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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424-1
- 탐방로그
-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424-1 숭모재를 찾았다. 숭모재는 광주이씨 석탄공파 부위공 휘 덕린 선조의 재실로, 숭모재 입구에 애국지사 이덕균 공적비가 있다. 2019년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광주이씨 문중에서 2019년 3월 29일 세웠으며, 광주이씨 석탄공파 종중 재실 입구에 건립되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424-1 종중재실 애국지사 이덕균 공적비를 찾았다.
崇慕齋(숭모재)
안내문
이곳 숭모재는 광주이씨 석탄공파 부위공 휘 덕린 선조의 재실이다. 비조의 휘는 자성이시니 신라 내물왕조 내사령이요 칠원백에 봉해지신 분이다.
공의 6대조의 호는 석탄 휘는 양중으로 고려문과 형조참의로서 고려충신 두문동칠십이현이요 5대조는 휘 우생으로 조선초 사온주부며 고조의 휘 수철이니 평안도 병마절도부사에 봉 한원군하시다. 증조의 휘는 손인데 의정부좌찬성 봉 한산군이요 조의 휘는 순언이고 관지 파주목사이다. 고의 휘는 결이니 참봉이고 배위는 연안이씨에 생이남 하시니 장왈 덕린이요 충의위수의부위로 이분이 곧 공이시며 차왈 명린이니 동몽교관이다. 참봉공 휘 결께서 임진왜란 중에 노경에 출전하여 애석하게도 전사하시니 배위께서 애통호곡 하며 공의 시신을 수습코져 하시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득병 객향 하시니 이것이 우리 광이필동계가 이곳 고기리에 입향세거하게된 동기가 됨이라.!
부위공의 자 휘숙은 토산현감이고 손의 휘는 홍주니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하시다.
증손 육남을 두시니 이분들이 오늘날 우리 필동계의 조종이 되신다. 장왈 진무(종사랑) 차왈 진화(종사랑) 차왈 진발(무과사과) 차왈 진영(무과, 하동, 낙안군수) 차왈 진만(종사랑) 차왈 화(통덕랑)이시다.
이곳 향리에 부위공께서 입향하신지 우금 400여년에 자손이 약 400호가 이어 오는데, 일대 명산인 광교산이 병풍 같고 선영좌우가 수려하니 우리 자손들이 영구히 지켜갈 곳이다.
서기 1995년에 참봉공 휘 결 선조와 배위 연안이씨의 지단을 부위공 묘소 위 곤좌간향에 모시었으며 이 숭모재는 2년 여의 공기를 거쳐 서기 2000년 6월 6일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곳 숭모재를 찾는 자손들이여...! 빛나는 선조님들의 업적과 충효사상에 바탕을 둔 애국애민하는 충신의 후예요 절개있는 선비의 자손임을 자궁하라! 온갖 수난을 극복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부위공의 음덕에 경배하고 숭조돈종의 정신을 함양하는 자손 훈육에 정진하라!
서기 2001년 11월 18일 광주이씨 석탄공파 부위공 종회
이곳 숭모재는 광주이씨 석탄공파 부위공 휘 덕린 선조의 재실이다. 비조의 휘는 자성이시니 신라 내물왕조 내사령이요 칠원백에 봉해지신 분이다.
공의 6대조의 호는 석탄 휘는 양중으로 고려문과 형조참의로서 고려충신 두문동칠십이현이요 5대조는 휘 우생으로 조선초 사온주부며 고조의 휘 수철이니 평안도 병마절도부사에 봉 한원군하시다. 증조의 휘는 손인데 의정부좌찬성 봉 한산군이요 조의 휘는 순언이고 관지 파주목사이다. 고의 휘는 결이니 참봉이고 배위는 연안이씨에 생이남 하시니 장왈 덕린이요 충의위수의부위로 이분이 곧 공이시며 차왈 명린이니 동몽교관이다. 참봉공 휘 결께서 임진왜란 중에 노경에 출전하여 애석하게도 전사하시니 배위께서 애통호곡 하며 공의 시신을 수습코져 하시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득병 객향 하시니 이것이 우리 광이필동계가 이곳 고기리에 입향세거하게된 동기가 됨이라.!
부위공의 자 휘숙은 토산현감이고 손의 휘는 홍주니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하시다.
증손 육남을 두시니 이분들이 오늘날 우리 필동계의 조종이 되신다. 장왈 진무(종사랑) 차왈 진화(종사랑) 차왈 진발(무과사과) 차왈 진영(무과, 하동, 낙안군수) 차왈 진만(종사랑) 차왈 화(통덕랑)이시다.
이곳 향리에 부위공께서 입향하신지 우금 400여년에 자손이 약 400호가 이어 오는데, 일대 명산인 광교산이 병풍 같고 선영좌우가 수려하니 우리 자손들이 영구히 지켜갈 곳이다.
서기 1995년에 참봉공 휘 결 선조와 배위 연안이씨의 지단을 부위공 묘소 위 곤좌간향에 모시었으며 이 숭모재는 2년 여의 공기를 거쳐 서기 2000년 6월 6일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곳 숭모재를 찾는 자손들이여...! 빛나는 선조님들의 업적과 충효사상에 바탕을 둔 애국애민하는 충신의 후예요 절개있는 선비의 자손임을 자궁하라! 온갖 수난을 극복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부위공의 음덕에 경배하고 숭조돈종의 정신을 함양하는 자손 훈육에 정진하라!
서기 2001년 11월 18일 광주이씨 석탄공파 부위공 종회
聖國 李德均 志士 功績碑(성국 이덕균 지사 공적비)
聖國 李德均 志士 功績碑(성국 이덕균 지사 공적비)
단군성조께서 홍익인간의 이념으로나라를 건국하시니 그 유구한 역사가 반만년이다. 우리나라는 아름다운 땅 슬기로운 배달민족이지만 지정학적인 영향으로 수많은 외환에 시달렸다. 고려가 몽고의 침입을 받았는가하면 조선에 와서는 왜란과 호란의 병화로 국토를 유린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때마다 남녀노소가 힘을 한데 모아 외환을 극복 국권을 수호하고 국토를 지켜왔다. 경술국치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한껏 짓밟힌 역사였다. 집권자들의 무능과 몰지각한 매국노들의 술책으로 우리 대한의 이름은 일시에 지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최초로 외국에 국권을 빼앗긴 사건이었다. 그러나 민족 구성원의 가슴마다 빼앗긴 강토와 국권을 되찾고자 하는 민족자결의 민족혼이 잔불처럼 은연중에 타오르고 있었고 그것이 요원의 들불처럼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시에 터져 나온 독립만세 함성으로 번져나갔다. 1919년 3월 1일은 우
리 민족의 자긍심을 세계만방에 알린 날이었다. 일제에 수탈당하고 질시 받으며 지내온 민족의 정기를 새삼 되살린 역사적 봉기였다. 용인에서 가장 궁벽한 고장 수지 고기리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29일 이덕균 지사의 지도로 봉기한 만세운동의 행렬은 동천과 풍덕천을 지나면서 1500여 명으로 그 수가 불어나 구성과 기흥으로 진출하려 하였으나 보정에서 일본 헌병대의 저지를 받았다. 그러나 행렬이 전진을 계속하자 일본 헌병대는 무차별 사격을 가해 안종각 최우돌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이덕균 지사는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때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던 이도해 등 16명이 태장 90대를 맞고 훈방되었다. 이 지사가 투옥되던 때 장남은 나이 15세의 미성년이어서 농사가 힘들었지만 마을 주민들이 함께 울력하여 농사를 거들었으며 이 지사가 출옥하자 고기리 주민 모두가 추렴하여 이 지사의 자택 뒷동산에서 위로잔치를 벌였다. 이는 일제의 감시가 무서웠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사를 아끼는 주민들의 애국일념을 엿볼 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지사의 자는 성국(聖國)이요 본관은 광주이다. 1879년 10월 17일 고기리 370번지에서 이도석공과 무안 박 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조부 기달 공의 훈도를 받았다. 지사는 천품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과거를 준비하던 중 국권이 상실되자 중도에 그만두었다. 이지사는 기미년 당시 마을 구장으로 있었는데 만세운동으로 인해 체포되어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였다. 출옥 후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젊은이들을 위해 한학을 가르치는 훈장으로 진력하는 한편 인근 주민들에게 아름다운 우리 미풍양속을 전수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으 칭송과 더불어 환영을 받았다. 지사는 부인 남평 문 씨와 혼인 3남 1녀를 두었으며 손자녀는 15명이다. 198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받았다. 2019년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잊혀져 가던 3.1정신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광주이씨 문중에서 이덕균 이도해 지사의 의거를 크고 명예롭게 되새기는 한편 후대의 귀감으로 삼고자 종중의 이름으로 공적비를 세운다.
리 민족의 자긍심을 세계만방에 알린 날이었다. 일제에 수탈당하고 질시 받으며 지내온 민족의 정기를 새삼 되살린 역사적 봉기였다. 용인에서 가장 궁벽한 고장 수지 고기리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29일 이덕균 지사의 지도로 봉기한 만세운동의 행렬은 동천과 풍덕천을 지나면서 1500여 명으로 그 수가 불어나 구성과 기흥으로 진출하려 하였으나 보정에서 일본 헌병대의 저지를 받았다. 그러나 행렬이 전진을 계속하자 일본 헌병대는 무차별 사격을 가해 안종각 최우돌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이덕균 지사는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때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던 이도해 등 16명이 태장 90대를 맞고 훈방되었다. 이 지사가 투옥되던 때 장남은 나이 15세의 미성년이어서 농사가 힘들었지만 마을 주민들이 함께 울력하여 농사를 거들었으며 이 지사가 출옥하자 고기리 주민 모두가 추렴하여 이 지사의 자택 뒷동산에서 위로잔치를 벌였다. 이는 일제의 감시가 무서웠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사를 아끼는 주민들의 애국일념을 엿볼 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지사의 자는 성국(聖國)이요 본관은 광주이다. 1879년 10월 17일 고기리 370번지에서 이도석공과 무안 박 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조부 기달 공의 훈도를 받았다. 지사는 천품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과거를 준비하던 중 국권이 상실되자 중도에 그만두었다. 이지사는 기미년 당시 마을 구장으로 있었는데 만세운동으로 인해 체포되어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였다. 출옥 후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젊은이들을 위해 한학을 가르치는 훈장으로 진력하는 한편 인근 주민들에게 아름다운 우리 미풍양속을 전수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으 칭송과 더불어 환영을 받았다. 지사는 부인 남평 문 씨와 혼인 3남 1녀를 두었으며 손자녀는 15명이다. 198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받았다. 2019년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잊혀져 가던 3.1정신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광주이씨 문중에서 이덕균 이도해 지사의 의거를 크고 명예롭게 되새기는 한편 후대의 귀감으로 삼고자 종중의 이름으로 공적비를 세운다.
서기 2019년 3월 29일 근수
광주이씨 석탄공파종중 한산군 종회
광주이씨 석탄공파종중 부위공 종회
풍산류서애후인 문학박사 재엽 근찬
광주이씨 석탄공파종중 한산군 종회
광주이씨 석탄공파종중 부위공 종회
풍산류서애후인 문학박사 재엽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