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근원지 오산장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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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오산시 오산동 354-8
탐방로그
오산의 오매장터에는 오산 3.1운동과 관련한 여러 사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오산동 316-30 오산동 공영주차장 입구에는 오산3.1운동 발상지 안내판이 있고, 오산동 354-8에는 만세운동 안내 표지석과 주동자 8의사의 공적비가 건립되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놀랍게도 오산장터 소개 일반 표지석이 아닌 오산장터 만세운동 안내 표지석과 주동자 8의사의 공적비가 건립되어 있었다.
3.1만세운동의 근원지 오산장터
3.1만세운동의 근원지 오산장터
3.1만세운동의 근원지 오산장터
1919년 3월 1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민족대표 33명의 주도로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오산시에서도 독립 만세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오산 세교동 출신 유진홍은 1919년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여하고자 서울에 있던 중 3.1만세운동을 목격하고 오산에 내려와 공칠보, 이성구, 김경도, 이규선, 정규환, 김용준, 안낙순 등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를 준비한다.
드디어 1919년 3월 29일(음력 2월 28일) 오산 장날, 이곳 시장 장터에 모여 있던 300여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은 더욱 늘어 700~800여명이 면사무소와 오산역 등으로 이동하자 일본 경찰은 시위 군중을 향해 무도하게 발포하기에 이르렀고 선두에 섰던 공칠보 외 3명이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오산장터 3.1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된 공칠보 등 8명의 독립 운동가들은 대부분 농민이었으며 성호면(오산시)에 살던 주민이었다. 이들에 대해 일제는 징역 6월에서 1년 8월까지 형을 선고했다. 이 오산장터의 시위는 경기도 지역 전체로 만세운동을 전파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그 빛나는 뜻을 기리는 8개의 조형물을 이곳에 세우고자 한다.
□ 공칠보(1884~1939, 당시 36세, 성호면 궐리) - 1919년 징역 1년여개월, 태형 90대 - 1939년 순국 - 1995년 대통령 표창 추서
□ 이성구(당시 25세, 일형면 조원리) : 징역 1년 8월
□ 김경도(당시 34세, 성호면 오산리) : 징역 1년 6월
□ 이규선(당시 25세, 진위군 북면 봉남리) : 징역 1년 8월
□ 정규환(당시 25세, 성호면 오산리) : 징역 1년
□ 유진홍(당시 25세, 성호면 세교리) : 징역 6월
□ 안낙순(당시 25세, 성호면 세교리) : 궐석재판 징역 6월
□ 김용준(당시 28세, 성호면 금암리) : 궐석재판 징역 6월
공칠보
당시 36세 성호면 궐리 / 징역 1년여개월 태형 90대
1995년 대통령 표창 추서
이성구
당시 25세 일형면 조원리 / 징역 1년 8월
1990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김경도
당시 34세 성호면 오산리 / 징역 1년 6월
2013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이규선
당시 25세 진위군 북면 / 징역 1년 8월
2006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정규환
당시 25세 성호면 오산리 / 징역 1년
1993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유진홍
당시 34세 성호면 세교리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
안낙순
당시 44세 성호면 세교리 / 징역 6월
서훈이 되지 않고 있다.
김용준
당시 38세 성호면 금암리 / 징역 6월
서훈이 되지 않고 있다.
오산장터 이야기
오산시에 자리한 오랜 전통의 '오산장터'(구 오산장)는 18세기에 만들어져서 흥망성쇠의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51년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저술한 지리서 『택리지』에 '오산장'은 3,8일에 열린다고 표기되어져 있는데 이것이 역사기록의 시원으로 보는 것이 보편화된 이야기다. 또한 『수원부읍지/1899년』에 보면 '오산장'이 3일과 8일에 열리는 것으로 기록되어져있고, 20세기 초 제작된 『한국수산지/1911년』에는 수원 인근의 5개 시장(수원성내장, 수원성외장, 오산장, 발안장, 안중장) 가운데 물자의 집산이 다대하고 시황이 번성하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가 생기는데 장터 번영의 최정점인 1940년대에서 1980년대 까지 이어진 근현대의 역사적 사료나 자료는 관과 민 어디에서도 그 근거를 찾아보기가 묘연하다. 이렇듯 오산장터는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도심 속 오일장으로서 근대시기에는 곡식과 가축의 거래가 활발하고 왕성하게 이루어졌으며, 일제 강점기인 1919년 3월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만세운동이 봉기했을 때 오산에서는 오산장터의 중심인 '싸전 터'(현 노인정을 중심으로 한 주변)에서 발화되어져 인근의 발안과 안중 등 경기서남부권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오산 최초의 신식 예식장과 극장이 들어섬으로써 명실 공히 오산의 문화중심이자 서민들의 삶의 교류의 장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시대 변화의 날선 바람은 이곳 또한 피해락 수 없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들면서 도시화의 여파로 대형마트의 입점과 주변 전통시장인 '오색시장'의 발 빠른 행보는 문전성시를 거듭하기에 이르고, 오산장터는 고객과 점포수가 현저히 줄어든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오색시장을 찾는 내방객을 위한 주차장화가 되어 지역의 슬럼화는 가속되기에 이른다.
순환의 여행 : 기억을 찾아 나서다 오매장터 이야기 中 발췌 및 인용
우리동네 마을 지도
오산시 오산동 316-30 오산동 공영주차장 입구 오매장터 오산3.1운동 발상지 안내판을 찾았다.
그래서 시장 다른 방향에 있는 오매장터 내 오산장터 표지석을 찾았다. 이곳은 오산동 354-8이다.
표지석 안내 마지막 줄에 오산장터 만세운동 관련 내용이 한 줄 있다.

오산장터란?
오산시에 자리한 오랜 전통의 오산장은 1753년 실학자 청담 이중환(1690~1756)이 저술한 지리지 '택리지'에 오산장은 3,8일에 열린다고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20세기 초 제작한 '한국수산지/1911년'에는 오산장은 수원 인근의 5개 시장(수원성내장, 수원성외장, 오산장, 발안장, 안중장) 가운데 물자의 집산이 다대하고 시장이 번성한다고 기록되어져 있으며, 1926년 기록을 보면 '오산장'은 '수원장' 다음으로 번성했고 단일품목으로 곡물류의 거래 규모가 가장 컸으며, 1934년 기록에 따르면 농산물 거래 규모가 '수원장'보다 월등히 컸으며 가축이 저래 물품의 60%이상을 처지해 가축시장이 여느 거래시장보다 번성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오산장터는 독립만세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