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돌베개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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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오산시 양산동 400
탐방로그
장준하 선생 서거 45주년과 한신대학교 개교 80주년을 맞아 한신대 졸업생이자 독립운동가인 장준하 선생을 기리기 위해 기존 60주년 기념관 건물을 ‘장준하 통일관’으로 명명하고 ‘돌베개 공원’을 개원했다. 장준하 통일관 1층 로비에는 장준하 기념홀과 장준하 기억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정원에는 돌베개공원을 조성하여 장준하의 항일수기 『돌베개』에 수록된 문구를 새긴 기념석을 세웠다. 또한, 또한 장준하 통일관 입구부터 99m 구간을 ‘장준하의 길’로 조성해 장준하 선생의 뜻을 되새기며 걸을 수 있도록 했으며, 장준하 통일관 입구에는 ‘장준하 통일종’ 조형물도 들어섰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함께 가야 멀리 간다.
제일 먼저 있었던 명언 안내판. 오늘을 살라 carpe diem.
오산시 양산동 400 한신대학교를 찾았다.
60주년기념관 1층을 '장준하통일관'으로 하고, 돌베개공원, 장준하길을 만들었다고 해서 찾은 것이다.
장준하 통일종
장준하통일관
장준하통일관
민족 민주 통일을 향한 장준하의 길
장준하선생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사진들이다.
장준하 선생의 배우자이신 김희숙여사, 장준하선생의 장모, 그리고 3남 2녀의 자녀들도 볼 수 있다.
한편 예비군 사진이나 등산사진들을 통해 개인으로서의 장준하선생 모습도 볼수있다.
장준하선생 약력
1918.08.27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장석인목사의 아들로 출생
1932.04. 평양숭실중학교 입학
1938.04 정주군 신안소학교 교사로 복무
1942.04 도쿄 일본신학교 입학
1944.01 김희숙여사와 결혼
1944.01 학도병으로 징집
1944.07~08. 일본군에서 탈출후 광복군으로 합류
1945.01 광복군 대위로 임명되어 미국의 OSS소속으로 활동
1945.11.23 임시정부요인 신분으로 광복후 귀국
1947.11. 김구선생의 비서로 활동
1949.02. 한신대학교(당시 조선신학교) 편입학
1949.06. 한신대학교(당시 조선신학교) 졸업
1953.04. 자유-민주-반독재 투쟁에 기여한 '사상계' 발행
1958.~1960. '사상계'를 통해 이승만정권의 독재비판
1960.04. '사상계'직원들과 4.19혁명 참여
1961.07. '사상계'를 통해 박정희정권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의 칼럼발표
1962.08. 막사이사이상 언론부문 수상
1963.~1965. 한일회담 반대 투쟁
1967.04 국가원수 모독죄로 1달간 옥고
1967.06 옥중출마로 국회의원에 당산, 이후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며 국회의원직 수행
1972.07. 7.4남북공동성명 이후 통일운동에 투신
1973.12. 긴급조치 제1호 위반 혐의로 구속
1974.12. 형집행정지로 석방
1975.08.07.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사 당함
1991.08.15.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93.04.15. 제1회 한신상 추서
1999.11.01. 문화훈장 금관장 추서
장준하 선생은 징집과 관련해서 '우리 집안의 불행은 내 한 몸으로 대신하고자 이른바 그 지원에 나를 맡겨 버렸다'라고 자서전에서 회고한다. 실제로 김희숙여사가 위안부로 끌려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 김희숙여사를 지키기 위해 결혼하였고, 다른 가족이 강제징집을 당하는 등의 탄압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징집을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징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에서 탈출해 중국대륙 2500km를 건너 한국광복군에 합류한다. 이후 군사교육을 받은 뒤 한국광복군에 대위로 임관하였고, 이어서 미국의 정보기관인 OSS로 파견되어 광복군의 작전에 참여한다.
60주년기념관 건물 가운데 있는 공간을 장준하 돌베개공원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무기를 가졌습니다.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물을
똑바로 겨냥한 젊음이란 이름의 무기입니다.
-장준하(돌베개) 중에서-
2020.11.17
'장준하 통일종'에서 '장준하길' 안내판이 있었다.
'장준하통일관 입구부터 99m의 길을 '장준하길'로 명명해 장준하 선생의 뜻을 되새기며 걸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역경을 넘어 별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