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淸白傳家八百年(청백전가팔백년) : 청백리의 집안으로 팔백년을 이어왔다는 뜻이다.
백야 김좌진 장군이 남긴 애국시 斷腸之痛(단장지통)이다.
刀頭風動關山月(도두풍동관산월) : 적막한 달밤 칼머리에 바람은 찬데
劍末霜寒故國心(검말상한고국심) : 칼끝의 찬서리는 고국생각 돋는구나
三千槿域倭何事(삼천근역왜하사) :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일인고
不斷腥塵一掃尋(부단성진일소심) : 더러운 세상 한 칼로 쓸어 버릴길 없다
刀頭風動關山月(도두풍동관산월) : 적막한 달밤 칼머리에 바람은 찬데
劍末霜寒故國心(검말상한고국심) : 칼끝의 찬서리는 고국생각 돋는구나
三千槿域倭何事(삼천근역왜하사) :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일인고
不斷腥塵一掃尋(부단성진일소심) : 더러운 세상 한 칼로 쓸어 버릴길 없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 성역화기
대륙침략의 야심으로 매국노를 앞세워 합방조약을 강결하고 국권을 도취한 도이는 한반도를 거점으로 만주를 침공학고 천하무적의 위세를 자랑삼아 중국을 위협하던 일본군 3천여명의 가납연대가 공복의 염원을 품은 대한독립군이 일성에 중국 화룡현 청산리에서 섬멸하니 일제는 통곡하고 우방 속의 태극기 물결은 천지를 진동시켰다. 이는 독립전사상 초유의 대승이었고 이 항쟁을 지휘한 총사령관이 이곳에서 태어나신 백야 김좌진 장군이시다.
세전의 삼천석 재산을 분배하여 가노를 최소로 해방시키고 사재를 털어 창설한 호명학교에서 민족 개화교육에 힘쓰다 일제의 추격으로 망명한 장군은 국권 회복의 기치 아래 중국의 황야를 달리며 무력항쟁의 선두에서 총지휘하다. 공산당의 흉탄으로 1930년 음력 12월 25일 순국하시니 민족은 대성통곡하고 산천초목도 애도하였다.
삼엄한 왜적의 경계 속에 오숙근 여사의 조강열행으로 장군의 유해는 고국에 봉안되었지만 잡초 우거진 생가지에는 이슬에 젖은 표석만 외로이 서 있었다가 총 25억여 원의 사업비를 들여 6,837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1991년 3월부터 생가 복원을 시작으로 기념관, 사장, 부대공사 등 국민의 정성을 모아 마무리 하였다.
이 역사적인 유적 복원은 순국으로 나라를 구하신 장군의 위업을 기리고 그 애국정신을 본 받는 교육도장으로 영원한 사표가 되어 천추만대에 빛나리라.
1999년 12월 일 홍성군수 이상선 근술
대륙침략의 야심으로 매국노를 앞세워 합방조약을 강결하고 국권을 도취한 도이는 한반도를 거점으로 만주를 침공학고 천하무적의 위세를 자랑삼아 중국을 위협하던 일본군 3천여명의 가납연대가 공복의 염원을 품은 대한독립군이 일성에 중국 화룡현 청산리에서 섬멸하니 일제는 통곡하고 우방 속의 태극기 물결은 천지를 진동시켰다. 이는 독립전사상 초유의 대승이었고 이 항쟁을 지휘한 총사령관이 이곳에서 태어나신 백야 김좌진 장군이시다.
세전의 삼천석 재산을 분배하여 가노를 최소로 해방시키고 사재를 털어 창설한 호명학교에서 민족 개화교육에 힘쓰다 일제의 추격으로 망명한 장군은 국권 회복의 기치 아래 중국의 황야를 달리며 무력항쟁의 선두에서 총지휘하다. 공산당의 흉탄으로 1930년 음력 12월 25일 순국하시니 민족은 대성통곡하고 산천초목도 애도하였다.
삼엄한 왜적의 경계 속에 오숙근 여사의 조강열행으로 장군의 유해는 고국에 봉안되었지만 잡초 우거진 생가지에는 이슬에 젖은 표석만 외로이 서 있었다가 총 25억여 원의 사업비를 들여 6,837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1991년 3월부터 생가 복원을 시작으로 기념관, 사장, 부대공사 등 국민의 정성을 모아 마무리 하였다.
이 역사적인 유적 복원은 순국으로 나라를 구하신 장군의 위업을 기리고 그 애국정신을 본 받는 교육도장으로 영원한 사표가 되어 천추만대에 빛나리라.
1999년 12월 일 홍성군수 이상선 근술
白冶紀念館(백야기념관)
백야 김좌진 장군 흉상
백야 김좌진 장군
백야 김좌진 장군(1889-1930)
백야 김좌진 장군은 1889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1907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김좌진은 고향에서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육하였으며, 기호흥학회 지부를 조직, 활동하였다. 또한 1907년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1908년에는 노백린 등과 함께 신민회의 청년기구인 청년학우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김좌진은 이창양행(行)을 설립하고,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비밀 연락을 하기도 하였다.
1911년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1915년 박상진 등이 조직한 비밀조직인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 부사령이 된 김좌진은 당시 만주의 독립군 단체인 중광단으로부터 독립군을 양성하여 달라는 요청에 의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한 후 대종교에 가입하였으며, 3.1운동의 전주곡이 된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서 서명하기도 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서의 총사령관에 선임된 김좌진은 총재 서일을 보필하는 한편,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독립군 간부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1920년 10월에는 독립군 소탕을 명목으로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을 청산리 계곡에서 격파한 이른바 '청산리대첩' 을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하고, 그 곳에 모인 10여개의 독립군들을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김좌진은 김혁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고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에 선임되어 활동하며, 또한
1925년 10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으나,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위하여 취임을 사양하기도 하였다.
1927년 당시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등이 일제에 의해 체포되자 신민부를 재정비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28년 신민부·참의부·정의부 등 3부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9년 신민부와 정의부의 일부를 통합하여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에 취임한 김좌진은 독립운동의 전개와 동포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힘쓰다.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 암살되었다.
백야 김좌진 장군(1889-1930)
백야 김좌진 장군은 1889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1907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김좌진은 고향에서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육하였으며, 기호흥학회 지부를 조직, 활동하였다. 또한 1907년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1908년에는 노백린 등과 함께 신민회의 청년기구인 청년학우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김좌진은 이창양행(行)을 설립하고,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비밀 연락을 하기도 하였다.
1911년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1915년 박상진 등이 조직한 비밀조직인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 부사령이 된 김좌진은 당시 만주의 독립군 단체인 중광단으로부터 독립군을 양성하여 달라는 요청에 의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한 후 대종교에 가입하였으며, 3.1운동의 전주곡이 된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서 서명하기도 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서의 총사령관에 선임된 김좌진은 총재 서일을 보필하는 한편,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독립군 간부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1920년 10월에는 독립군 소탕을 명목으로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을 청산리 계곡에서 격파한 이른바 '청산리대첩' 을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하고, 그 곳에 모인 10여개의 독립군들을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김좌진은 김혁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고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에 선임되어 활동하며, 또한
1925년 10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으나,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위하여 취임을 사양하기도 하였다.
1927년 당시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등이 일제에 의해 체포되자 신민부를 재정비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28년 신민부·참의부·정의부 등 3부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9년 신민부와 정의부의 일부를 통합하여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에 취임한 김좌진은 독립운동의 전개와 동포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힘쓰다.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 암살되었다.
연보
1889.11.24(음)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
1902. 해주 오씨 오숙근과 결혼
1905. 가문의 노비 해방, 자신의 전답 무상 분배(16세)
1907. 호서지역을 널리 밝게한다는 뜻의 호명학교 설립, 신학문 전개(18세)
1908. 기호흥학회 장학재단 설립, 한성신문 이사 취임
1909년. 이창양행, 서북학회, 오성소학교 설립(20세)
1913. 일제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복역
1917. 대한광복단 조직, 단장 취임(28세)
1918. 안창호, 신채호, 백윤식, 김규식 등과 함께 대한독립선언문(무오독립선언서) 선포
1919. 북로군정서 사령관 겸 사관연성소(독립군 간부 양성소) 교장 취임(30세)
1920.10.21-26. 6일간 백운평, 천수평, 어랑촌 등 10여 차례 전투끝에 승리(청산리전투)(31세)
1921. 대한독립군단 결성(연합병력 3개 대대 3500여 명)
1922. 대한독립군단 재결성 및 총사령관 취임
1925. 신문부 창건(군사위원장, 사령관 겸임)(36세)
1929. 한족총연합회 주석 취임
1930.1.24. 일제 사주를 받은 조선공산당원 박상실에 의해 피살(41세)
1934.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
1957. 충남 보령군 청소면 재정리 이장
1962. 3.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1889.11.24(음)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
1902. 해주 오씨 오숙근과 결혼
1905. 가문의 노비 해방, 자신의 전답 무상 분배(16세)
1907. 호서지역을 널리 밝게한다는 뜻의 호명학교 설립, 신학문 전개(18세)
1908. 기호흥학회 장학재단 설립, 한성신문 이사 취임
1909년. 이창양행, 서북학회, 오성소학교 설립(20세)
1913. 일제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복역
1917. 대한광복단 조직, 단장 취임(28세)
1918. 안창호, 신채호, 백윤식, 김규식 등과 함께 대한독립선언문(무오독립선언서) 선포
1919. 북로군정서 사령관 겸 사관연성소(독립군 간부 양성소) 교장 취임(30세)
1920.10.21-26. 6일간 백운평, 천수평, 어랑촌 등 10여 차례 전투끝에 승리(청산리전투)(31세)
1921. 대한독립군단 결성(연합병력 3개 대대 3500여 명)
1922. 대한독립군단 재결성 및 총사령관 취임
1925. 신문부 창건(군사위원장, 사령관 겸임)(36세)
1929. 한족총연합회 주석 취임
1930.1.24. 일제 사주를 받은 조선공산당원 박상실에 의해 피살(41세)
1934.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
1957. 충남 보령군 청소면 재정리 이장
1962. 3.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김좌진 장군 생가지(金佐鎭 將軍 生家址)
지정별 : 기념물 제76호
지정년월일: 1989년 12월 29일
위치: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
규모: 1,861㎡
대한제국 말기의 독립운동가였던 백야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다. 장군은 1889년(고종 26년) 김형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총명하였다. 1907년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하였다.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등 민족의 자주독립에 앞장섰다. 1925년 김혁과 함께 신민부(新民部)를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1929년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주석에 올랐다. 1930년 1월 공산당 청년당원에게 암살 당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대대로 살아온 이곳에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본채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홍성군
지정별 : 기념물 제76호
지정년월일: 1989년 12월 29일
위치: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
규모: 1,861㎡
대한제국 말기의 독립운동가였던 백야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다. 장군은 1889년(고종 26년) 김형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총명하였다. 1907년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하였다.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등 민족의 자주독립에 앞장섰다. 1925년 김혁과 함께 신민부(新民部)를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1929년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주석에 올랐다. 1930년 1월 공산당 청년당원에게 암살 당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대대로 살아온 이곳에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본채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홍성군
단장지통(斷腸之痛)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 생각을 돋우는구나. 삼천리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쓸어버릴 길 없구나.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 생각을 돋우는구나. 삼천리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쓸어버릴 길 없구나.
白冶 金佐鎭 將軍 事蹟碑(백야 김좌진 장군 사적비)
국가대란에 충신열사는 입절사의하여 청사에 빛나는데 일적의 침략에 백야 김좌진 장군이 그러하다. 좌진은 장군의 휘, 자는 명녀, 호는 백야니 안동인으로 병자호란에 강화에서 순국하신 선원 김상용 선생의 11대손으로 고종 26년 을축 11월 24일에 홍성군 갈산 행산리에서 낳았다. 어려서부터 호방하고 기골이 웅위하고 의지탁월하며 취학함에 앙강부약이란 기치를 내걸고 일마를 익혀 비범한 바가 있었다. 15세에 가장이 되자 노적을 소각하고 재산을 노비에게 분급하니 이는 동방 최초의 노예해방이었고, 90여간의 거택으로 호명학교를 세우고 기호흥학회를 만들어 수재를 선발 유학케 하였다. 20세에 황성신문 사장과 경성고아원 총무가 되고 이창양행 염직회사를 경영하면서 국내외의 연락처로 이용하며 원근 동지를 규합하고 북간도에 사관학교를 설립코저 모금타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출옥 후 애국지사와 광복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으나 동지들이 체포 처형되자 장군은 부득이 만주로 망명하였다. 무오년에는 재만 독립운동자 39인이 독립선언서를 선포하였는데 이는 기미선언보다도 1년 앞선 것이었고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옥청서대파에 사관연성소를 설립 400명의 사관과 1개 연대의 보병을 양성하여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경신 10월에 시베리아로 향하는 3천 병력의 일본 가납연대를 화룡 청산리에서 유인하여 연대장 이하 천수백명을 사살하고 천여명을 전상케하는 한편 작전의 묘로 운무 중에 적군끼리 싸우게 하여 막대한 사상을 내게 하는 대승리를 걷우어 독립전역상 최대전적을 세웠다. 이후로 군소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작성한 뒤 사령관 부장 등 직을 역임 만주와 노령을 왕래하면서 활약하였고 그후 기사년엔 군무소 독변 겸 북만군정서 총사령과 한족총연합회 주석을 역임하면서 재만동포의 민생과 교육문제에 힘쓰는 한편 중국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도모하였다. 이러던 차에 뜻하지 않게 경오 1월 26일에 고려공산청년당원의 흉탄에 일세의 애국투사가 이역만리에서 서거하였다. 아아 이 무슨 어처구니 없는 짓인가. 명인이 온겨레의 가슴을 울리고 말았다. 그러나 장군이 가신 뒤 유해는 고국산천의 선영하에 안장되었고 그 유지를 받들이서 온국민의 독립의지와 항일투쟁이 날로 높아가서 마침내 일적을 물리치고 광복을 이룩하였고 뿐만 아니라 임인 3월 1일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고, 계해년엔 1억여원을 들여 높이 30척이나 되는 웅장한 동상을 세웠으니 지하에 계신 장군의 혼이 어찌 통쾌하지 않으시겠는가. 장군의 생애는 비록 불운하고 짧았으나 장군의 영혼은 평안하고 영원할 것이니 어찌 다행치 않겠는가. 이제 그 업적을 약술하여 단갈에 새기거니와 장군의 위업이 어찌 졸문으로 제민하겠는가. 다만 유적지에 표식하여 후인의 관감지자로 삼고저 할 뿐이다.
대한민국 광복 후 42년 1월 일
충남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한양 조종업 근식
속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김충현 근서
국가대란에 충신열사는 입절사의하여 청사에 빛나는데 일적의 침략에 백야 김좌진 장군이 그러하다. 좌진은 장군의 휘, 자는 명녀, 호는 백야니 안동인으로 병자호란에 강화에서 순국하신 선원 김상용 선생의 11대손으로 고종 26년 을축 11월 24일에 홍성군 갈산 행산리에서 낳았다. 어려서부터 호방하고 기골이 웅위하고 의지탁월하며 취학함에 앙강부약이란 기치를 내걸고 일마를 익혀 비범한 바가 있었다. 15세에 가장이 되자 노적을 소각하고 재산을 노비에게 분급하니 이는 동방 최초의 노예해방이었고, 90여간의 거택으로 호명학교를 세우고 기호흥학회를 만들어 수재를 선발 유학케 하였다. 20세에 황성신문 사장과 경성고아원 총무가 되고 이창양행 염직회사를 경영하면서 국내외의 연락처로 이용하며 원근 동지를 규합하고 북간도에 사관학교를 설립코저 모금타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출옥 후 애국지사와 광복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으나 동지들이 체포 처형되자 장군은 부득이 만주로 망명하였다. 무오년에는 재만 독립운동자 39인이 독립선언서를 선포하였는데 이는 기미선언보다도 1년 앞선 것이었고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옥청서대파에 사관연성소를 설립 400명의 사관과 1개 연대의 보병을 양성하여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경신 10월에 시베리아로 향하는 3천 병력의 일본 가납연대를 화룡 청산리에서 유인하여 연대장 이하 천수백명을 사살하고 천여명을 전상케하는 한편 작전의 묘로 운무 중에 적군끼리 싸우게 하여 막대한 사상을 내게 하는 대승리를 걷우어 독립전역상 최대전적을 세웠다. 이후로 군소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작성한 뒤 사령관 부장 등 직을 역임 만주와 노령을 왕래하면서 활약하였고 그후 기사년엔 군무소 독변 겸 북만군정서 총사령과 한족총연합회 주석을 역임하면서 재만동포의 민생과 교육문제에 힘쓰는 한편 중국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도모하였다. 이러던 차에 뜻하지 않게 경오 1월 26일에 고려공산청년당원의 흉탄에 일세의 애국투사가 이역만리에서 서거하였다. 아아 이 무슨 어처구니 없는 짓인가. 명인이 온겨레의 가슴을 울리고 말았다. 그러나 장군이 가신 뒤 유해는 고국산천의 선영하에 안장되었고 그 유지를 받들이서 온국민의 독립의지와 항일투쟁이 날로 높아가서 마침내 일적을 물리치고 광복을 이룩하였고 뿐만 아니라 임인 3월 1일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고, 계해년엔 1억여원을 들여 높이 30척이나 되는 웅장한 동상을 세웠으니 지하에 계신 장군의 혼이 어찌 통쾌하지 않으시겠는가. 장군의 생애는 비록 불운하고 짧았으나 장군의 영혼은 평안하고 영원할 것이니 어찌 다행치 않겠는가. 이제 그 업적을 약술하여 단갈에 새기거니와 장군의 위업이 어찌 졸문으로 제민하겠는가. 다만 유적지에 표식하여 후인의 관감지자로 삼고저 할 뿐이다.
대한민국 광복 후 42년 1월 일
충남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한양 조종업 근식
속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김충현 근서
湖明精舍(호명정사)
白冶 金佐鎭 將軍 生家 遺址(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 유지)
장군은 서기 1890년 안동후인 김형규의 2자로 이곳에서 태어나셨다. 자는 명녀요 호는 백야로 소시부터 항일운동을 하셨으며 기미독립운동 시 도만하여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청산리전투에서 일군 대대를 전멸시킨 것을 비롯하여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셨으나 조국광복을 다 하지 못하고 서기 1930년 41세의 장년으로 자객에게 피살되다.
출생지명 : 홍주군 고남면 향촌리
묘지 보령군 청소면 재정리 능동 후록
출생지명 : 홍주군 고남면 향촌리
묘지 보령군 청소면 재정리 능동 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