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필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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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장암리 산7-2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산등성이 정상에서 보이는 또 다른 산등성. 저곳이 같은 번지이다.
망원줌으로 하나씩 확인하였다.
반대편 산등성이의 마지막 묘소.
줌으로 당겨서 확대해보니 독립유공자라는 글자가 보였다.
原城元公 弼喜 之墓(원성원공 필희 지묘)
서기 1986년 2월 18일 종진 건립
獨立有功者 元公 諱 弼喜 之墓
(독립유공자 원공 휘 필희 지묘)

일생일사는 천정의 이치이니 인사유명은 지극히 어렵다 이는 사람마다 의는 알되 몸소 실행이 어려운때문이다. 여기 주등곡 걸좌에 비록 유체는 안장되었으나 그 명성이 영원히 불멸할분이 계시니 공의 휘는 필희이고 자는 여뢰며 정숙공 휘 익겸을 시조로 하는 원주원씨이다. 500여년전 이곳 장산촌에 시거하신 증병조참판 위 중릉의 16개손이며 충정병마절도사 휘 팽조의 15대 종손이라 고 휘는 용훈이고 초비는 영일정씨며 계비는 옥천전씨니 공은 전씨 소생으로 1896년 2월 25일 선향에서 출생 수학하교 상경하여 경기농업학교 재학중인 약관에 의
암 손병희 선생의 독립운동에 추종하다가 기미년 3월 말에 귀향하여 향리 선후배 동지들과 협의하고 동조를 받아 독립만세 시위를 결의하고 격려문 경고문을 작성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군중을 동원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4월 3일 북내공립보통학교 마당에서 8백여명 군중의 시위를 이르키고 당일 여주읍까지 행진하고자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오학리 강변에 이르러 왜병에게 체포되어 1년 6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왜병에게 적점이 찍힌 공은 광복기까지 언행과 생활에 제약을 받는 중에서도 고충을 다하였으나 광복후에도 빛을 보지 못하고 초야에 은거하다. 1968년 7월 24일 73세를 일기로 여생을 마쳤다. 나라의 질서가 잡히고 경제가 안정되면서 독립유공자 표창이 시작되더니 드디어 1990년 8월 15일 나라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국비 지원으로 비로소 단갈에 휘자를 알리게 되니 선열 앞에 부끄러움을 어찌하랴. 배 전주이씨는 1934년 10월 13일에 기졸하여 사달리 진좌원이 초장지이니 공묘에 합폄하였다. 육 1자 1녀하니 자는 종덕 녀는 종건이다. 종덕의 초취 광산김씨는 조졸무육하고 경주김씨를 취하여 육 3자 2녀 하니 자는 강연 수연 복연이고 장녀 태연은 현풍 곽현기에게 차녀 계연은 순천 김길원에게 각 출가하였다. 장자 강연은 진주 류태순을 취하여 동우 녀
동숙 동수 동하를 생하고 차자 수연은 신안 주경순을 취하여 자 동일 녀 미라 향라를 생하고 삼자 복연은 영천 이경희를 서하여 자 동륜을 생하였다. 공은 충절과 생존시 겪은 고충을 몰후자손에게 영광으로 물렸고 후세 사람들의 지표가 되셨으니 이제 공의 명성은 천상의 일월과 함께 영원하리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위원 한산 이현구 근찬
충장공 40대손 종극 근서
1991년 4월 27일 불초자 종덕 읍혈 근립
여주시 북내면 장암리 산7-2는 저 산위가 모두 하나의 번지이다.
이쪽 산등성이를 모두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