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독립운동유적(민영환 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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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34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시에 45세를 일기로 견지동 그의 옛 겸종 이완식의 집에서 자결하였다. 공의 순사가 발표되자 온 겨레는 비분과 감격의 도가니속에 잠겼으며 고종께서도 크게 슲어하사 예장을 명하시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의정에 증직하고 시호를 충정이라 하였으며 외국공사도 정중한 조의를 표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다음해 공의 본저에는 순절할 때의 혈의를 봉안한 마루 틈에서 4경 45엽의 대나무가 솟아올라왔다. 당시 이것을 공의 충절의 화물이라 하여 혈죽이라하고 내와인사가 감탄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공은 처음에 정경부인 안동김씨와 결혼하고 뒤에 정경부인 밀양박씨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시었다. 공의 유택은 처음에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리에 정하였다가 뒤에 동군 구성면 마북리로 옮겨 두 부인과 합장하였다. 공의 충절은 일월과 같이 빛나는 것이나 일제 40년동안 암흑 속에 파묻혀있다가 해방 후 다시 광채를 나타내어 국민도의의 지표가 되었으며 민충정공 기념사업회가 조직되고 서울시비로 동상을 건립하고 국비로 유고를 발간하고 이제 또 경기도지사 최헌길씨의 발의로 도솔하 전 공무원으로부터 성금의 갹출하여 묘지를 묘지를 보수하고 신도비를 수립함에 이르렀으니 공의 충열은 우리 민족과 함꼐 길이 빛날진져
단기 4292년 기해 3월
유서
슬푸다 국치와 민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속에서 모다 멸당하게 되었다. 무릇 살고자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역하는 자는 반드시 생을 득하는 것을 제공은 어찌 양해하지 못하냐뇨 영완은 다만 일사를 결하므로써 우러러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동포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었다 하여도 죽은것이 아니라 제군을 구천지하에서 기필고 도울것이다. 부듸 우리 동포형제는 천만으로 분려를 배가하여 지기를 국게하고 학문을 힘쓰고 결심륙력하여 우리의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사자가 맛당히 명명 지중에서 희소할것이니 슬푸다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동포에게 결고하노라.
용인독립운동 유적 민영환 선생 묘
이곳은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이 안장된 묘역이다. 그는 당시 최고 세도가였던 여흥민씨 척족의 일원으로 1878년 문과에 급재한 후, 승진을 거듭해 도승지,형조판서,한성부윤 등 요직을 맡았다. 이후 1897년 특명전권공사로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당시 여러 열강을 방문해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된다. 이를 위해 독립협회를 후원하며 근대적 개혁을 시도했지만 친일세력에 의해 실패하고, 파직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대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일제에 의해 실패하고, 동포와 각국 공사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망국의 책임을 안고 자결한 충정공의 죽음에 고종부터 걸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애통했다고 전해진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묘소 우측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 친필로 쓰인 묘비가 있다.
계정 민충정공 영환지묘
계정 민영환 선생은 단기 4194년인 철종12년 8월 30일에 공경가의 후예로 서울 박동에서 탄생하였다가 보수 45세 되시든 을해 11월30일에 비장 그위없는 최후를 맞이신바 타고난 단아하신 풍모에 온후하신 자품과 출중하신 재질이묘 탁월하신 안식을 고루 겸하시어 17세 약관으로 문과급제하신 이래로 군부, 내부 학부, 탁지부, 외부 등 현관대작을 거의 빠트림없이 역임하신외에도 해외 특사까지 배명하시어 그를 계기함아 널리
구미 각국의 제도와 문물을 유루없이 시찰연구하시고 도라오신다음 그 원대하신 포부와 경륜을 뜻하신대로는 흡족히 펴지지 못하신채 당시 날로 글러가는 국운을 자주와 융흥으로 이끌려 발분망식하셨지만 슲으다 그 극악무도한 일제의 침략과 그에 부종하는 매국도배의 발호도량을 막거나 꺽을 길 없으며 대하장경 일목난지의 철천의 한을 품으시고 어버이보다 앞서가눈 불효를 지절러가시면서 홀로 외로히 그 장렬 비길데없는 자결로 일사보국의 숭고한 모범을 보이셨으니 산악같이 드높고 일월같이 광명한 선생의 그 충절은 자결하시든 바로 그 이듬해 혈의를 간직하였던 마루의 틈을 어기우고 네 가지 마흔다섯잎의 대나무가 그 빛갈 푸르게도 솟기어 오른 자연의 법측을 초절한 거룩하고도 신비스러운 그 현상이 이미 밝히였지만 이제와서는 선생의 숙원이시든 조국의 광복도 이루어진지라 비록 시기는 늦어졌다하더라도 잔학한 일제의 간섭을 피하여 기나긴 50여 성상을 지하에 묻어둔 빗돌을 발굴하여 다시금 갈고 광을 내인다음 비명은 우리 조국 광복의 성업을 이루우신 대통령 우남선생의 친필을 받드러 비면
에 심심 각자하여 이에 이비를 세우는 것이다.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347 애국지사 민영환 묘소 안내판이 건립되었다고 해서 찾았다.
계정 민충정공 묘소
민영환선생 묘
조선 말기의 충신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죽음으로 항거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운 민영환의 묘이다. 민영환은 여흥 민씨로 고종 15년(1878) 문과에 급제하여 고종 32년 미국공사로 임명되었고, 광무1년(1897) 군부대신으로 있으면서 영국,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을 방문하여 세계 여러 나라의 발전된 문물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다. 귀국 후에는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여 국가의 근대적 개혁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내정간섭에 항거하며 친일내각과 대립하여 낮은 직책인 시종무관으로 좌천당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것을 결심하고 국민과 각국 공사, 그리고 고종황제에게 고하는 세통의 유서를 남기고 집에서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동상은 와룡동 비원 앞에 있다. 그가 사용했던 유품과 유서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으며 묘소 우측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의 친필로 쓰여진 묘비가 있다.
大韓帝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議政功臣諡忠正公閔泳煥神道碑銘
대한제국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의정공신시충정공민영환신도비명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시 순절한 한말 최대의 충신이오 애국자이신 민충정공의 휘는 영환이오 자는 문약이오 호는 계정이라 한다. 본은 려흥이며 선혜당상 겸호의 장남으로 철종12년 7월 15일 서울 전동에서 탄생하여 백부 태호에게 입후하였다. 공은 흥선대원군의 처질로서 고종황제의 외종제에 해당하고 명성황후의 종질도 되니 실로 황실의 지친으로 혁혁한 가문에서 생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온순하고 효행이 지극하며 재질이 탁월하여 17세때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예문관 검열시강원설서 홍문관부제학 승정원 도승지 이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하고 건양원년에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로국황제 니코라이2세의 대관식에 참례하고 이듬해 영독로불이 제국의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구미 각국을 순방하고 겸하여 특명전권대사가 되어 영국 빅토리아여왕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례하고 돌아와 군부대신과 의정부 참정을 역임하였다. 그동안 국운이 불행하여 와세의 침략이 심하고 내정이 극도로 부패하여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큰 정변이 여러번 일어나고 임오군란에 생부의 참화를 당하고 을미사변에 명성황후의 참변을 보게 되어 공의 가정적 불행도 적지 아니하였다. 공은 기울어저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하여 여러번 눈물로써 고종의 실정을 속하고 구미제국을 친찰한 후 정치제도의 개혁을 건의하고 광무2년에 독립협회가 일어나 외세를 배척하고 자주독립과 민권확장을 주장할때 적극적으로 이를 원조하였으나 간신들의 방해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 후 다시 각부대신을 역임하고 로일전쟁때 배일태도를 취하여 시종무관장의 한직으로 전임하였다. 로일전쟁이 끝난 뒤 일제의 원흉 이등박문이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협박
하여 불법으로 보호조약을 체결하자 공은 비분을 참지 못하여 다량의 피를 토하고 원임의정 조병세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대한문 앞에 나아가 상소하여 오적의 처참과 조약의 폐기를 정청하였으나 일본 헌병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소수 조공이 구속되었다. 그후 공이 대로 소수가 되어 다시 백관을 거느리고 상소정청을 하였으나 오적이 이를 방해하고 공을 평리원에 가두었다가 석방하므로 공은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자결로써 국은에 보답하고 국민을 깨우쳐주기로 결심하고 이천만 동포에게 고하는 유서와 재경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남기고 광무9년 11월 30일 오전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