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원 추모비

4

주소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월산리 1142-4
탐방로그
양평군 지평면 월산리 1142-4에 위치한 이근원 선생 추모비를 찾았다. 금계 이근원 선생의 묘소는 추모비 뒷편 금의마을 봉미산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마침 지나시는 이장님을 만나서 손쉽게 묘소 위치를 알 수 있었다.
GPS상의 주소는 양평군 지평면 월산리 산42이다.
錦溪 李根先生墓碣銘幷序(금계 이선생 묘갈명 병서)
朝鮮國處士錦溪李根先生之墓(조선국 처사 금계 이선생지묘)
양평군 지평면 월산리 1142-4 도로변 금계 이근원 선생 추모비를 찾았다.
추모비 뒷편 양평군 지평면 월산리 금의마을 봉미산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 선생의 묘소를 찾기 위해서이다.
금계 이근원 선생 추모비
이근원(李根元, 1840~1918) 선생은 1840년(헌종 6) 11월 12일 양평군 지평면 월산리 금의(錦衣)에서 부친 노기당 이양흡(李養翕, 1809~1878)과 모친 전의이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문중(文仲), 호는 금계(錦溪).배복와(坏墣窩)이며, 성종의 11번째 아들 전성군(全城君) 변(忭)의 11세손이다. 선생은 10세에 외숙 이풍회(李灃會)에게 글을 배웠고, 1866년(고종 3) 27세 화서 이항로(1792~1868) 선생 문하에 들어갔다. 1868년(고종 5) 화서 이항로 선생이 서거한 후에는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를 스승으로 모시고, 과거공부도 전폐하고 도학공부에 전력하였다. 또한 화서학파의 기본정신인 도학과 의리정신, 그리고 위정척사 사상이 투철하여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유인석.홍재구.유기일.박장호 등과 함께 척양소(斥洋疏)를 올렸다. 일제강점기하의 시대속에서 직접 의병을 일으키는데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 의병군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정신적 항쟁을 하였다. 1884년 변복령이 내리자 「화이의복변(華夷衣服辨)」을 지어, 의복이 바뀌면 정신적 가치기준도 달라진다고 하면서 강경하게 비난하였다.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선생은 11월에 용문산에 들어가 유중악.유홍석.유봉석.이소응 등과 거의할 것을 논의할 대에 참석하였다. 1906년 친일파 정혁선이 "금계가 의병을 일으켜 '일진회'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모함을 하여, 여주 헌병대에 구금되기도 했었다. 그 후 1910년 경술국치 때에는 일제가 주는 은사금(恩賜金)을 거부하다 헌병 분견소에서 1주일간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선생은 금리 정사(精舍) 동쪽에 일직당(一直堂)을 지어 주자를 모시고, 후에 우암 송시열,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 사현(四賢)을 추배하고 평소에 5현을 존경하고 사모하고 절함은 물론, 매년 3월에는 강회(講會)를 실시하여 학풍을 진작시키며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선생의 저술에는 「행자설(行字說)」, 「자경문(自警文)」, 「지경설(持敬說)」, 「명덕설(明德說)」, 「신언설(愼言說)」, 「삼명설(三命說)」, 「화이의복변(華夷衣服辨)」「출처설(出處說)」 등이 있고 편서에「송서략선(宋書略選)」과 「금계집(錦溪集)」이 있다. 금계 이근원 선생의 추모비는 2009년 8월 15일 지평의병정신선양회가 양평군의 지원을 받아 건립하였으며, 비신이 2.1m 정도 규모, 비문은 약 2,400여 자로 이루어졌다. 비문은 벽계서당 훈장 정석현이 짓고, 두전(頭篆)은 사단법인 화서학회 이사장 이종익이 썼으며, 교정은 정삼현이 하였다.
금계 이근원선생 추모비 비명병서. 아래 양평의병자료집(하)에 한글로 번역된 비문 있어서 그 내용을 인용합니다.

양평의병자료집(하권)
추모비문

무릇 氣數는 때때로 屈伸함이 있고 斯道는 이에 따라 盛衰한다. 氣數가 펴져서 斯道가 盛하게 되면 하늘이 반드시 大聖賢을 내어 사도를 크게 행하여 당시를 다스리게 하고 기수가 굴하여 사도가 쇠하게 되면 하늘이 또 大聖賢을 내어 이 어지러움을 고식시켜 후세를 기다리게 하는데, 이는 모두 仁天이 인간을 매우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蔑貞의 시기를 당했을 때 華西 李文敬公이 蘗溪에 태어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때 한때의 儒賢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는데, 金重菴 平黙과 柳省齋 重敎 두 선생은 특히 그 현저한 분들이다. 처음에 화서 선생을 섬기고 나중에는 두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그 전수하는 바를 다 얻어 우뚝히 洪流의 砥柱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錦溪 李先生이라고 칭하는 분이 바로 그 사람이다.
선생의 諱는 根元이요, 初諱는 世元이다. 字는 文仲이요, 號는 坯墣窩이다. 憲宗, 六年 庚子 十一月 十二日에 砥平縣 錦里第에서 태어나니 학자들이 그 거처하는 곳을 따라 錦溪先生이라 칭하였다. 李氏家系가 璿源에서 나왔으니 成宗大王 第十一子 全城君 諱 忭, 諡號 文肅公이 十一世祖가 된다. 考의 諱는 養翕이요, 號는 老稼堂이니, 重菴 金先生이 행장을 지은 바 있으며, 妣는 全義 李氏 應培의 따님이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귀 옆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었으며 목소리가 우렁차고 용모가 걸출하여 사람들이 큰 그릇이 될 인물로 중히 여겼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학업 닦기를 열심히 하여 남이 한 번하면 나는 백번 하고야 마는 공부를 하였다. 弱冠에 부모의 명에 따라 과거공부를 하여 크게 명성이 났었으나, 과거공부는 선생의 뜻이 아니었다.
나이 27세에 華西李先生을 벽계로 찾아가 뵈었다. 이에 性理의 要體와 道義의 대단함을 듣고 主理의 학문을 힘써 강하고 春秋의 의리를 엄히 밝혔는데 화서선생이 ‘仁이 넘쳐난다’고 칭찬하였다. 화서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중암·성재 두 문하에 출입하면서 崔勉菴 益鉉 柳毅菴 麟錫 柳恒窩 重岳 세 君子와 더불어 나란히 달리면서 부지런히 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世道로서 自任하였다. 대개 선생의 학문은 居敬 窮理 力行으로 근본을 삼았는 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사람은 天地의 자식이 되니, 자식 된 자가 감히 天地를 몸받아 이루고 돕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朱子가 이른바 ‘敬에 居하여 그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窮究하여 그 지식을 지극히 하고 힘써 행하여 그 일을 실천해야 한다’고 한 말씀과 栗谷이 이른바 ‘終身事業’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 明德을 論함에 있어서는 “明德은 理이니 하늘이 명하여 나에게 부여한 것이며 내가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그 本?를 말하자면 虛靈洞澈하여 모든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으니, 氣를 떠나지 않되 氣에 구속되지 않으며 능히 사물에 명하되 사물에게 명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만이 홀로 가능하고 사물들은 온전히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으며, 心을 논함에 있어서는 “心은 理氣를 合하고 動靜을 포함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루 유행하여 변화하고 神明하여 헤아릴 수 없으며 眞妄이 일정하지 않고 邪正이 반복되며, 한편으로는 위태하고 한편으로는 은미하며 일정하게 向背하는 바가 없다. 聖人이 이를 근심하여 특별히 惟精惟一의 가르침을 베풀어 학자들의 萬世傳心의 요령으로 삼게 한 것이다.
眞妄이 일정치 않은 것에는 理와 氣가 합한 것이 心의 當?地頭임을 알아 惟精의 공부를 하고, 바르고 사특함이 없는 것에는 理가 氣의 주가 되는 것이 心의 本體面目임을 보아 惟一의 공부를 해야 하니, 이것이 心學主理의 宗旨이다.” 하였으며, 華夷의 大防을 논함에 있어서는 “尊華攘夷는 天地의 큰 법이며 古今의 공통된 의리이다. 陰陽으로 말하자면 陰을 억제하고 陽을 부지하는 것이며, 人獸로 말하자면 인간을 귀하게 여기고 짐승을 천시하는 것이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말하자면 사사로움을 극복하고 禮로 회복하는 것이며 욕심을 막고 天理를 보존하는 것이니, 이것이 모두 그 의리이다.” 하였으며, 出處를 논함에 있어서는 “士君子의 出處?語?은 時運의 盛衰와 관련이 있으니, 事爲의 大小輕重이 시대를 인하지 않음이 없어 의리가 자연히 같지 않은 법이다. 크게 행할 뜻이 있고 크게 행할 만한 세상을 만나면 은거하지 말고 세상에 나아가며 잠자코 있지 말고 말하며 그 임금을 堯舜처럼 만들고 그 백성에게 은택을 내리는 것이 본디 君子가 즐거이 하는 것이다. 설령 국가의 운명이 곤란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게 되더라도 君子는 愛君憂國 至誠惻?의 마음을 갖고 서둘러 구제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하였다. 이러한 말씀들은 선생의 학문의 淵源이 유래가 있고 평소에 充養함이 있었기 때문이니, 道學의 대단함과 尊華攘夷의 엄정함과 出處의 관점을 또한 미루어 볼 수 있는 것이다.
乙未事變을 당하여 島倭가 우리 國賊들과 더불어 國政을 제멋대로 하여 斷髮의 화가 위로 大內에서부터 閭里에 까지 미쳤으며 뒤이어 國母를 시해하는 참혹한 일이 있었다. 砥平에 사는 安鍾應 李春永 安承禹 등 선비들이 擧義하고 毅菴 柳先生을 추대하여 首將으로 삼았는데, 선생은 세상에 나가 斯道를 부지하는 것이나, 나가지 않고 부지하는 것이 같은 의리라고 여겨 의암에게 편지를 보내 몸이 병들어 나가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이듬해 병오년 정월에 일진회 사람 鄭赫善이 선생을 무함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일진회를 해치고 보름 후에 의병을 출동시키려 한다.’고 하였는데, 일진회는 바로 島倭의 走狗들의 소굴이다. 이리하여 驪邑兵站에서 선생을 소환하니, 선생은“擧義는 오늘날의 당연한 일이다.
다만 지혜와 힘이 미치지 못하여 하지 못하고 있는데, 虛名을 잘못 입고 이 지경을 만났으니 실로 깊이 부끄럽다.” 고 말하고 즉시 胤子 俊學에게 명하여 행리를 꾸리게 한 다음 家廟에 뵙고 출발하였다. 이윽고 정혁선과 대질하게 되었는데, 선생이 정색하고 정혁선을 보며 말씀하기를 “의병이 얼마나 좋은 일인데 쇠하고 병든 나에게 그 이름을 얹는가? 이는 진실로 늘그막의 영광이다. 그러나 천하의 일은 있는 것을 속여 없다고 할 수 없는데, 무슨 증거나 꼬투리가 있는가?”
하니, 정혁선이 상심하여 답변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출발하여 站門 밖에 나와서 개연 히 눈물을 흘렸는데, 이는 重菴선생이 禁府에서 형벌을 받을 때 눈물 흘렸던 그 마음이었다.
庚戌年 가을 국가에 큰 변고가 있었다. 恩賜金이라 칭탁하여 나라 안 연로한 이들에게 돈을 골고루 보냈는데, 이때 선생의 나이가 71세였다. 선생이 엄한 말로 물리쳐 말씀하기를, “李根元은 조선의 가난한 선비로 스스로 天地間 逸民이라 칭하고 있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道가 있는 스승을 뵈어 尊華攘夷의 의리와 克己復禮의 학설을 강론하였으나, 힘써 행하지 못하고 아는 것 없이 늙기만 하였다. 지금 일본이 남의 임금을 폐지하고 남의 나라를 삼키고서 그 돈을 그 백성들에게 나눠
주고 있으니 그 백성된 자가 편히 받으려 해야 하겠는가! 내 나라의 임금이 하사하는 것이 있어도 의리에 옳지 않고 마음에 편치 않은 바가 있으며 억지로 받을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이를 벗어나 절대로 받을 만한 의리가 없는 경우에 있어서이겠는가? 이것이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받지 않는 이유이다.” 하였다.
뒤이어 위협과 협박을 당하고 두 차례 지평 감옥에 구금되었으니, 선생이 감옥에 갇혀 있던 날은 모두 7일이었다. 누차 곤욕을 겪어 자못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는데, 늠름히 犯接할 수 없는 節義가 있었다. 이때 다음과 같은 箴을 지었다.
“일본이 주는 금은 결코 받을 수 없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의리는 우주에 영원하네. 한 개도 취하지 않으니 마음이 金石처럼 단단하네, 이렇게 하는 것은 秉彛好德의 마음일 뿐이네” 아! 선생은 斯道가 매우 쇠하는 때를 당하여 곤액에 빠져 生死를 넘나들면서도 굳은 지조가 끝까지 변치 않았으니, 그 융성한 덕망과 빛나는 광채가 족히 陽德을 기르고 道?을 연장할 만하여 우뚝이 당세의 스승이 되었다. 가정에 있어서는 매일 동틀녘에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하고 의관을 갖춘 다음 家廟에 절하고 五賢影堂에 다녀왔는데, 精舍 동쪽에 一直堂을 건립하여 朱子를 봉안하고 尤菴ㆍ華西ㆍ重菴ㆍ省齋를 配享하여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물러나와서는 집안 사람들을 인솔하여 家禮와 小學 몇 조목을 읽게 한 다음 揖禮를 행하고 書室로 나가 諸生들과 講論하였는데 날마다 한결같았다. 선생의 제자들이 수백 명이었는데 道學과 節義를 다반사로 삼아 김상태 김태원 안승우 이규현 장익환 등은 擧義함으로써 斯道를 부지하고 박준빈 배진환 천낙귀 최형근 추성구 등은 講學함으로써 斯道를 부지하여 당시의 元氣가 선생 문하에 집합하여 있었다.
어버이가 살아 계실 적에 뜻을 받드는 효도와 봉양하는 정성에 모두 그 자식된 직분을 제대로 하였으며 戊寅年에 老稼堂의 喪을 당하고 壬午年에 어머니 李氏의 喪을 당해서는 예절과 슬픔이 모두 극진하였다.
婣戚과 친목하고 孤幼를 撫恤하여 자손에게는 의로써 가르치고 부인에게는 예로써 거느렸으며, 일상생활의 집기들은 한결같이 검소하고 소박한 것으로 하고 서양이나 왜놈의 물건을 사용하지 않았다.사람을 접대함에 있어서는 和順함이 안에 쌓여 英華가 밖에 드러났다. 그 溫厚卑謙한 뜻과 至誠愛好의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고 말씀에 나타나 일찍이 모나거나 차별하는 것이 있지 않았다. 정성으로 道를 강론하고 부지런히 鄕飮禮를 행함에 있어서는 長潭 雲潭 朝宗巖 大老祠에 두루 다녀왔으며, 벗들과 從遊하는 곳에는 1년에 서너 번이거나 한 달에 한두 번씩 만나 위로는 父師의 뜻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後進들의 기대가 되어 힘쓰고 힘써 게을리 하지 않아 연세가 높아져서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山水를 사랑하여 노래하고 읊조리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精舍 남쪽에 작은 연못을 파고 또 그 서쪽에 反招臺를 쌓아 봄바람이 화창할 때와 가을달이 밝을 때 큰 갓과 넓은 띠로 흰머리에 청여장을 짚고 그 사이에서 노닐었는데 어떤 때는 술자리를 열고 어떤 때는 시를 짓기도 하였는 바 훌쩍 세상 시름을 벗어난 기상이 있고 편안히 천명을 즐기는 뜻이 있었다. 著書에는 錦溪集 九冊이 있다. 일찍이 말씀하기를, “學問 全?와 春秋大用을 우리나라 선배 중에 오직 尤翁만이 당할 수 있는데 다만 大全의 卷數가 매우 많아 독자들이 쉽게 터득하지 못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고 하고, 그 절실하고 요긴한 내용을 뽑아 분류하여 十數篇을 만들고 宋子書節略이라 이름하였다.
戊午年 2월 8일 丙寅日에 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날 저녁에 氣貌가 평소 같고 글 읽는 소리도 평상시 같았다. 이때 從姪 時學이 모시고 앉았었는데, 선생이 말씀하기를, “사람의 몸을 주장하는 것은 마음이니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直만한 것이 없다. 마음이 곧지 않으면 마음이 될 수 없으며 사람이 사람이 될 수 없다.” 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문안하였더니 눈을 감고 말씀이 없었는데 申時에 이르러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喪禮를 집행함에는 四禮便覽에 의거하여 했으며 士林葬을 행하였다. 묘소는 深谷의 先塋 오른쪽 등성이 艮坐原이다.
아! 先生의 盛德과 宏學은 본디 세상이 큰 쓰임이 있을 만한 것이었으나 다만 좋지 못한 시기를 만나 초야에서 자취를 감추고 華西 重菴 省齋 三先生의 遺緖를 結梢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扶持하지 않음으로써 扶持하는 것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지금 90년이 되었다. 국내 유림들이 선생의 도학과 의리를 사모하여 묘소 길가에 추모비를 세워 기리고자 하여 추모비건립원회를 결성하였다.
나는 선생의 연원으로 늘 泰山北斗처럼 사모하고 있으니, 지금 이 일에 굳이 사양만 할 수 없어 삼가 그 行狀을 상고하여 위와 같이 쓰고 이어 銘하니, 銘은 다음과 같다.
璿源의 古家출신으로
海岳의 英姿를 지녀
剛毅하고 果敢하며
忠厚하고 仁慈하였도다.
일찍이 蘗溪夫子를 섬겨
학문에 연원이 있더니
뒤이어 重菴 省齋를 섬겨
그 전수하는 것을 모두 얻었도다.
義로써 몸을 바르게 하고
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니
움직일 때나 조용할 때나 차이가 없고
마음과 행동이 서로 바르게 되었도다.
陰陽 消長의 이치와
華夷 尊卑의 등급에
陽을 붙들고 陰을 억제하며 華를 높이고 夷를 내리치니
百世에 길이 평가가 있으리라.
문을 열어 제자를 가르치니
그 무리가 나라에 가득한데
분연히 이 고을에서 일어나니
이 강토에 선봉이 되었도다.
진실로 선생이여
찬란히 文彩를 이루니
높고 높은 泰山이며
넓고 넓은 河海로다
그 덕을 사모함에
시대가 다르다고 차이가 있으랴
온 나라 선비들이
비석 세울 뜻을 두었도다
砥平의 深谷은
산이 밝고 물이 맑으니
글을 새겨 돌에 실어서
萬代에 밝게 보이노라

선생이 하세한 지 90주년 되는 정해 4월 일에 후학 張錫鉉은 삼가 짓다.
금계 선생의 묘소는 추모비 뒷편 금의마을 봉미산에 있다고 되어 있다.
추모비에서 바라본 봉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