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 914
- 탐방로그
- 정주동산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 실향민 모임인 정주군민회에서 운영중인 공원묘역이다. 이곳에는 3·1 운동 민족대표인 이승훈, 이명룡, 김병조 선생의 추모비가 같이 서 있었다. 애국선열 춘헌 이명룡 선생 추모비는 평북 정주 출신 실향민 모임인 정주군민회에서 조성한 사설 공동묘지인 정주동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2013년 12월 25일 세워졌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건립취지문
정주는 전국에서 제일 많은 독립운동 선구자를 배출한 위국충절의 고장이다. 1911년 이른 바 105인 사건에 기소된 정주 출신 인사만도 이승훈, 이명룡 등 절반에 가까운 47명이고,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3인(이승훈, 이명룡, 김병조)이 정주분이시다. 또한 3.1운동의 모체가 된 민족대표 48인 가운데 여섯 분(위 3인 외 현상윤, 김도태, 김지환)도 정주출신이다. 이러한 충절향 정주의 애국정신을 널리 기리고자 정주군 민회, 정주장학회, 정주동산, 남강문화재단 등 4개 기관이 뜻을 모아 주관하고, 국가보훈처와 연천군의 지원으로 정주출신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인의 추모비를 이곳 정주동산에 세우게 되었다. 아울러 자발적으로 김병조 선생의 추모비를 세운 선생의 후손과 금번 이승훈, 이명룡 두 분의 추모비 건립에 협찬해 준 정주 출신 여러 인사들의 고마운 마음도 여기에 함께 기록해 두는 바이다.
2013년 12월 25일
추모비 건립 협찬인사: 조창석 김상연 김기현 임왕식 지정석 이희선 김우전 승병일 김기용 홍성오 김성순 손태일 한봉덕 노부근 김정헌 박원근 조용희 靑年會
정주는 전국에서 제일 많은 독립운동 선구자를 배출한 위국충절의 고장이다. 1911년 이른 바 105인 사건에 기소된 정주 출신 인사만도 이승훈, 이명룡 등 절반에 가까운 47명이고,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3인(이승훈, 이명룡, 김병조)이 정주분이시다. 또한 3.1운동의 모체가 된 민족대표 48인 가운데 여섯 분(위 3인 외 현상윤, 김도태, 김지환)도 정주출신이다. 이러한 충절향 정주의 애국정신을 널리 기리고자 정주군 민회, 정주장학회, 정주동산, 남강문화재단 등 4개 기관이 뜻을 모아 주관하고, 국가보훈처와 연천군의 지원으로 정주출신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인의 추모비를 이곳 정주동산에 세우게 되었다. 아울러 자발적으로 김병조 선생의 추모비를 세운 선생의 후손과 금번 이승훈, 이명룡 두 분의 추모비 건립에 협찬해 준 정주 출신 여러 인사들의 고마운 마음도 여기에 함께 기록해 두는 바이다.
2013년 12월 25일
추모비 건립 협찬인사: 조창석 김상연 김기현 임왕식 지정석 이희선 김우전 승병일 김기용 홍성오 김성순 손태일 한봉덕 노부근 김정헌 박원근 조용희 靑年會
순국선열 춘헌 이명룡선생 추모비.
세운날 : 2013년 12월 25일
세운날 : 2013년 12월 25일
춘헌 이명룡 선생 약력
1873년 8월 2일 이창업의 아들로 평북 철산군에서 태어났으나
1887년 정주군 덕언면 덕성동으로 이주했다.
7세부터 한학을 수확했으며 1892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에 정진하였다.
1902년 정주군 상업회의소 소장이 된 춘헌은 일제가 식민지배를 목적으로
설립한 동양척식회사의 토지매수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6년형을 받아 3년간 복역하였고
1919년 기미독립운동 때에도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서 손병희 등과 만세를 외치다
왜경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 조만식 등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조직,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사재를 모두 털어 평동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47년 4월 공산당의 탄압으로 월남한 후에는 반공연맹 이사,
이준열사 기념사업회,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3.1정신 선양회 등의 고문을 역임하였다.
평생을 성서와 농기구를 손에서 놓지 않고 독립운동과 겨레사랑에 헌신하신 선생은
1956년 11월 12일 서거하시어 사회장으로 모셨으며
정부에서도 고인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873년 8월 2일 이창업의 아들로 평북 철산군에서 태어났으나
1887년 정주군 덕언면 덕성동으로 이주했다.
7세부터 한학을 수확했으며 1892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에 정진하였다.
1902년 정주군 상업회의소 소장이 된 춘헌은 일제가 식민지배를 목적으로
설립한 동양척식회사의 토지매수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6년형을 받아 3년간 복역하였고
1919년 기미독립운동 때에도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서 손병희 등과 만세를 외치다
왜경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 조만식 등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조직,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사재를 모두 털어 평동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47년 4월 공산당의 탄압으로 월남한 후에는 반공연맹 이사,
이준열사 기념사업회,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3.1정신 선양회 등의 고문을 역임하였다.
평생을 성서와 농기구를 손에서 놓지 않고 독립운동과 겨레사랑에 헌신하신 선생은
1956년 11월 12일 서거하시어 사회장으로 모셨으며
정부에서도 고인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항일운동과 기독교 및 육영활동
1892년 기독교에 입교
1903년 정주 서면교회 집사로 시무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6년형을 받고 3년 간 복역
1913년 정주 덕흥교회 장로로 추대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
1920년 기미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 만세사건으로 왜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
1945년 광복 후 사재 전부를 털어 평동중학교를 설립
1956년 오산중학교 재건 발기인 회장
1892년 기독교에 입교
1903년 정주 서면교회 집사로 시무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6년형을 받고 3년 간 복역
1913년 정주 덕흥교회 장로로 추대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
1920년 기미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 만세사건으로 왜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
1945년 광복 후 사재 전부를 털어 평동중학교를 설립
1956년 오산중학교 재건 발기인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