추모하고자 이 비에 새기노라
매국노 오적성토문
一. 을사의 오조약으로 우리 오천만 동포를 노예의 비경으로 몰려들어 가게하였으니 그 큰 죄 하나이다.
二. 지금 7조약으로 일본을 위해서 충성스러이 하니 그 큰 죄 둘이오.
三. 황상을 위협하여 강제적으로 선의케하니 그 큰 죄 셋이오.
四. 해가 넘지 못하여 개원하고 폐립하니 그 큰 죄 넷이오.
五. ···
六. 일체의 권리를 원수의 나라에 양도치 않음이 없으니 그 큰 죄 여섯이오.
七. ···
八. 국무가 이렇게 될줄모르고 오직 통감부만찬회와 일본과의 교섭으로만 능사를 삼으니 그 큰 죄 여덟이오.
九. 일반시민을 선동해 모아서 명칭을 일진회라 하며 일본에게 의뢰하고 동족을 잔해하니 그 큰 죄 아홉이오.
十. 붕우친적 중에 노안비슬자 등을 조정에 포만케하니 그 큰죄 열이오.
十一. 통감만 알고 군부를 모르는 체하여 일본만 아는 체하고 자기 나라를 모르니 그 큰 죄 열하나이오.
十二. ···
十三. ···
十四. ···
十五. ···
十六. ···
十七. ···
十八. 노전아가 강하면 노서아에 아부하고 일본이 강하면 일본에게 아부하고 조국의 이해를 뭇지 않고 다만 자기일신의 부귀만 도모하니 그 큰 죄 열여덟이오.
十九. 일본의 일빈일소로 동포의 근심과 기쁨을 좌우하고 생사화복을 모른 척 넘겨버리니 그 큰 죄 열아홉이오.
二十. ···
二十一. ···
二十二. ···
二十三. ···
二十四. ···
二十五. ···
(25개항 중 밝혀진 내용)
一. 을사의 오조약으로 우리 오천만 동포를 노예의 비경으로 몰려들어 가게하였으니 그 큰 죄 하나이다.
二. 지금 7조약으로 일본을 위해서 충성스러이 하니 그 큰 죄 둘이오.
三. 황상을 위협하여 강제적으로 선의케하니 그 큰 죄 셋이오.
四. 해가 넘지 못하여 개원하고 폐립하니 그 큰 죄 넷이오.
五. ···
六. 일체의 권리를 원수의 나라에 양도치 않음이 없으니 그 큰 죄 여섯이오.
七. ···
八. 국무가 이렇게 될줄모르고 오직 통감부만찬회와 일본과의 교섭으로만 능사를 삼으니 그 큰 죄 여덟이오.
九. 일반시민을 선동해 모아서 명칭을 일진회라 하며 일본에게 의뢰하고 동족을 잔해하니 그 큰 죄 아홉이오.
十. 붕우친적 중에 노안비슬자 등을 조정에 포만케하니 그 큰죄 열이오.
十一. 통감만 알고 군부를 모르는 체하여 일본만 아는 체하고 자기 나라를 모르니 그 큰 죄 열하나이오.
十二. ···
十三. ···
十四. ···
十五. ···
十六. ···
十七. ···
十八. 노전아가 강하면 노서아에 아부하고 일본이 강하면 일본에게 아부하고 조국의 이해를 뭇지 않고 다만 자기일신의 부귀만 도모하니 그 큰 죄 열여덟이오.
十九. 일본의 일빈일소로 동포의 근심과 기쁨을 좌우하고 생사화복을 모른 척 넘겨버리니 그 큰 죄 열아홉이오.
二十. ···
二十一. ···
二十二. ···
二十三. ···
二十四. ···
二十五. ···
(25개항 중 밝혀진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