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850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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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원주시를 찾았다. 강원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 있는 월봉 한기악 선생 사적비를 찾아왔다.
마을 앞 입구 길의 이름이 월봉길이다.
마을회관에서 물으니 저 은행나무 아래쪽이라고 알려주셨다. GPS상의 주소는 강원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850 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만청 3남과 만증 1녀를 둔 선생의 고절을 받들고 소지를 기리고자 1995년 봄 기념사업회의 발족을 보아 그로부터 월악 저작상을 해마다 시상하여 오고 있다. 유도회 원주지부는 월봉 선생의 석덕과 유지를 널리 현양하여 만대의 사표로 삼으려는 충정에서 각계의 거족적인 성원을 넘어 사십 주기를 기념하여 선생이 태어나 자란 유서깊은 이 자리에 사적비를 세운다.
글 일석 이희승 글씨 철농 이기우
글 일석 이희승 글씨 철농 이기우
1981년 6월 20일
월봉 한기악 선생 사적비 건립위원회 건
월봉 한기악 선생 사적비 건립위원회 건
협찬자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원주시를 찾았다.
강원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 있는 월봉 한기악 선생 사적비를 찾아왔다.
마을 앞 입구 길의 이름이 월봉길이다.
강원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 있는 월봉 한기악 선생 사적비를 찾아왔다.
마을 앞 입구 길의 이름이 월봉길이다.
月峰 先生 事蹟碑 入口(월봉 선생 사적비 입구)
마을회관에서 물으니 저 은행나무 아래쪽이라고 알려주셨다.
GPS 상의 주소는 강원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850이다.
원주 역사문화 순례길 월봉 한기악
한기악(1898~1941). 호는 월봉 1898년 원주 부론에서 태어나서 일본 유학생 시절이던 1919년, 도쿄에서 2.8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간 3.1독립만세운동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승복과 함께 중국 만주로 망명한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해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초대 의정원으로 활동하다 1920년대 초 귀국한 뒤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공제'를 발간하면서 한국청년의 진로등을 제시하였다. 1924년 7월 동아일보사의 청치부장과 편집국장직을 맡아 필봉으로 동을 격려, 고무해 일제의 탄압 일변도의 만행을 규탄, 성토하였다. 동시에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25년 '시대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이해에 월간 '개벽' 잡지가 항일민족기가로 인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처분을 당하였다. 언론 동지인 송진우, 민태원과 같이 사이토 총독을 찾아가 항변 해금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27년 2월 신채호 선생과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가,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부터 4년간 조선일보사의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필봉으로 민족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하였다. 1935년부터 중앙보통학교에서 일재 교육에 헌신하면서 이 학교의 감사로도 재직하였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추모비 홍호리 76번지)
한기악(1898~1941). 호는 월봉 1898년 원주 부론에서 태어나서 일본 유학생 시절이던 1919년, 도쿄에서 2.8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간 3.1독립만세운동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승복과 함께 중국 만주로 망명한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해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초대 의정원으로 활동하다 1920년대 초 귀국한 뒤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공제'를 발간하면서 한국청년의 진로등을 제시하였다. 1924년 7월 동아일보사의 청치부장과 편집국장직을 맡아 필봉으로 동을 격려, 고무해 일제의 탄압 일변도의 만행을 규탄, 성토하였다. 동시에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25년 '시대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이해에 월간 '개벽' 잡지가 항일민족기가로 인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처분을 당하였다. 언론 동지인 송진우, 민태원과 같이 사이토 총독을 찾아가 항변 해금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27년 2월 신채호 선생과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가,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부터 4년간 조선일보사의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필봉으로 민족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하였다. 1935년부터 중앙보통학교에서 일재 교육에 헌신하면서 이 학교의 감사로도 재직하였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추모비 홍호리 76번지)
月峰 韓基岳 先生 事蹟碑(월봉 한기악 선생 사적비)
月峰 韓基岳 先生 事蹟碑(월봉 한기악 선생 사적비)
이 고장이 낳은 선비로 의기를 떨친 월봉 한기악 선생은 언론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의 본보기였다 일생을 애국애족에 바친 선생은 1898년 1월 4일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흥호리 월봉 기슭에서 홍문관 교리 한정우 공의 유복자로 출생하였다. 명문 청주한씨의 후예로 효종때 우의정에 오른 흥일공의 12세손이며 예판 돈원공의 증손인 월봉 선생은 원주 칠봉 문암서원에 모셔진 선조때 거유 구암 한백겸 공의 후손이기도 하다. 재덕이 겸하여 탁월한 선생은 다함께 명현 정암 조광조 공의 혈손으로 일찌기 홀로되신 조모와 자친의 슬하에서 자라며 명가의 귀공자로 남다른 효성을 다하였다. 병오 정미년간 의병봉기 때 왜의 병화로 앞마을이 회신되자 조모는 고택을 헐어 주민들에게 내주는 결단을 내리면서 가족의 상경을 주선하였다. 선생은 중앙학교와 보성전문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망국한을 달래다 못해 중원을 비롯하여 만주 연해주 일대를 유랑하며 구국단심을 불태우고 3.1운동 때에는 동경에서 활약하다가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법무위원으로 국권회복에 앞장섰다 다시 귀국하여 동아일보 창간 동인으로 또 시대일보와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으로서 구국운동의 필봉을 종횡으로 휘두르며 한편 민족 합일전선인 신간회의 한 주역으로 민족해방과 사회평등의 구현에 분골쇄신하여왔다. 만년의 선생은 중앙학교에 돌아가 교육 대업에 봉직하던 중 1941년 6월 20일 불행이 향년 44세에 숙환으로 사세하니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풍현리에 안장하였다. 유인 의령남씨와의 슬하에 만춘 만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