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초면 독립만세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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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소초면 평장리 789-1
탐방로그
강원 원주시 소초면 평장리 789-1 소초면사무소 내 소초면 독립만세 기념비를 찾아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강원 원주시 소초면 평장리 789-1 소초면사무소 내 소초면 독립만세 기념비를 찾아왔다.
소초면 독립만세기념비
소초면 독립만세기념비
소초면 독립만세운동의 배경

우리 원주는 역사와 전통의 숨결을 면면히 간직하고 있는 애국충절의 고장이다.
19세기 말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권이 위태로울 때 원주 안창에서는 1895년 을미년에 의병봉기가 일어나 전국적으로 반외세 항쟁을 촉발시켰으며 소초에서도 구룡사 승려 무총이 의승장으로 활약하였다. 둔둔리 강도영 의병장도 면민들을 이끌고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이렇게 의병투쟁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한 소초면민들은 장양리 섬배에 은거하며 활동하던 동학지도자 손병희 선생의 영향으로 민족자존의 자각을 한층 굳건히 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1907년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군대의 강제해산에 반대하여 원주 진위대가 전국 최초로 봉기하였을 때 김현국 의병장을 비롯한 다수의 소초면민들은 의병부대에 가담하거나 방한복을 은밀히 제작하여 공급하는 등 힘을 모았다.
이로써 의병들은 일본군과 여러 차례 대적하여 승리를 거두며 항일투쟁의 선봉으로 뛰어난 활약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대열에 다함께 참여해 온 소초면민의 자주 독립정신은 소초면 독립만세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소초면독립만세운동 약사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을 기점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우리 고장 소초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폭발하였다. 3월 20일경 천도교구장 최종하와 천도교인을 비롯한 지역면민들은 횡성과 소초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3월 27일 장꾼으로 가장하여 횡성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격렬한 시위행진을 주도하며 선봉에 섰던 강만형이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다시 4월 1일 만세시위를 강행하였을 때 강달회, 하영현이 일본군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의병으로 활동했던 마을 훈장 박영하, 심의성, 신현철 등을 주축으로 한 소초면민 약 400여명은 마침내 4월 5일 부채고개에 집결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소초면사무소를 향해 나아갔다. 시위대의 김동혁, 김춘배 김인배는 소초면장 남상철을 강제로 시위에 동참시키고 박영하의 선창으로 소초면민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자주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렸다. 체포된 강만형은 고문으로 옥사했고, 소초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은 대부분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으로 살점이 찢기거나 참혹한 태형과 징역형을 복역하는 등 형언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었다.
건립취지문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울 때 자신의 생명과 안위를 돌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서 자주 독립을 열망했던 이 고장 선열들의 뜨거운 피와 불굴의 항일투쟁 정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후대에 길이 알리고자 한다. 선열들의 성스러운 피와 땀이 배어있는 이 곳에 그 날의 뜨거운 함성과 염원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운다.
2006년 4월 5일
소초면 독립만세기념비 건립위원회

건립내역
주최: 소초면 독립만세기념비 건립위원회
후원: 원주시, 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소초면 독립만세운동유족회, 광복회, 국가보훈처
재원: 총: 35,700,000원, 시비: 25,000,000원, 유족회성금 : 10,700,000원

글: 윤명진 조각: 박광필
소초면 독립만세운동 유공자인명
강달회(姜達會) 강만형(姜萬馨)
김덕봉(金德逢) 김동선(金東先)
김동혁(金東赫) 김인배(金仁培)
김정환(金正煥) 김주해(金周海)
김춘배(金春培) 김홍렬(金興烈)
박영국(朴令國) 박영하(朴英夏)
신경묵(辛敬黙) 신종오(中鍾五)
신현성(申鉉成) 신현철(申鉉喆)
심능복(沈能復) 심능주(沈能周)
심능학(沈能學) 심의교(沈宜敎)
심의성(沈宜聖) 심의승(沈宜承)
이순이(李淳伊) 이용희(李容僖)
임윤집(林允執) 유재경(柳在景)
장세유(張世奎) 조흥수(趙興秀)
전병훈(全秉勳) 정기현(鄭基鉉)
최양옥(崔養玉) 추병륜(秋秉倫)
추병학(秋秉學) 하영현(河永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