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봉산동 산3-1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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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 봉산동 산1011 민긍호의병장묘소를 찾았다. 하지만 네비게이터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는 주소이어서 많은 시간이 걸렸다.
봉산동 보문사로 찾아오면 쉽게 올 수 있다. 원주군 본부면 하동리(현재의 원주시 학성동)에 있던 묘를 1939년 원성군 흥업면 무실리(현재의 원주시 무실동)로 이장하였고,
1954년 5월 육군준장 권준이 다시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충혼탑을 묘 앞에 세웠다고 한다. 충혼탑 건립에 도움을 주신 분들의 직책과 이름이 나와있다.
충혼탑에 설명이 되어있는 1954년 당시 민긍호 의병장 충혼탑 앞에 지어진 “충렬정(忠烈亭)”은 없어진 것 같다.
그리고 충혼탑에 정일권 당시 참모총장의 글이 있다고 하여 충혼탑 철거논쟁이 있다고 한다.
정일권 참모총장이 친일파라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민긍호 의병장의 유적지는 명륜동 치악체육관 옆 민긍호 의병장 기념상과 횡성군 강림면 월현리 1245 월현소공원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전적비가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民族英雄義兵隊長 閔特務肯鎬之墓(민족영웅 의병대장 민특무긍호공지묘)
殺身成仁(살신성인), 精神不死(정신불사)
殺身成仁(살신성인), 精神不死(정신불사)
上東重石鑛業所 敬献(상동중석광업소 경헌)
민긍호 의병장의 또다른 유적지는 명륜동 치악체육관 옆 민긍호 의병장 기념상과 횡성군 강림면 월현리 1245 월현소공원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전적비가 있다.
사적으로 찾아갔던 경로 및 민의병장의 묘소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원주시 봉산동 산 1011 민긍호 의병장 묘소를 찾았다.
찾아가는 길이 어려워서, 탐방한다면 '봉산동 보문사'로 찾아오는 것이 더 쉬울 것 같다.
원주군 본부면 하동리(현재의 원주시 학성동)에 있던 묘를 1939년 원성군 흥업면 무실리(현재의 원주시 무실동)로 이장하였고, 1954년 5월 육군준장 권준이 다시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충혼탑을 묘 앞에 세웠다고 한다.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묘소(關東倡義大將 閔肯鎬 墓所) -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산 1011
민긍호 의병장의 본관은 여흥이며, 1865년(고종 2) 아버지 민치봉과 어머니 원주원씨의 외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민긍호 의병장은 인품이 강직하고 공사가 분명하여 부하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군대 통솔에 탁월하여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민긍호 의병장은 1897년 원주진위대 고성분견대에 입대하여 하사가 된 후 1900년에 정교로 진급되어 춘천분견대 소속이었다가 다시 1901년 특무정교로 발탁되어 원주진위대에서 근무하던 중, 일제가 원주진위대를 해산하려 하자 원주의 장날인 1907년 8월 5일 약 3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민긍호 의병장은 원주진위대의 무기고를 열어 1,600정의 소총과 탄약을 꺼내어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읍민들을 규합하여 1,000여 명의 병력으로 4개 부대를 편성한 뒤,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경찰을 습격하여 원주읍을 장악하였다. 그 뒤 의병부대를 많은 소단위의 의병부대로 재편성하여, 제천, 죽산, 장호원, 여주, 홍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여 용맹을 떨쳤다.
민긍호 의병장이 거느린 의병부대는 단위부대로서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전투력이 강했던 의병부대로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로 이동하면서 모두 10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1908년 2월 29일 일본군과 접전했을 때, 의병 20여 명이 사살되고 민긍호 의병장은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날밤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해 탈출하다가 사살되어 4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러한 민긍호 의병장의 활약은 일본에게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근대민족운동의 횃불이 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민긍호 의병장의 묘소는 원래 하평동(지금의 평원동)에 있었으나, 1939년 흥업면 무실리로 옮겨졌던 것을 1954년 5월 북부지구 경비사령관 권준 장군이 다시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민긍호 의병장의 본관은 여흥이며, 1865년(고종 2) 아버지 민치봉과 어머니 원주원씨의 외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민긍호 의병장은 인품이 강직하고 공사가 분명하여 부하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군대 통솔에 탁월하여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민긍호 의병장은 1897년 원주진위대 고성분견대에 입대하여 하사가 된 후 1900년에 정교로 진급되어 춘천분견대 소속이었다가 다시 1901년 특무정교로 발탁되어 원주진위대에서 근무하던 중, 일제가 원주진위대를 해산하려 하자 원주의 장날인 1907년 8월 5일 약 3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민긍호 의병장은 원주진위대의 무기고를 열어 1,600정의 소총과 탄약을 꺼내어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읍민들을 규합하여 1,000여 명의 병력으로 4개 부대를 편성한 뒤,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경찰을 습격하여 원주읍을 장악하였다. 그 뒤 의병부대를 많은 소단위의 의병부대로 재편성하여, 제천, 죽산, 장호원, 여주, 홍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여 용맹을 떨쳤다.
민긍호 의병장이 거느린 의병부대는 단위부대로서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전투력이 강했던 의병부대로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로 이동하면서 모두 10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1908년 2월 29일 일본군과 접전했을 때, 의병 20여 명이 사살되고 민긍호 의병장은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날밤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해 탈출하다가 사살되어 4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러한 민긍호 의병장의 활약은 일본에게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근대민족운동의 횃불이 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민긍호 의병장의 묘소는 원래 하평동(지금의 평원동)에 있었으나, 1939년 흥업면 무실리로 옮겨졌던 것을 1954년 5월 북부지구 경비사령관 권준 장군이 다시 이곳으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