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3.1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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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 4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3.1 만세운동의 시작(역사적 배경)

1910년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폭력으로 억압과 수탈을 자행했다. 헌병 경찰제도를 통해 수많은 항일 독립 운동가를 학살하고,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학대로 인권을 유린했다. 이러한 수탈과 억압으로 민중의 삶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민족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마침내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주체적인 여건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제1차 세게대전의 종전을 전후해 국제정세가 바뀌고,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여 세게의 식민지 약소국가를 중심으로 민족주의가 고조되기에 이르렀다. 1918년 말부터 천도교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학생들이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독립요구를 위한 운동을 계획하였는데, 마침 상하이, 미국, 일본 등지에서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상하이에서는 여운형과 김규식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온 크레인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했다. 이어 1919년 1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고, 여운형 등은 만주와 연해주, 국내와 일본 등 가지의 인물들과 대규모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했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교통이 발달한 도시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면서 농촌 등지로 전파되고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날이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 국외로까지 확산되면서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일제는 3.1 만세운동을 총칼과 폭력으로 진압하면서 무자비한 학살과 잔학한 고문을 자행했다. 당시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1 만세운동 이후 3개월 동안 7,509명이 사망하고, 15,961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46,948명이 옥고를 치렀다.

4.1 횡성군민 만세운동

횡성의 만세운동은 횡성보통학교 4학년 6회 졸업생들이 도화선이 됐다. 이들은 1919년 3월 18일로 예정된 졸업식이 끝나면 곧바로 횡성군청 뒷산으로 올라가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고 읍내 지도층 어른들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어른들은 힘을 결집해 후일을 도모하자고 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후 몇 차례 비밀회의를 가진 끝에 '무언의 저항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해 1월 22일 승하한 고종황제를 애도하는 표시로 3월 16일부터 상장(喪章)을 달고 등교하기로 하고 전교생에게 연락해 실행에 옮겼다. 일본헌병은 이로 인해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 휴교령을 내렸고, 학생들은 에정된 졸업식도 못하고 졸업장을 집에서 받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횡성읍에 대한 일본헌병의 감시가 강화되었고, 시장의 분위기는 삼엄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이미 시작된 만세운동의 기운은 횡성으로 이어지기 시작해 마침내 3월 27일 오후 1시, 횡성장터에서 신재근, 장도훈, 안경춘, 강만형, 윤태환 등의 주도로 300여명의 시위대가 만세운동을
시작했는데, 3월 18일 예정된 졸업식도 못 치른 횡성보통학교 졸업생들도 합세했다. 그러나 일제의 사전조치로 천도교인 8명 포함, 12명이 검거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횡성천도교 대교구는 횡성청년회, 횡성감리교회와 협력해 치밀한 사전준비로 다음 만세운동에 대비했다. 3월 27일 만세운동에서 시위를 이끌었던 신재근, 안승훈, 강만형, 윤태환 등이 체포되어 일본헌병들에게 고문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군민들은 더욱 분개했다. 만세운동을 지휘했던 횡성천도교 최종하 대교구장 등은 첫번째 만세운동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더욱 치밀한 준비를 하고 다시 4월 1일 장날에 대규모 만세운동을 계홱했다. 4월 1일 역사적인 횡성군민만세운동이 시작됐다. 횡성 천도교 대교구에서는 감리교회와 연대하여 횡성읍으로 출입하는 도로에 교인들을 배치하고, 마을에서는 장꾼을 인솔했다. 오후 3시경 군중들은 1,300여명에 달했고,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마침내 만세소리가 터져 나오자 순식간에 장터는 만세소리로 뒤덮였고, 횡성천도교 대교구에는 태극기가 높이 솟았다. 군중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몽둥이가 들려있었다. 장터의 술집에서도 서로 술을 권하며 만세시위 참여를 권했다. 이때 헌병분견소 소속 헌병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군중들이 헌병을 말에서 끌어내리고 뭇매를 가하자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총소리에 놀란 군중들이 잠시 주춤했으나 해산하지는 않고 날이 저문 후 다시 만세시위를 계속해 밤중까지 이어졌다. 시위대가 군청 뒤에 있는 헌병분견소로 향하자 헌병들의 총격이 거세졌다. 5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됐다. 군의회 위에 있는 느티나무 밑에는 총탄이 숨진 시체와 피투성이가 된 사람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날이 밝을 때까지 시위는 멈취지 않았다. 4월 2일 아침에도 200여명의 읍민들이 헌병분견소에 모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체포자의 석방을 요구했다. 전날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다시 모여들었다. 4월 6일까지 횡성읍내의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7일에는 길가에 태극기와 함께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선전문을 게시하며 항쟁을 이어갔다. 4월 12일에는 서원면 분일리에서 송병기 등이 주도해 70여명의 주민들이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쳤다. 이 소리를 들은 마을사람들이 합세해 수가 더해지고, 시위대는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돌며 새벽 1시까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것이 횡성군민만세운동의 마지막 함성이었다.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의 의미

횡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로부터 약탈과 노략질 등 심각한 피해를 입으면서 자연스럽게 항일민족정신의 싹을 틔웠다. 항일민족정신은 의병활동으로 시작해 구한말 일제강점기 격렬한 의병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뿌리가 1919년 전국적으로 번지기 시작한 3.1 만세운동에 이어 4월 횡성군민만세운동으로 계승된 것이다.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은 그 규모와 항쟁의 강도가 가장 격렬해 강원도 만세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로써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은 횡성군민의 기개를 널리 덜치고, 애국의 고장 횡성의 가치를 드높인 상징이 되었다.
三.一운동기념비(3.1운동기념비)
三.一운동기념비(3.1운동기념비)
三.一운동기념비(3.1운동기념비)

1919년의 3.1만세는 한일합방에 항거하는 통분한 함성이요. 자유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비참한 절규요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국권을 유지 계승하려는 당당한 주장이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 거대한 불길의 폭발이었다. 그러므로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번져 하늘이 뻐개지고 땅이 흔들릴 듯한 맹렬한 기세였다. 이러한 정당한 평화적인 궐기에 대하여 왜적의 탄압은 어떠하였던가. 잔인하고 악독한 살육과 형벌이었다. 이해 3월 27일 우리 횡성에서는 수 천 군민이 읍내장터에 모여 장렬한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고 잇따라 4월 12일까지 사이에 각 면마다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부르던 중 하영현 강달회 전한국 강승문 의사는 현장에서 강만형 의사는 옥중에서 왜적의 총칼 아래 순국의 영령이 되고 말았다. 이 숭고한 3.1정신을 이어받아 창간한 동아일보사는 유서깊은 이 곳에 이 기념비를 세워 그 거룩한 정신을 만대의 후세까지 길이 받들어 드높이려 한다. 1972년 8월 15일

동아일보사
횡성군민 만세운동 기념비
횡성군민 만세운동 기념비
기미년 3·4월 민족의 자존을 짓밟으려는 일제에 항거하여 이 고을 모든 백성들은 일어섰다. 성난 분노는 노도와 같았고 거룩한 함성은 뇌성과도 같았다. 태극기는 하늘을 뒤엎고 의기는 하늘을 찔렀다. 1919년 3월 27일, 4월 1일과 2일 그리고 12일까지 횡성장터를 중심으로 펼쳐진 이 고을 만세운동은 총칼의 탄압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향해 달려가는 뜨거운 여정의 시작이요 횃불이었다. 일제의 잔악한 살육에도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고 겨레의 분노는 불길처럼 타올랐다. 이 운동으로 하영현 강달회 전한국 강성순 강만형 의사가 순국하고 많은 사람이 붙잡혀서 옥고를 치르고 더 많은 사람이 뜨거운 피를 흘리며 오로지 광복과 영광을 위한 씨알로 희생하였다. 그 숭고한 얼과 넋을 기리며 이 비를 세워 영원히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1984년 11월 22일 횡성군수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이란?

횡성 3.1운동은 강원도 독립만세운동의 효시이자 진원지로서 어느 지역보다도 거센 만세시위가 있었다. 횡성천도교회 이채일과 이동구에 의하여 독립선언서가 전해졌고, 최종하, 신재근, 장동훈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부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수 백명이 군민이 읍내 장터에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8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4월 1일에는 군민 1,300여명이 운집하여 장렬한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고, 이어 2일까지 200여명이 일본 헌병분견소에 모여 대한민국의 독립과 체포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4월 12일까지 각 면마다 거센 만세운동을 펼치던 중 하영현, 강달회, 전한국, 강성순 의사는 현장에서, 강만형 의사는 옥중에서 왜적의 총칼에 순국하였다. 3월 27일 첫 만세운동부터 4월 1일과 4월 2일 3차에 걸쳐 횡성읍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을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은 도내 최초.최대의 만세운동으로서 가장 오랜 기간 가장 많은 선열들이 희생한 위대한 민족자존의 역사이자 횡성군민의 긍지로 남아있다.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이란?

횡성 3.1운동은 강원도 독립만세운동의 효시이자 진원지로서 어느 지역보다도 거센 만세시위가 있었다. 횡성천도교회 이채일과 이동구에 의하여 독립선언서가 전해졌고, 최종하, 신재근, 장동훈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부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수 백명이 군민이 읍내 장터에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8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4월 1일에는 군민 1,300여명이 운집하여 장렬한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고, 이어 2일까지 200여명이 일본 헌병분견소에 모여 대한민국의 독립과 체포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4월 12일까지 각 면마다 거센 만세운동을 펼치던 중 하영현, 강달회, 전한국, 강성순 의사는 현장에서, 강만형 의사는 옥중에서 왜적의 총칼에 순국하였다. 3월 27일 첫 만세운동부터 4월 1일과 4월 2일 3차에 걸쳐 횡성읍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을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은 도내 최초.최대의 만세운동으로서 가장 오랜 기간 가장 많은 선열들이 희생한 위대한 민족자존의 역사이자 횡성군민의 긍지로 남아있다.
헌병분견소 터
헌병분견소 터

이곳은 1919년 4월 1일 횡성군민만세운동 당시 헌병분견소가 있던 곳이다. 장터에서 시작한 만세운동 군중들은 밤이 되면서 이 곳 헌병분견소로 몰려왔다. 당황한 일본 헌병의 무차별 총격으로 5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 40 횡성3.1공원
순국 터

이곳은 1919년 4월 1일 횡성군민만세운동 당시 헌병분견소로 가는 길목으로, 일본헌병의 무차별 총격으로 5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순국 터

이곳은 1919년 4월 1일 횡성군민만세운동 당시 헌병분견소로 가는 길목으로, 일본헌병의 무차별 총격으로 5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