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연교리 34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성암사(聖巖祠)
연재 선생 문집 장판각
연재 송병선 선생 문집 책판(淵齋 宋秉璇 先生 文集 冊板)
연재 송병선(宋秉璇, 1836~1905)의 문집은 1906년에 자제와 제자들에 의해 편집.간행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그때 제작한 목판 1942매가 보관되어 있다. 문집에는 왕도정치의 근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글과 유학의 부흥을 통한 시정개혁을 강조하는 글이 많이 실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의 문집은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도학을바로 세워 성리학의 정통을 이은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은 일찍이 학행으로 고종의 스승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직에는 별 뜻이 없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양한 채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서울에 올라가 시정 개혁과 일본에 대한 경계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향으로 강제 압송되었다. 선생은 그 울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연재 송병선(宋秉璇, 1836~1905)의 문집은 1906년에 자제와 제자들에 의해 편집.간행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그때 제작한 목판 1942매가 보관되어 있다. 문집에는 왕도정치의 근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글과 유학의 부흥을 통한 시정개혁을 강조하는 글이 많이 실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의 문집은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도학을바로 세워 성리학의 정통을 이은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은 일찍이 학행으로 고종의 스승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직에는 별 뜻이 없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양한 채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서울에 올라가 시정 개혁과 일본에 대한 경계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향으로 강제 압송되었다. 선생은 그 울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