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 52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과 같이 피첩 투옥되여 8년 옥고 후 재망명 천진에서 8.15 해방을 맞자 동포 귀국에 극력노력 주선하시며 각종 고난을 당하시고 귀국하셨으나 당시 혼란정국과 빈한 등으로 극도의 인내생활을 하셨다. 염원하던 조국광복은 미비나마 이루워졌다 하나 반평생 이상의 투쟁에 비하여 기 노후 여생은 미흡함이 많았다. 연이 나이는 아마도 공 평생의 소원이였으라. 서기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받으셨고 1967년 1월 29일 서울 이도동 295번지 만거에서 한많고 파란 많은 생애를 종결지으셨다. 광복회장으로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34호에 안장되셨으니 기 묘비 이기에는 「의열단원으로 일기관 고관 암살 파괴 자금모집 활동 일제 피첩 옥고」라는 기록이 있다.
배 해주오씨 순복, 남 천희 건희 성희 대희, 부 팔원, 제 정진 정칠 정목
서기 1990년 5월 일 삼종제 정렬 근표서
용인군향토사학회 협찬
서기 1990년 5월 일 삼종제 정렬 근표서
용인군향토사학회 협찬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 523 남정각지사 유허비에 안내판이 건립되었다고 해서 찾았다.
용인 독립운동 유적
남정각 지사 유허비
남정각 지사 유허비
[용인 독립운동 유적] 남정각 지사 유허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갈담리 523 파담마을
이곳은 독립운동가 오산 남정각(南廷珏, 1897~1967) 지사의 생가 터이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 등지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장춘·텐진 등지를 순력하였다. 장춘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난 뒤 1922년 6월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에서는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요인을 암살하고자, 서울에 있던 김한과 김원봉 사이를 오가면서 폭탄의 수입준비를 진행하던 중 김한이 검거되어 폭탄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해 텐진으로 가 독립운동비용을 보충하기 위해서 동지 권정필·유시대·유병하와 협의한 뒤 권총을 휴대 서울 이인희 집에 찾아갔다가 잠복한 경찰에 붙잡혔다. 출감 후 다시 텐진으로 망명하여 텐진교민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생가 터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울 종로라는 설이 있었지만, 지사의 종형제 고 남정렬 씨와 동생 남정휴 씨의 증언으로 이곳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갈담리 523 파담마을
이곳은 독립운동가 오산 남정각(南廷珏, 1897~1967) 지사의 생가 터이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 등지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장춘·텐진 등지를 순력하였다. 장춘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난 뒤 1922년 6월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에서는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요인을 암살하고자, 서울에 있던 김한과 김원봉 사이를 오가면서 폭탄의 수입준비를 진행하던 중 김한이 검거되어 폭탄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해 텐진으로 가 독립운동비용을 보충하기 위해서 동지 권정필·유시대·유병하와 협의한 뒤 권총을 휴대 서울 이인희 집에 찾아갔다가 잠복한 경찰에 붙잡혔다. 출감 후 다시 텐진으로 망명하여 텐진교민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생가 터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울 종로라는 설이 있었지만, 지사의 종형제 고 남정렬 씨와 동생 남정휴 씨의 증언으로 이곳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이 지사의 생가 터라고 한다.
이는 경기도에서 건립한 갈담리 502-8의 집터 안내판과 서로 상반된 내용이다.
이는 경기도에서 건립한 갈담리 502-8의 집터 안내판과 서로 상반된 내용이다.
대한독립투사 의령남공 호 오산 휘 정각 유허비 아명 영득
대한독립투사 의령남공 호 오산 휘 정각 유허비 아명 영득
공의 자는 중옥(重玉) 서기 1897년 정유 12월 12일 파담 502번지 출생이시며 유시를 여기서 지내셨고 서울에서 성장 3.1운동에 수원, 용인, 안성 일원에서 활약 기 직후 사양의 국운과 가사를 등지고 중국 망명 후에 의열단원으로 활약하셨다. 군자금 모집차 암입국 하였다가 모반자 이인희의 밀고로 김시인 등
공의 자는 중옥(重玉) 서기 1897년 정유 12월 12일 파담 502번지 출생이시며 유시를 여기서 지내셨고 서울에서 성장 3.1운동에 수원, 용인, 안성 일원에서 활약 기 직후 사양의 국운과 가사를 등지고 중국 망명 후에 의열단원으로 활약하셨다. 군자금 모집차 암입국 하였다가 모반자 이인희의 밀고로 김시인 등
과 같이 피첩 투옥되여 8년 옥고 후 재망명 천진에서 8.15 해방을 맞자 동포 귀국에 극력노력 주선하시며 각종 고난을 당하시고 귀국하셨으나 당시 혼란정국과 빈한 등으로 극도의 인내생활을 하셨다. 염원하던 조국광복은 미비나마 이루워졌다 하나 반평생 이상의 투쟁에 비하여 기 노후 여생은 미흡함이 많았다. 연이 나이는 아마도 공 평생의 소원이였으라. 서기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받으셨고 1967년 1월 29일 서울 이도동 295번지 만거에서 한많고 파란 많은 생애를 종결지으셨다. 광복회장으로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34호에 안장되셨으니 기 묘비 이기에는 「의열단원으로 일기관 고관 암살 파괴 자금모집 활동 일제 피첩 옥고」라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