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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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624
탐방로그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624에 위치한 여운형 생가 기념관인 몽양기념관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의 삶과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2011년 11월 27일 개관한 기념관이다. 함양 여씨가 양평에 입향한 1715년(숙종 41년) 지어진 생가는 여운형(1885 - 1947)이 1886년 출생해서 부친 탈상을 끝낸 뒤 서울로 이사 간 1908년까지 살았던 곳으로, 6·25전쟁 중에 소실되었으나 2001년 양평 군민들의 노력으로 생가터가 정비되고 이듬해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여운형 선생의 서거 64주년인 2011년에 생가가 복원되면서 함께 건립된 기념관은 서거 당시 입고 있던 혈의, 장례식에 사용된 만장 및 유품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3.1운동 발단의 중심

1918년 여운형은 상하이에서 서병호, 조동호, 장덕수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고 김규식을 초청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김규식의 독립청원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셔 그는 장덕수를 일본에 보내 일본 유학생들에게 김규식의 파리강화희의 참석을 알리게 하고, 기타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국내 각처로 보내 이 사실을 구내 요로에 알리도록 했다. 그 무렵 북경에 있던 이광수는 이 소식을 가지고 동경에 돌아가 2.8독립선언을 기초하기로 했다.
그리고 양양 자신은 중국 길림성으로 가서 활동하여 무오독립선언의 촉매 역할을 했다. 간도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약연, 정재면등과 만나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원칙등 상황을 설명하였고, 연해주에 가서는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박은식, 이동녕, 조완구등을 만나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 여운형이 연해주에 가서 한 달가량 머물렀던 것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대표가 파리강화희의에 가서 독립을 청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만주,연해주에 있던 교포들, 일본에 있던 유학생등, 그리고 국내 지도층에 알려지면서 거족적인 3.1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3.1운동의 막후 지도자는 모양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점은 역으로 그해 말 일본정주가 그를 동경에 초청했던 일로써 간접 증명된다. 3.1운동후 몽양의 측근이었던 장덕수를 체포한 총독부 경찰은 장덕수를 통해 3.1운동의 배후가 몽양이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일본 정부가 당년 34세의 젊은이에 지나지 않았던 몽양을 동경에 불러들인 까닭이 바로 거기 있었다. 그들은 3.1운동의 막후 연출자인 몽양을 회유하여 독립운동보다는 자치운동을 권유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1919년 9월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624에 위치한 몽양기념관을 찾았다.
유년시절

몽양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음력 4월 22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마을에서 여정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이씨가 치마폭에 태양을 받는 태몽을 꾸었다 하여 훗날 몽양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몸은 타고날 때부터 강건한 편이어서 어머니가 위급할 때는 고향인 묘골에서 약 40km나 되는 서울 광교까지 단숨에 달려갔다가 한약을 지어 당일로 되돌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남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강직함을 지녔지만 남의 사정을 깊이 헤아릴 줄도, 베풀 줄도 아는 너그러움도 있었다.
광동학교설립

여운형은 시국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없이 '의(義)' 하나만으로 희병활동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臨河羨魚不如退而結網(임연선어불여퇴이결망), 연못에서 고기를 탐내는 것은 물러가서 그물을 뜨는 것만 같지 못하다)'이라는 옛말을 좇아 청년들을 계몽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사랑방에 인근 청년들을 모아놓고 지리, 역사, 산술 등 이른바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907년 고향 마을에 광동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교과목은 위에 언급한 과목 외에 수신 이과 성경을 추가했다. 일요일에는 서울로 나가 예배도 보고 승동예배당 선교사 클라크 목사의 설교도 들었다.
동대문 밖에는, 광동학교가 근대적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한 최초의 학교였다.
국채보상운동

1904년의 고문정치 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다.
여기에 대항하고자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자 몽양은 1907년 고향인 양평에서 국채보상 단연동맹지회를 설립하고, 매일 장터를 찾아다니며 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자는 계몽강연을 하였다. 자신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해 술과 담배를 딱 끟었다고 한다. 조선이 독립이되기 전에는 절대로 입에 안대겠다는 결심을 한 그날 이후 몽양이 술을 마시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친지들이 이제는 몽양에게 술과 담배를 하라고 권했지만 몽양은 나라가 통일이 된 다음에야 피우고 마시겠다며 거절하였다.
노비해방

아버지 3년 상을 치르고 1908년 음력 3월, 여운형은 가풍에 일대 혁신을 단행하여 자신의 상투를 자르고 집안의 신주단지를 깨뜨렸다. 또 갑오개혁(1894~1896) 당시 중요 개혁 사항 중 하나인 노배해방을 실천하는 등 그때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노비 해방은 평등사상의 본을 보인 일이었다.
'그대들을 다 해방하노라. 지금부터 각기 자유롭게 행동하라. 이제부터는 상전도 없고 종도 없다. 그러므로 서방님이니, 아씨니 하는 호칭부터 싹 없애라. 오직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니, 주종의 예는 어제까지의 풍습이요, 오늘부터는 그런 구습을 탈파하고, 제각기 알맞은 직업을 찾아가라'
나아가 몽양은 조상의 제사도 그만두게 했다. 이는 기독교 사상의 박애평등과 인간주의를 실현한 것이다.
기독교 활동

여운형이 배재학당에서 처음 서양 문물을 접했을 때, 우리나라가 뒤떨어졌음을 알고, 구국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것을 깨닫고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기독교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다닐때에는 일부러 예배를 빠지기도 했던 그가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장로교의 클라크 선교사가 그의 고향에 예배당을 세우러 왔을 때이다. 그곳 지주였던 몽양은 클라크 선교사와 접촉하면서 만인평등의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무렵 아버지까지 열병에 걸려 돌아가시자 가장이 된 그는 부친상을 끝낸 뒤 개신교에 입교하고 본격적으로 신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