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산37-20
- 탐방로그
- 그의 추모비 전면에는 「대한제국주사 휘문의숙장 황성신문사장 독립지사 석농 유근 선생 추모비(大韓帝國主事 徽文義塾長 皇城新聞社長 獨立志士 石儂 柳瑾 先生 追慕碑)」라 음각되어 있으며, 전주류씨 계윤공파 종중에서 2012년 8월 15일 묘소 입구에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로부터 50m 떨어진 곳에 유근의 묘가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기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노고봉 현충탑 아래 순국선열 석농 유근의 묘를 찾아왔다.
석농 유근 선생의 묘는 현충탑의 오른쪽 아래에 있었다.
대한제국 주사 휘문의숙장 황성신문사장 독립지사 석농 유근선생 추모비
대한제국 주사 휘문의숙장 황성신문사장 독립지사 석농 유근선생 추모비
어진 선비의 호국정신이 영구히 국민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였으니 그 공헌은 천추만세에 해와 달같이 빛나고 명성은 북극성보다 더 높으리라. 선생의 본관은 전주 성은 유 휘는 근 자는 경집 호는 석농 석창이다. 시조는 .. 중략..
전략..
선생은 철종12(1861)년 9월 26일 용인시 마평동 신평마을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한후 상경하여 고종32(1895)년 김홍집내각의 도지부 주사를 하였다. 그후 고종35(1898)년 남궁억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주필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여고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된바 있으며 고종40(1903)년 다시 도지부 주사를 하였다. 고종42(1905)년 11월 황성신문에 게재된 을사조약을 폭로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장지연이 끝맺지 못하자 후반부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황성신문은 무기정간당하였다. 고종43(1906)년 신정동국역사를 공동저술하였다. 순종1(1907)년 황성신문사장을 하고 휘문의숙 숙장을 한후 이듬해에 대한협회발기에 참여하고 순종2(1908)년 초등본국역사 초등소학 수신서를 저술하였다. 순종3(1909)년 최남선과 조선광문회를 조직하여 고문서를 발간하였고 1910년 일제때는 신천초등역사를 저술하였다. 1915년 중앙학교 초대교장을 하였고 1919년 조선물산장려계운동을 지도하다가 발각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8년 대종교 정교가 되었고 1920년 동아일보 제호를 싯고 편집고문을 하였는데 1921년 5월 20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에 준하는 동아일보사장으로 영결식을 하고 용인의 선영에 안장하였으며 1962년 정부로 부터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은 전주인 이창모의 따님을 맞이하여 독자 년수를 두었는데 독립운동을 한 공적으로 2010년에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으며 광주인 안종화의 따님을 맞이하여 두아들을 낳
선생은 철종12(1861)년 9월 26일 용인시 마평동 신평마을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한후 상경하여 고종32(1895)년 김홍집내각의 도지부 주사를 하였다. 그후 고종35(1898)년 남궁억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주필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여고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된바 있으며 고종40(1903)년 다시 도지부 주사를 하였다. 고종42(1905)년 11월 황성신문에 게재된 을사조약을 폭로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장지연이 끝맺지 못하자 후반부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황성신문은 무기정간당하였다. 고종43(1906)년 신정동국역사를 공동저술하였다. 순종1(1907)년 황성신문사장을 하고 휘문의숙 숙장을 한후 이듬해에 대한협회발기에 참여하고 순종2(1908)년 초등본국역사 초등소학 수신서를 저술하였다. 순종3(1909)년 최남선과 조선광문회를 조직하여 고문서를 발간하였고 1910년 일제때는 신천초등역사를 저술하였다. 1915년 중앙학교 초대교장을 하였고 1919년 조선물산장려계운동을 지도하다가 발각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8년 대종교 정교가 되었고 1920년 동아일보 제호를 싯고 편집고문을 하였는데 1921년 5월 20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에 준하는 동아일보사장으로 영결식을 하고 용인의 선영에 안장하였으며 1962년 정부로 부터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은 전주인 이창모의 따님을 맞이하여 독자 년수를 두었는데 독립운동을 한 공적으로 2010년에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으며 광주인 안종화의 따님을 맞이하여 두아들을 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