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찬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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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학성동 327-1
탐방로그
강원 원주시 학성동 327-1 의병장 이은찬 공 추모비를 찾았다. 1907년 원주에서 의병 봉기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산화한, 이은찬 의병장의 넋을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원주문화원에서 1968년 10월 26일 추모비를 세운 것이라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一枝李樹作爲船(일지이수작위선) 오얏나무 한 가지로 배를 만들어
慾濟蒼生泊海邊(욕제창생박해변) 만백성 건지고자 바다에 배 띄었다가
守功未就身先溺(수공미취신선닉) 품은 뜻 못 이루고 내 몸 먼저 빠지니
誰算東洋樂萬年(수산동양낙만년) 뉘라서 동양의 평화를 기약한단 말인가

의병장 이은찬 공의 약력
공은 한말 의병운동에 앞장 서 그 핵심을 이룬 이 고장의 애국선렬이시다. 1877년 9월 21일에 탄생하여 1909년 5월 10일에 순국하시며 마지막 남기신 시 한수는 나라사랑의 큰 뜻을 우리 가슴에 일깨워 알려주시는 듯 하다.
1968년 10월 26일 원주문화원
1907년 원주에서 의병봉기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1909년 5월 10일 산화한 의병장 이은찬공의 넋을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원주문화원장 황주익씨의 주선으로 1968년 10월 26일 세운것이다. 비문은 장일수씨가 쓰고 송철현씨가 색였다.
전면의 사실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문화원 연지회원 일동이 자그마한 표로 이 비석에 남긴다.
1975년 5월 1일
강원 원주시 학성동 327-1 의병장 이은찬공추모비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13도 의병연합부대에서 활동하다 순국한 이은찬(1878∼1909)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의병연합부대의 중군장이 되어 서울로 진격하던 중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군의 습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경기도의 양주,포천등지에서 일군을 격파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며, 은밀히 상경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려 하다가 용산역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정에서 조금도 굽힘이 없이 "내가 너희와 싸우기 40여회에 너희 병정 470여명을 참살하였으니, 빨리 나를 죽여라." 고 하였으며, 또 "나의 의거는 홀로 한국만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함이니 오늘에 이르러 어찌 자신의 영욕을 생각하랴." 하고 시를 읊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선생은 1909년 6월 27일 사형 순국하였다.
이은찬 의병장 추모비
관리번호: 16-1-3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물
소재지: 원주시 학성동
관리기관: 원주문화원
이은찬(李殷瓚, 1878~1909)은 한말 의병장으로, 원주 부흥사면(현, 판부면) 출신이다.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9월 원주에서 해산군인 등 500명의 의병을 모은 뒤 경북 문경의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가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전국 각지의 의병 모집에 진력하여 경기도 양주로 집결한 의병들이 13도 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하고 서울 공략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같은 해 12월 소속부대원과 함께 임진강 유역에서 활약하던 허위(許蔿)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여 크게 위세를 떨쳤다. 1909년 3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교수형을 선고받고 6월 27일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있다.
義兵將 李殷瓚 公 追慕碑(의병장 이은찬 공 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