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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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산138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검암 최익환 선생은 최시형 선생의 장손자이자, 독립운동가 최동희 선생의 장남이시다.
위쪽에는 애국지사 최동희 선생의 묘소와 묘비가 보인다.
天道敎 宗法師 劒菴 崔益煥 天道敎 宣道師 敬賢堂 洪昌燮 墓
(천도교 종법사 검암 최익환 천도교 선도사 경현당 홍창섭 묘)
천도교 종법사 검암 최익환님은 해월신사의 장손이며 의암성사의 내종손이시다. 검암장은 포덕54년 3월 19일 고려혁명당 대표로 중국에서 활약하시다 순국하신 소수 최동의 어른과 성현당 홍동화의 장남으로 태어나시어 일찍이 중동고교를 졸업하면서 동덕여고를 나온 경현당 홍창섭 여사와 결혼하시고 천도교 청년당 조직활동과 교리 교사 연구에 전념하시다 87년 8.14사태때는 교무규서로 직접 양파 대표급을 설득 수습하여 교회 안정에 크게 공헌하시고 법도규정을 거친 후 교무원장을 역임하면서 교회발전에 진력하시다. 121년 시천교 재단 사회측 이사로서 구미산 용담 일대 45만평을 천도교 재단에 편입하게 한일과 129년 검암장 단독으로 정부에 건의하여 대신사 태묘 주변 3만평을 천도교재단에 무상으로 귀속시킨 장거는 8.14사태 수습과 함께 빛나는 공적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130년에 종법사로 추대되신 검암장께서는 원래 성격이 청렴강직하시고 안빈낙도하며 80여 평생을 변절없이 동학교 정통성을 지켜온 유일한 교손이시다. 한편 청빈한 가정에서 가난과 싸워가며 해월가를 지켜왔음에 이 어찌 경현당의 숨은 내조의 공덕이 아니랴! 만년에 종법사님은 항상 정신개벽과 정의사회 구현을 역설해오시다가 140년 6월 14일 87세를 일기로 환원하시다. 종법사 내외분의 성령이시여! 부디 후손들과 우리 후학들의 심령 속에 무궁토록 장생하시어 교회 중흥과 통일조국의 광명을 비추어 주실지어다.
포덕 140년(1999) 11월 5일 천도교 검암 최익환 묘비건립위원회
연암 김재중 제자.글
素水 厥菴 崔東曦 先生 誠賢堂 洪東嬅 女史 墓 (소수 궐암 최동희 선생 성현당 홍동화 여사 묘)

부인 홍동화 여사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홍병기 선생의 여동생 되신다.
소수 궐암 최동희 선생은 포덕31년 1월 14일 해월신사님과 손소사 사모님의 영식으로 태어나 일찍이 학업에 전념하셨으며 홍병기 선생의 누이인 성현당 홍동화(순영)여사와 결혼하신 후 일본으로 유학 조도전(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시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에 망명하여 63년에 고려혁명위원회를 창립 블라디보스톡에 거점을 두고 외교부장으로 상해파 고려공산당 영수 이동휘를 만나 천도교와의 독립운동연합 전선결성을 시도한 바 있으며 65년에는 중국 교포 교인 중심으로 천도교 최고 비상혁명위원회를 결성 외무위원장으로 레닌정부와 비밀정치군사협정을 제도한바도 있다. 67년 길림에서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여 당대표 자격으로 주중 소련대사 카라한을 비롯하여 임시정부 김규식 코민테른 동양책임비서 보이딘스키 국민당 장개석등과 순차적으로 면담을 통하여 독립운동의 지원을 요청하는 일련의 외교활동을 적극전개하시었으나 그 반응을 기대할 시일 여유도 없이 과로로 인한 신병 악화로 68년 1월 26일 38세를 일기로 불의에 환원 하시다. 이에 정부는 197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내리시다. 선생의 유해는 상해 불란서조계안에 안장되었는바 137년 9월에 손녀 인혜가 이장차 상해묘역을 찾아본 바 도시개발로 홍구공원에 집단 이장함이 확인되어 유해토 한 상자를 고국으로 모셔와 부인과 함께 이곳에 합장하다. 소수 선생 내외분의 성령이시여! 부디 후손들과 후학들의 심령속에 무궁토록 장생하시어 교회중흥과 통일조국의 광명을 비추어 주실지어다.
포덕 140년(1999) 11월 5일 천도교 소수 최동희 선생 묘비건립위원회
연암 김재중 제자.글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의 부인이시며 손병희 선생의 여동생이신 손시화 여사의 묘소이다.
海月神師 師母 孫時嬅 女史 墓
(해월신사 사모 손시화 여사 묘)
해월신사 모손 시화 여사는 포덕5년(1864) 8월 4일 충북청원군 북이면 대주리에서 부 손의조와 모 경주최씨 사이에서 출생하셨으니 의암성사의 여동생이시다. 여사께서는 25세에 해월신사와 결혼한 후 은도 생활 속에서 관헌의 지목과 모진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성경신을 다하여 스승님을 보필하신 내수도의 귀감이셨다. 동학혁명 시에는 옥천관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셨으며 전전하는 피난 생활 속에서도 자녀들의 슬기롭게 양육하여 장남 동의는 고려혁명당 당수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 순국하였고 차남 동호 역시 3.1독립운동에서 활약하시다가 순국하는 등 자제 두 분 모두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을 받으시다. 3.1운동 직후 천도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자 사모님께서는 사위 구암 김인국의 권유로 만년을 대전 신도안에서 은거하시다가 포덕 79년(1938) 3월 23일 향년 75세에 환원하시어 논산군 두마면 음사리에 안장하다 그 후 포덕 134년 5월 27일에 장손 익환 종법사가 할머님 유해를 이곳 해월신사 묘역으로 이장함으로써 사모님의 거룩한 유덕을 널리 모앙할 수 있는 전기가 된 것이다.
천사(天師)님 감응하옵소서 사모님의 성령이시여! 부디 후손들과 후학들의 심령속에 무궁토록 장재하시어 저희들의 앞날에 무궁한 번영과 광영있게 하옵소서.
포덕 141년 6월 일 종법사 연암 김재중 씀
해월신사 사모 묘비건립위원회 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