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욱 집(윤동주 유고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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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845-78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제는 조선인 청년 학도들까지 전쟁터로 내몰았다. 연희전문 졸업을 앞둔 채 정병욱은 1944년 1월 일본군에 끌려가게 되자 광양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유고 보존을 부탁한다.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 달라고 유언처럼 남겨 놓고 떠났었다. 다행히 묵숨을 보존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님은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던 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럽게 내주시면서 기뻐하셨다.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있고 자랑스런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 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것이다'

-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형' 중에서 -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이 건물은 윤동주 시인이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가 온전히 보존되었던 곳이다. 윤동주(1917~1945)는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여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 원고를 그의 친우인 정병욱(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1922~1982)에게 맡겨 이곳에 보관하여 어렵게 보존되다가 광복 후 1948년에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집은 정병욱의 부친이 건립한 건물로, 양조장과 주택을 겸용한 건축물이다.
저 나무 마루 밑에 원고를 보관하고, 그 위에 다른 물건으로 덮어서 은닉했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은 애국지사 윤동주 선생의 원고를 해방 후까지 보관하여 출판이 가능토록 한 곳이라고 한다.
가옥의 내력과 정병욱 부모 이야기

남도 선비가 짊어진 시대의 질곡과 겨레의 염원 1925년 점포형 주택으로 지어진 이 가옥은 정병욱 선생 일가가 터를 잡은 것은 1930년 무렵, 부친 남파 정남섭선생 때 일이다. 남파 선생은 일찍이 고향 남해군에서 20세의 나이로 원로 유림들과 함께 3.1독립만세운동을 창도하여('남해3.1운동발상기념탑'에 기록) 일제 경찰에 쫓기는 처지가 되자, 주위의 강권에 의해 사범교육 과정을 밟는 조건으로 당시의 혹심한 옥고를 면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선생은 1922년 경상남도교원양성소(뒷날의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거제와 하동에서 일시 교편을 잡기도 하였으나, 일제 치하에서 마음 편한 교직이 아니었으므로 몇 해 후 사직하고 가산을 기울여 광양의 이 가옥에서 양조 등의 사업을 하게 된다. 지역의 명망을 얻은 선각자로서 광복 후 미군정 시기에 이곳에서 진월면장(1946~48)을 역임하기도 하였던 선생은, 일제의 징병에 끌려가게 된 큰아들의 소원에 따라 부인 밀양박씨 아지 님(정병욱선생 모친)과 함께 위협을 무릅쓰고 윤동주의 시고를 이곳에 보존하여 후대에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넘겨줄 수 있게 한 숨은 공로자이다. 북간도 개척민의 후손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한 시가 일제의 탄압 속에 햇빛도 보지 못한채 남도 선비 집안의 가옥에서 지켜지다가 해방 후 햇빛고을 광양가옥에서 소생하게 된 것은 모진 세월을 견딘 겨레의 시련과 염원이 조국 강산 남북 어디서나 한결같았음을 보여준다.
아호로 삼은 벗의 시구

"이 시는 일제 말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의 전문이다. 1942년 봄, 그가 적지의 수도 동경에 건너가서 처음 쓴 작품이다. 여기 나오는 '흰 그림자'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겨레를 상징한 말이다. '흰옷'을 입은 사람의 그림자들, 즉 '백의민족'의 환상을 시인 윤동주는 언제나 연연히 사랑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아호를 다른 것으로 바꾸기로 작정했는데 신통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중 우연히 동주의 시 제목인 '흰 그림자'가 생각이 났다. 조국과 겨레는 동주만의 사랑이 아니라 내게도 애인이었고 동주를 잊지 않으려는 욕심도 곁들여서 '흰 그림자'라는 우리말을 한자말인 '백영(白影)'으로 써 본것이다."

- 정병욱, 나의 아호 백영(白影)'
보이지 않던 별들을 찾아내 그 빛을 우리에게 주신 고마운 분들이 있다. 백영 정병욱선생께서 윤동주 시인의 유고를 몰래 가슴에 품어 지켜오지 않았더라면 어띠 이 아름다운 시와 영혼을 만날 수 있었겠는가. 적토의 땅을 일구어 국문학의 텃밭을 만드시고 어제와 오늘을 잇는 다리를 놓아주시니 그 학문의 덕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하지만 스스로 그 공적을 숨기시어 적적하더니 이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것이다. 다만 잊지말자. 선생과 윤동주 시인의 우정이, 문학정신이 바로 이곳 마루 빝에 숨겨져 있었던 지난날들을. 그리고 그 불멸의 두 영혼을 세상에 널리 전할지어다.

- 이어령, 문학평론가. 초대 문화부 장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