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산37-2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용인독립운동유적 - 순국선열 석농 유근의 묘
이곳은 독립운동가 석농 유근 선생이 안장된 묘역이다. 그는 남궁억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때는 간부로 활동했다.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 관료들을 지면을 통해 비탄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장지연이 체포되자 그의 뒤를 이어 황성신문의 사장으로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대한자강회 활동을 하는 한편, 신민회에서 역시 활동했다. 종교계에 있어서도 민족 종교 대종교가 창건되자 이에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 강제합병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3.1운동 이후 한성정부라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동아일보가 창간될 떄에는 언론계 원로로서 고문으로 추대되는 등 언론활동을 지속하다가 1921년 서거하였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그의 추도식을 거행했으며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이곳은 독립운동가 석농 유근 선생이 안장된 묘역이다. 그는 남궁억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때는 간부로 활동했다.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 관료들을 지면을 통해 비탄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장지연이 체포되자 그의 뒤를 이어 황성신문의 사장으로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대한자강회 활동을 하는 한편, 신민회에서 역시 활동했다. 종교계에 있어서도 민족 종교 대종교가 창건되자 이에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 강제합병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3.1운동 이후 한성정부라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동아일보가 창간될 떄에는 언론계 원로로서 고문으로 추대되는 등 언론활동을 지속하다가 1921년 서거하였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그의 추도식을 거행했으며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순국선열 석농 유근의 묘
선생은 용인인으로 황성신문사에 장지연과 함께 일하면서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을사의약에 서명한 매국 각료를 맹렬히 공격 비난하고 일제의 원흉 이등박문이 황제와 각부 대신을 핍박한 이면의 사실을 폭로하여 필주를 가하였고 장지연이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사의 시일야방성대곡의 대 논설을 쓸때도 도왔으며 1907년 황성신문이 속간되자 사장에 추임하여 언론투쟁을 계속하는 한편 육영사업에 진력하였으며 3.1운동에도 참가 하였고 1920년 동아일도가 창간됨에 따라 편집 감독을 맡아 일생을 언론창달에 이바지안바 크며 1921년 5월 20일 영면하시다.
선생은 용인인으로 황성신문사에 장지연과 함께 일하면서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을사의약에 서명한 매국 각료를 맹렬히 공격 비난하고 일제의 원흉 이등박문이 황제와 각부 대신을 핍박한 이면의 사실을 폭로하여 필주를 가하였고 장지연이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사의 시일야방성대곡의 대 논설을 쓸때도 도왔으며 1907년 황성신문이 속간되자 사장에 추임하여 언론투쟁을 계속하는 한편 육영사업에 진력하였으며 3.1운동에도 참가 하였고 1920년 동아일도가 창간됨에 따라 편집 감독을 맡아 일생을 언론창달에 이바지안바 크며 1921년 5월 20일 영면하시다.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산 37-20 묘소 입구에 애국지사 석농 유근(柳瑾) 묘소 용인독립운동유적안내판이 건립되어서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