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봉산동 산3-1
- 탐방로그
- 원주시 봉산동 산1011에 위치한 민긍호 의병장 충혼탑을 찾았다. 네비게이터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는 주소여서 찾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혹시 다음에 탐방한다면 봉산동 보문사로 찾아오는 것이 더 쉬울 것 같다. 이 충혼탑은 1954년 5월 육군준장 권준이 원성군 흥업면 무실리(현재의 원주시 무실동)에 이장되어있던 민긍호 의병장의 묘소를 현 위치로 다시 이장하면서 묘 앞에 세웠다고 한다. 탑에는 건립에 도움을 주신 분들의 직책과 이름이 나와있다. 함께 설명이 적혀있기로는 1954년 당시 민긍호 의병장 충혼탑 앞에 “충렬정(忠烈亭)”이 함께 세워졌다고 하는데, 현재는 없어지고 탑만 남아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충혼탑에 설명이 되어있는 1954년 당시 민긍호 의병장 충혼탑 앞에 지어진 “충렬정(忠烈亭)”은 없어진 것 같다.
민긍호 의병장의 유적지는 명륜동 치악체육관 옆 민긍호 의병장 기념상과
횡성군 강림면 월현리 1245 월현소공원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전적비가 있다.
횡성군 강림면 월현리 1245 월현소공원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전적비가 있다.
사적으로 찾아갔던 경로 및 민의병장의 묘소 위치이다.
원주시 봉산동 산 1011에 위치한 민긍호 의병장 충혼탑을 찾았다.
원주군 본부면 하동리(현재의 원주시 학성동)에 있던 묘를 1939년 원성군 흥업면 무실리(현재의 원주시 무실동)로 이장하였고, 1954년 5월 육군준장 권준이 다시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충혼탑을 묘 앞에 세웠다고 한다.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묘소(關東倡義大將 閔肯鎬 墓所) -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산 1011
민긍호 의병장의 본관은 여흥이며, 1865년(고종 2) 아버지 민치봉과 어머니 원주원씨의 외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민긍호 의병장은 인품이 강직하고 공사가 분명하여 부하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군대 통솔에 탁월하여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민긍호 의병장은 1897년 원주진위대 고성분견대에 입대하여 하사가 된 후 1900년에 정교로 진급되어 춘천분견대 소속이었다가 다시 1901년 특무정교로 발탁되어 원주진위대에서 근무하던 중, 일제가 원주진위대를 해산하려 하자 원주의 장날인 1907년 8월 5일 약 3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민긍호 의병장은 원주진위대의 무기고를 열어 1,600정의 소총과 탄약을 꺼내어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읍민들을 규합하여 1,000여 명의 병력으로 4개 부대를 편성한 뒤,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경찰을 습격하여 원주읍을 장악하였다. 그 뒤 의병부대를 많은 소단위의 의병부대로 재편성하여, 제천, 죽산, 장호원, 여주, 홍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여 용맹을 떨쳤다.
민긍호 의병장이 거느린 의병부대는 단위부대로서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전투력이 강했던 의병부대로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로 이동하면서 모두 10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1908년 2월 29일 일본군과 접전했을 때, 의병 20여 명이 사살되고 민긍호 의병장은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날밤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해 탈출하다가 사살되어 4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러한 민긍호 의병장의 활약은 일본에게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근대민족운동의 횃불이 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민긍호 의병장의 묘소는 원래 하평동(지금의 평원동)에 있었으나, 1939년 흥업면 무실리로 옮겨졌던 것을 1954년 5월 북부지구 경비사령관 권준 장군이 다시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민긍호 의병장의 본관은 여흥이며, 1865년(고종 2) 아버지 민치봉과 어머니 원주원씨의 외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민긍호 의병장은 인품이 강직하고 공사가 분명하여 부하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군대 통솔에 탁월하여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민긍호 의병장은 1897년 원주진위대 고성분견대에 입대하여 하사가 된 후 1900년에 정교로 진급되어 춘천분견대 소속이었다가 다시 1901년 특무정교로 발탁되어 원주진위대에서 근무하던 중, 일제가 원주진위대를 해산하려 하자 원주의 장날인 1907년 8월 5일 약 3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민긍호 의병장은 원주진위대의 무기고를 열어 1,600정의 소총과 탄약을 꺼내어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읍민들을 규합하여 1,000여 명의 병력으로 4개 부대를 편성한 뒤,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경찰을 습격하여 원주읍을 장악하였다. 그 뒤 의병부대를 많은 소단위의 의병부대로 재편성하여, 제천, 죽산, 장호원, 여주, 홍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여 용맹을 떨쳤다.
민긍호 의병장이 거느린 의병부대는 단위부대로서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전투력이 강했던 의병부대로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로 이동하면서 모두 10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1908년 2월 29일 일본군과 접전했을 때, 의병 20여 명이 사살되고 민긍호 의병장은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날밤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해 탈출하다가 사살되어 4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러한 민긍호 의병장의 활약은 일본에게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근대민족운동의 횃불이 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민긍호 의병장의 묘소는 원래 하평동(지금의 평원동)에 있었으나, 1939년 흥업면 무실리로 옮겨졌던 것을 1954년 5월 북부지구 경비사령관 권준 장군이 다시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故 民族英雄義兵隊長閔特務公肯鎬公之忠魂塔
(고 민족영웅 의병대장 민특무긍호공지충혼탑)
(고 민족영웅 의병대장 민특무긍호공지충혼탑)
충혼탑 건립에 도움을 주신 분들의 직책과 이름이 나와있다.
북부지구경비사령관/강원도지구 위수사령관 육군준장 권준, 최규옥 강원도지사, 강원도지구 병사구사령관 육군대령 한왕룡, 춘천지구 위수사령관 육군대령 유재성, 영동지구 위수사령관 육군대령 남영소대령, 육군제100부대장 육군대령 조사영, 강원도 경찰국장 경무관 홍병제, 경기도경찰국장 경무관 김우택, ........
북부지구경비사령관/강원도지구 위수사령관 육군준장 권준, 최규옥 강원도지사, 강원도지구 병사구사령관 육군대령 한왕룡, 춘천지구 위수사령관 육군대령 유재성, 영동지구 위수사령관 육군대령 남영소대령, 육군제100부대장 육군대령 조사영, 강원도 경찰국장 경무관 홍병제, 경기도경찰국장 경무관 김우택, ........
민공영전
공은 문약하던 이조말기에 나라의 방패인 군인의 지조를 굳게지켜 원주 진위대의 특무정교로서 당시에 팽창을 거듭하던 일본 제국주의가 침한의 제1보로서 군을 강제로 해체코자 간계를 시도함에 애국부하들을 영도하여 왜적을 험준한 강원 충청 및 경상의 산악지대로 유인하고 격전을 거듭하면서 내외에 왜적의 야욕을 폭로하는 한편 우리나라 청년들의 기개와 애국 정신을 선양하던중 단기4241년 영월에서 순국하였음은 반세기를 격한 오늘날에 있어서 멸공전에 혈전분투하는 우리의 참다운 귀감으로 모셔 지성과 애국정신은 영원히 대한청년의 흉금이 계승되어 그 빛을 더 하리라.
단기 4280년 5월 31일 육군참모총장 육군대장 정일권
공은 문약하던 이조말기에 나라의 방패인 군인의 지조를 굳게지켜 원주 진위대의 특무정교로서 당시에 팽창을 거듭하던 일본 제국주의가 침한의 제1보로서 군을 강제로 해체코자 간계를 시도함에 애국부하들을 영도하여 왜적을 험준한 강원 충청 및 경상의 산악지대로 유인하고 격전을 거듭하면서 내외에 왜적의 야욕을 폭로하는 한편 우리나라 청년들의 기개와 애국 정신을 선양하던중 단기4241년 영월에서 순국하였음은 반세기를 격한 오늘날에 있어서 멸공전에 혈전분투하는 우리의 참다운 귀감으로 모셔 지성과 애국정신은 영원히 대한청년의 흉금이 계승되어 그 빛을 더 하리라.
단기 4280년 5월 31일 육군참모총장 육군대장 정일권
충혼탑기
오호라 공은 불행히 이조말 쇠퇴할 때에 탄생하여 국가안위의 중책을 쌍견에 걸머지고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중 안으로는 난신적자가 충만하고 밖으로는 왜구가 우리나라 내정을 간섭하여 강제로 원주진위대를 해산할 때에 공은 대의명분을 존중하므로 의기를 고양하고 항거 왜적 하니 가위 퇴파충만의 지주요, 경하의 거목이라. 공의 정충보국지대절은 후생의 보감이오, 조국광복의 기초이니 석호라 구국구민의 대지를 미성하고 신선순국하니 충혼의백이 의귀할 바가 없어서 치악야월과 봉천추우에 상필음읍방황이라. 후학은 군려의 직을 부하하고 마침 이곳에 부임하여 석일경모의 성으로 장병제군과 더불어 유해를 예장하고 또한 당지각군정 기관장의 찬조를 득하여 충혼탑과 충열정을 건립하고 제전을 치하여 춘추향사를 봉케해서 공의 충혼을 만분지일이라도 위로코자 하나이다.
단기 4287년(1954) 5월 13일
오호라 공은 불행히 이조말 쇠퇴할 때에 탄생하여 국가안위의 중책을 쌍견에 걸머지고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중 안으로는 난신적자가 충만하고 밖으로는 왜구가 우리나라 내정을 간섭하여 강제로 원주진위대를 해산할 때에 공은 대의명분을 존중하므로 의기를 고양하고 항거 왜적 하니 가위 퇴파충만의 지주요, 경하의 거목이라. 공의 정충보국지대절은 후생의 보감이오, 조국광복의 기초이니 석호라 구국구민의 대지를 미성하고 신선순국하니 충혼의백이 의귀할 바가 없어서 치악야월과 봉천추우에 상필음읍방황이라. 후학은 군려의 직을 부하하고 마침 이곳에 부임하여 석일경모의 성으로 장병제군과 더불어 유해를 예장하고 또한 당지각군정 기관장의 찬조를 득하여 충혼탑과 충열정을 건립하고 제전을 치하여 춘추향사를 봉케해서 공의 충혼을 만분지일이라도 위로코자 하나이다.
단기 4287년(1954) 5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