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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285
- 탐방로그
-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285 갈림길 양평농장 방면에 있는 순국선열 왕회종의 집터 안내판을 찾아왔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라 찾기 어려울 것 같다. 도로변에 애국지사와 사적 위치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설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집은 멸실되고 터만 남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기도 항일독립운동 유적
왕회종 집터
왕회종 집터
경기도 항일독립운동 유적 왕회종 집터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284
왕회종 집터는 대한제국 전후 시기에 의병장으로 활약한 왕회종의 집이 있던 곳이다. 왕회종은 숭의전 참봉으로 근무하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500여 명을 이끌고 금성,토산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함경도 길주, 명천, 혜산진까지 북상하였다. 또한 1907년의 고종퇴위와 군대해산 때에도 조인환, 권준, 김진묵 등과 함께 의병부대를 지휘하며 양주, 파주, 적성, 철원, 춘천, 양구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에 13도연합의진의 서울진공작전에 실패한 후 임진강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청년 교육에 힘쓰다가 의병전쟁 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1925년에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284
왕회종 집터는 대한제국 전후 시기에 의병장으로 활약한 왕회종의 집이 있던 곳이다. 왕회종은 숭의전 참봉으로 근무하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500여 명을 이끌고 금성,토산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함경도 길주, 명천, 혜산진까지 북상하였다. 또한 1907년의 고종퇴위와 군대해산 때에도 조인환, 권준, 김진묵 등과 함께 의병부대를 지휘하며 양주, 파주, 적성, 철원, 춘천, 양구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에 13도연합의진의 서울진공작전에 실패한 후 임진강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청년 교육에 힘쓰다가 의병전쟁 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1925년에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항일독립운동 유적 왕회종 집터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284
왕회종 집터는 대한제국 전후 시기에 의병장으로 활약한 왕회종의 집이 있던 곳이다. 왕회종은 숭의전 참봉으로 근무하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500여 명을 이끌고 금성,토산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함경도 길주, 명천, 혜산진까지 북상하였다. 또한 1907년의 고종퇴위와 군대해산 때에도 조인환, 권준, 김진묵 등과 함께 의병부대를 지휘하며 양주, 파주, 적성, 철원, 춘천, 양구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에 13도연합의진의 서울진공작전에 실패한 후 임진강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청년 교육에 힘쓰다가 의병전쟁 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1925년에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284
왕회종 집터는 대한제국 전후 시기에 의병장으로 활약한 왕회종의 집이 있던 곳이다. 왕회종은 숭의전 참봉으로 근무하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500여 명을 이끌고 금성,토산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함경도 길주, 명천, 혜산진까지 북상하였다. 또한 1907년의 고종퇴위와 군대해산 때에도 조인환, 권준, 김진묵 등과 함께 의병부대를 지휘하며 양주, 파주, 적성, 철원, 춘천, 양구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에 13도연합의진의 서울진공작전에 실패한 후 임진강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청년 교육에 힘쓰다가 의병전쟁 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1925년에 세상을 떠났다.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285 갈림길 양평농장방면에 있는순국선열 왕회종의 집터 안내판을 찾아왔다.
네비게이터가 저 방향을 가르킨다.
네비게이터가 저 방향을 가르킨다.
저 방향인데, 농장 내에서 갈 수 있는 길은 막혀있었다.
다시 차량이 다니는 도로까지 나와서 양평농장이라는 안내판에서 다시 들어갔다.
저곳이 들어갔었던 농장이다. 왼쪽 산 아래 안내판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