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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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37-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일명 준영(竣榮). 정동현(鄭東鉉)의 문인이다. 일찍이 대성전재임(大成殿齋任)을 지냈다.
의병장 이인영 생가[義兵將李麟榮 生家]
지정: 향토유적 제17호 / 소재지: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37-6번지
이인영(1867~1909)은 한말의 의병장으로 호는 중남(中南)이다. 정동현(鄭東鉉)의 문인으로 일찍이 대성전 재임(大成殿 齋任)을 지냈다.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인석,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500명을 영솔하여 춘천과 양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양주에서 13도 창의군 총대장으로 1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을 공략할 계획으로 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허위를 후임으로 삼고 문경으로 돌아갔다. 그 뒤 상주에 은신하던 중 일본 헌병대에 잡혀 경성감옥에서 처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생가는 목조 초가로 19세기 말에 지어졌으며 근년에 지붕과 벽면 일부를 보수하였다.
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37-6 13도의병 총대장 이인영 선생의 생가를 찾아왔다.
의병대장 중남 이인영 기념비
전국 13도 창의대진소의 총대장 중남 이인영은 여주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명성황후께서 일본 자객들에게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호좌의진과 공조했다. 그후 얼마동안 문경에서 은거하다가 1907년 9월 다시 원주에서 관동창의 대장이 되었고, 서울에 있는 각국 공사관에 호소문을 띄우는 등 국권 회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1907년 11월 전국 13도 창의대진소가 결성되자 총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 진격을 도모하던 중 1908년 1월28일 문경에 있던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충은 효이고 효는 충이다"라는 신념을 갖고 후사를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본가로 급히 돌아갔다. 그후 상주와 황간 등지에서 은둔 하던 중 1909년 6월 7일 체포되어 9월 20일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09년 9월 20일 여주군수
여주군이 독립운동가를 배출해낸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자랑스러운 고장임을 널리 알리고자, 공의 순국 100주기를 맞이하여
군비지원과 기념사업회 회원 모두의 뜻을 모아 독립항쟁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려 공의 생가터에
기념비를 건립한다.

여주군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
2009년 9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