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금성리 56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조선만세(朝鮮萬歲)
조선지광(朝鮮之光)
: 조선은 광복한다
: 조선은 광복한다
일본국도마케(日本局度マケ)
: 일본이 졌다
: 일본이 졌다
조선일본별국(朝鮮日本別國)
: 조선과 일본은 다른 나라다
: 조선과 일본은 다른 나라다
15세 소년 항일운동가 주재년 朱在年 (1929.1.29~1944.8) 열사는
1929년 1월 29일 여수군 돌산읍 금성리 작금마을 주순지(朱順之)님의 3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서당에서 주상규 훈장으로부터 천자문 한글 일본어를 배웠다. 1939년 4월 1일 돌산국민학교 입학검정시험에 합격 3학년에 편입하여 3,4학년 모두 우등상을 받았다. 5,6학년때도 공부 잘했고 개근상도 타면서 1943년 3월 25일 돌산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성격이 명랑하고 활달하며 운동을 좋아하고 힘도 세고 담도 컸다고 한다.
광주학생운동의 주모자로 징역을 살고 나온 노병주 어른의 후배로부터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를 가진 문명국인데 일본이 무력으로 합병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의병들이 일어났고 기미년에 독립운동도 했으나 일본이 무참하게 진압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징역도 살았다. 중국 상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식민지 현실에 민족적 의분을 느꼈다.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여러 해를 끌자 밥그릇 국그릇 수저까지 공출해가면서 학생들은 송진을 따오게 하고 청년들은 강제 징용되어 군대나 탄광으로 끌려갔다.
여수 신월리에는 비행장을, 돌산 임포에는 해안포 진지를 만든다고 남의 땅을 강제로 수용하고 처녀들도 잡아가버려 세상인심이 뒤숭숭하던 어느 날, 둘째형의 병을 치료해주던 송낙섭(38세)으로부터 일본이 기습공격으로 전쟁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미국과 영국의 영토를 점령했으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은 국토가 작고 물자도 없어 고전하고 있다. 점령지역에 물자를 산처럼 쌓아 놓고도 길목을 지키는 미국과 영국의 잠수함 때문에 운반할 수 없어 군수품이 바닥나면 일본은 패망할 것이고 조선은 미국과 영국 덕으로 해방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해 9월 초순에는 일본 대만 연락선 아마또마루가 격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9월 23일 오후 3시부터 땔감을 구하러 날마다 율림리 산으로 가고 오던 목화밭 돌담 옆의 바위 4개에 각각 朝鮮日本別國(조선일본별국, 조선과 일본은 다른 나라다.), "日本局度マケ(일본국도졌다), "朝鮮萬歲(조선만세), 朝鮮之光(조선지광, 조선은 광복한다) 스무자를 정성을 다해 새겨놓았다.
뒤늦게 알게 된 일본경찰 100여명과 경비정 7~8척이 몰려와 경적과 호각을 불며 밤낮 사흘동안 온 동네를 뒤져도 돌에 글을 새긴 사람을 잡지 못하자 주민들을 모아 놓고 마을마다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고 다녔다. 주열사는 마을에 피해가 주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순사부장 어디있소 내가 했소 하면서 늠름하게 나타났다. 쥐새끼 같은 조선 놈의 새끼 누구한테 들었어, 누가 시켰어? 다그치고 얻어맞고 물고문에 전기고문 거꾸로 매달려도 하느님이 남방과 중국 인도지나에서 일본이 지고 있는 광경과 우리나라의 미래를 나에게 확실히 보여주었다. 나는 꿈에 본대로 돌에 새겼을 뿐이라고 시종일관 굽히지 않았다.
밖에서도 일본경찰들은 동조자를 찾기 위해 가족 친지나 마을 사람들을 못살게 괴롭혔다. 주열사가 감옥에서 당한 모진 고문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자 구금 117일째 되는 1944년 1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4월 8일 열여섯 어린 나이에 꿈에 그리던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다'는 유언을 남기고 승천하였다.
열사의 유해는 의분을 품고 거사를 했던 목화밭 근처에 안장되었다. 우리가 특별히 눈여겨 새겨 볼 글은 日本國(일본국)도라 쓰지 않고 日本局度マケ·일본국도 졌다. 일본은 나라가 아닌 局(국)으로 비하시켰다.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한 때라 度(도)는 우리말 토씨 도다. 동양 3국의 말로 표현한 주재년 열사의 천재성과 통찰력, 불타는 애국심을 엿 볼 수 있다.
정부는 여수시가 신청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심사하여 2006년에 열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준영 전라남도지사와 여수시장은 주재년 열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귀감으로 삼기위해 열사가 나고 자란 집터에 기념관을 건립하여 돌산지역 출신으로 독립유공자 훈,포장을 받으신 세분과 함께 선양합니다.
1929년 1월 29일 여수군 돌산읍 금성리 작금마을 주순지(朱順之)님의 3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서당에서 주상규 훈장으로부터 천자문 한글 일본어를 배웠다. 1939년 4월 1일 돌산국민학교 입학검정시험에 합격 3학년에 편입하여 3,4학년 모두 우등상을 받았다. 5,6학년때도 공부 잘했고 개근상도 타면서 1943년 3월 25일 돌산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성격이 명랑하고 활달하며 운동을 좋아하고 힘도 세고 담도 컸다고 한다.
광주학생운동의 주모자로 징역을 살고 나온 노병주 어른의 후배로부터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를 가진 문명국인데 일본이 무력으로 합병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의병들이 일어났고 기미년에 독립운동도 했으나 일본이 무참하게 진압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징역도 살았다. 중국 상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식민지 현실에 민족적 의분을 느꼈다.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여러 해를 끌자 밥그릇 국그릇 수저까지 공출해가면서 학생들은 송진을 따오게 하고 청년들은 강제 징용되어 군대나 탄광으로 끌려갔다.
여수 신월리에는 비행장을, 돌산 임포에는 해안포 진지를 만든다고 남의 땅을 강제로 수용하고 처녀들도 잡아가버려 세상인심이 뒤숭숭하던 어느 날, 둘째형의 병을 치료해주던 송낙섭(38세)으로부터 일본이 기습공격으로 전쟁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미국과 영국의 영토를 점령했으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은 국토가 작고 물자도 없어 고전하고 있다. 점령지역에 물자를 산처럼 쌓아 놓고도 길목을 지키는 미국과 영국의 잠수함 때문에 운반할 수 없어 군수품이 바닥나면 일본은 패망할 것이고 조선은 미국과 영국 덕으로 해방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해 9월 초순에는 일본 대만 연락선 아마또마루가 격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9월 23일 오후 3시부터 땔감을 구하러 날마다 율림리 산으로 가고 오던 목화밭 돌담 옆의 바위 4개에 각각 朝鮮日本別國(조선일본별국, 조선과 일본은 다른 나라다.), "日本局度マケ(일본국도졌다), "朝鮮萬歲(조선만세), 朝鮮之光(조선지광, 조선은 광복한다) 스무자를 정성을 다해 새겨놓았다.
뒤늦게 알게 된 일본경찰 100여명과 경비정 7~8척이 몰려와 경적과 호각을 불며 밤낮 사흘동안 온 동네를 뒤져도 돌에 글을 새긴 사람을 잡지 못하자 주민들을 모아 놓고 마을마다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고 다녔다. 주열사는 마을에 피해가 주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순사부장 어디있소 내가 했소 하면서 늠름하게 나타났다. 쥐새끼 같은 조선 놈의 새끼 누구한테 들었어, 누가 시켰어? 다그치고 얻어맞고 물고문에 전기고문 거꾸로 매달려도 하느님이 남방과 중국 인도지나에서 일본이 지고 있는 광경과 우리나라의 미래를 나에게 확실히 보여주었다. 나는 꿈에 본대로 돌에 새겼을 뿐이라고 시종일관 굽히지 않았다.
밖에서도 일본경찰들은 동조자를 찾기 위해 가족 친지나 마을 사람들을 못살게 괴롭혔다. 주열사가 감옥에서 당한 모진 고문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자 구금 117일째 되는 1944년 1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4월 8일 열여섯 어린 나이에 꿈에 그리던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다'는 유언을 남기고 승천하였다.
열사의 유해는 의분을 품고 거사를 했던 목화밭 근처에 안장되었다. 우리가 특별히 눈여겨 새겨 볼 글은 日本國(일본국)도라 쓰지 않고 日本局度マケ·일본국도 졌다. 일본은 나라가 아닌 局(국)으로 비하시켰다.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한 때라 度(도)는 우리말 토씨 도다. 동양 3국의 말로 표현한 주재년 열사의 천재성과 통찰력, 불타는 애국심을 엿 볼 수 있다.
정부는 여수시가 신청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심사하여 2006년에 열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준영 전라남도지사와 여수시장은 주재년 열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귀감으로 삼기위해 열사가 나고 자란 집터에 기념관을 건립하여 돌산지역 출신으로 독립유공자 훈,포장을 받으신 세분과 함께 선양합니다.
돌산지역 항일운동사
여수시 돌산지역은 예로부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용감하게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웠던 의로운 고장이다. 삼국시대부터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본산산성 등 여러 곳에 산성과 봉수를 축조하여 방어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종3품 방답진(防踏鎭)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라남도 수군절도사(약칭: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동명이인이신 이순신(李純信) 첨사가계셨다. 이충무공의 뜻에 따라 방답구선(防踏龜船)이란 거북선도 만들었다. 이순신 첨사가 지휘한 방답진 장졸들은 1592년 임진년 음력으로 5월 3일 밤 썰물을 타고 경상도로 출전하여 5월 7일 옥포해전, 합포해전, 5월 8일 적진포해전에서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2차 출전 때 처음으로 거북선을 앞세워 5월 29일 사천해전, 6월 2일 당포해전, 6월 8일 한산대첩, 7월 10일 안골포해전에서 대승하고 개선하였다. 1593 계사년 2월 10, 12, 18, 22. 3월 6일 장문포해전에서 승리하고 개선하였다. 일본의 작전은 육군이 전광석화같이 점령해가면 수군은 서해바다로 진출하여 한강과 대동강에서 육군에 보급품을 주어 조선과 명나라를 없애려는 계획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왜적의 기세와 야욕을 초반부터 여지없이 꺾어버렸다.
본영 여수에서 전쟁터였던 경상도까지 노를 젓고 가고오기에 군사들이 너무 힘들어 태풍이 불어도 안전한 팔풍대석 한산도에 6월 21일 행영(行營)을 설치하여 수송선만 여수와 한산도를 오고가니 너무 좋았다더라(일본강점기에 한려수도(閑麗水道)는 승리의 바닷길로 은연중에 민족혼을 살리려고 조선8경 중에 포함시킴) 8월 30일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 겸 초대 충청 전라 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除授)받았다. 8월 29일~9월 1일 웅천해전, 1594 갑오년 9월 29일 부산포해전, 10월 1일 영등포해전도 승리하였다.
1597 정유년 1월 27일 일본의 계략에 속아 이순신 장군을 삭탈관직 투옥시키고 원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죽게 된 것을 확인한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7월 15~16일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은 참패, 전멸하고 원균 통제사도 전사하였다. 백의종군길에서 7월 22일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하여 9월 16일 불과 13척으로 명랑대첩, 1598 무술년 9월 20~10월 8일 순천왜교성전투(7년 전쟁 중에 조·명·일 3국의 육군과 수군 5만 1천여 명이 함께 싸운 유일한 전투) 중 11월 18일 밤, 왜교성에 있는 소서행장을 朝(조)·明(명) 연합함대 1만 5천명과 함선들이 장도 송도 묘도바다에 변함없이 포위하고 있는 것처럼 속이고, 야음을 틈타 빠져나왔다.
한편 조·명 연합함대에 포위된 소서행장을 구하여 함께 귀국하기 위해 고성에서 남해 노량 앞바다로 급히 달려오던 도진의홍(島津義弘)의 1만 2천여 명(오백여척)과 11월 19일 새벽부터 벌어진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셨고, 임진·정유 7년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우리 수군과 명나라 진린(陳隣) 도독 휘하의 장졸들은 장군의 유해를 고금도에 모셨다가 아산으로 이장하였다. 숨 가쁜 전장터인 남해 노량 동산에 처음 묘를 썼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방답진(돌산) 군사들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전라좌수영 수군의 선봉으로 용감하게 싸워 크게 이겼다. 돌산에서는 전쟁물자 조달을 위하여 남녀노소 밤낮없이 바빴다. 이순신 장군이 경상도에서 피란 온 사람들을 구제하고 군량미 확보를 위하여 둔전을 설치하여 농사를 짓고 살게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 이순신(李純信) 첨사는 34대 전라좌수사도 하셨다.
이런 조상들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아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는 수많은 의병과 항일운동가를 배출한 충효의 고장이다. 여수읍에 사는 김백평 선생은 3.1운동 때 경기중학교 대표로 활약했다. 화양면 윤형숙 열사가 광주서 만세운동하다 왼팔이 잘렸다. 광주학생운동 지도자 노병주 선생과 독서회사건 등등 여수와 돌산의 젊은이들이 식민지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운동을 공유하며 활동한 분들이 많았다. 돌산 출신으로 노병주, 오우홍, 김인식 선생과 15세 소년항일운동가 주재년 열사가 독립유공자로 훈,포장을 받았다.
근세 돌산읍의 역사는
이성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우자 여수현감 오흔인이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 태조 5년에 함락되면서 여수와 함께 폐현되었다. 1896년 2월 3일 돌산군이 복군(復郡)되어 군내리에 돌산군청이 자리 잡았다. 여수군은 1897년 5월 16일에 복군되었다. 일본제국에 강점당한 1914년 3월 1일 여수군과 돌산군이 통합되어 여수군 두남면(斗南面)이 되었다가 1917년에 돌산면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8월 15일 여수군 여수읍이 여수시가 되고 나머지 9개 면(面)들은 여천군으로 편입되어 여천군 돌산면이 되었다가 1980년 12월 1일 돌산읍으로 승격되었다.
여수세계박람회를 개최하여 국제해양관광레저스포츠수도를 만들자고 1997년 9월 9일 전국 최초로 주민발의에 의한 3여(여수시 여천시 여천군) 통합운동이 성공하여 1998년 4월 1일 전남 제1도시가 되고 통합 여수시 돌산읍으로 되었다.
여수시 돌산지역은 예로부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용감하게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웠던 의로운 고장이다. 삼국시대부터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본산산성 등 여러 곳에 산성과 봉수를 축조하여 방어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종3품 방답진(防踏鎭)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라남도 수군절도사(약칭: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동명이인이신 이순신(李純信) 첨사가계셨다. 이충무공의 뜻에 따라 방답구선(防踏龜船)이란 거북선도 만들었다. 이순신 첨사가 지휘한 방답진 장졸들은 1592년 임진년 음력으로 5월 3일 밤 썰물을 타고 경상도로 출전하여 5월 7일 옥포해전, 합포해전, 5월 8일 적진포해전에서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2차 출전 때 처음으로 거북선을 앞세워 5월 29일 사천해전, 6월 2일 당포해전, 6월 8일 한산대첩, 7월 10일 안골포해전에서 대승하고 개선하였다. 1593 계사년 2월 10, 12, 18, 22. 3월 6일 장문포해전에서 승리하고 개선하였다. 일본의 작전은 육군이 전광석화같이 점령해가면 수군은 서해바다로 진출하여 한강과 대동강에서 육군에 보급품을 주어 조선과 명나라를 없애려는 계획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왜적의 기세와 야욕을 초반부터 여지없이 꺾어버렸다.
본영 여수에서 전쟁터였던 경상도까지 노를 젓고 가고오기에 군사들이 너무 힘들어 태풍이 불어도 안전한 팔풍대석 한산도에 6월 21일 행영(行營)을 설치하여 수송선만 여수와 한산도를 오고가니 너무 좋았다더라(일본강점기에 한려수도(閑麗水道)는 승리의 바닷길로 은연중에 민족혼을 살리려고 조선8경 중에 포함시킴) 8월 30일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 겸 초대 충청 전라 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除授)받았다. 8월 29일~9월 1일 웅천해전, 1594 갑오년 9월 29일 부산포해전, 10월 1일 영등포해전도 승리하였다.
1597 정유년 1월 27일 일본의 계략에 속아 이순신 장군을 삭탈관직 투옥시키고 원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죽게 된 것을 확인한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7월 15~16일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은 참패, 전멸하고 원균 통제사도 전사하였다. 백의종군길에서 7월 22일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하여 9월 16일 불과 13척으로 명랑대첩, 1598 무술년 9월 20~10월 8일 순천왜교성전투(7년 전쟁 중에 조·명·일 3국의 육군과 수군 5만 1천여 명이 함께 싸운 유일한 전투) 중 11월 18일 밤, 왜교성에 있는 소서행장을 朝(조)·明(명) 연합함대 1만 5천명과 함선들이 장도 송도 묘도바다에 변함없이 포위하고 있는 것처럼 속이고, 야음을 틈타 빠져나왔다.
한편 조·명 연합함대에 포위된 소서행장을 구하여 함께 귀국하기 위해 고성에서 남해 노량 앞바다로 급히 달려오던 도진의홍(島津義弘)의 1만 2천여 명(오백여척)과 11월 19일 새벽부터 벌어진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셨고, 임진·정유 7년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우리 수군과 명나라 진린(陳隣) 도독 휘하의 장졸들은 장군의 유해를 고금도에 모셨다가 아산으로 이장하였다. 숨 가쁜 전장터인 남해 노량 동산에 처음 묘를 썼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방답진(돌산) 군사들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전라좌수영 수군의 선봉으로 용감하게 싸워 크게 이겼다. 돌산에서는 전쟁물자 조달을 위하여 남녀노소 밤낮없이 바빴다. 이순신 장군이 경상도에서 피란 온 사람들을 구제하고 군량미 확보를 위하여 둔전을 설치하여 농사를 짓고 살게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 이순신(李純信) 첨사는 34대 전라좌수사도 하셨다.
이런 조상들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아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는 수많은 의병과 항일운동가를 배출한 충효의 고장이다. 여수읍에 사는 김백평 선생은 3.1운동 때 경기중학교 대표로 활약했다. 화양면 윤형숙 열사가 광주서 만세운동하다 왼팔이 잘렸다. 광주학생운동 지도자 노병주 선생과 독서회사건 등등 여수와 돌산의 젊은이들이 식민지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운동을 공유하며 활동한 분들이 많았다. 돌산 출신으로 노병주, 오우홍, 김인식 선생과 15세 소년항일운동가 주재년 열사가 독립유공자로 훈,포장을 받았다.
근세 돌산읍의 역사는
이성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우자 여수현감 오흔인이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 태조 5년에 함락되면서 여수와 함께 폐현되었다. 1896년 2월 3일 돌산군이 복군(復郡)되어 군내리에 돌산군청이 자리 잡았다. 여수군은 1897년 5월 16일에 복군되었다. 일본제국에 강점당한 1914년 3월 1일 여수군과 돌산군이 통합되어 여수군 두남면(斗南面)이 되었다가 1917년에 돌산면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8월 15일 여수군 여수읍이 여수시가 되고 나머지 9개 면(面)들은 여천군으로 편입되어 여천군 돌산면이 되었다가 1980년 12월 1일 돌산읍으로 승격되었다.
여수세계박람회를 개최하여 국제해양관광레저스포츠수도를 만들자고 1997년 9월 9일 전국 최초로 주민발의에 의한 3여(여수시 여천시 여천군) 통합운동이 성공하여 1998년 4월 1일 전남 제1도시가 되고 통합 여수시 돌산읍으로 되었다.
忠義門(충의문)
주재년열사기념관
15세 소년 항일운동가 주재년열사는 1929년 4월 29일 여수군 돌산읍 금성리 작금마을 주순지님의 3남 4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서당에서 주상규 훈장으로부터 천자문, 한글, 일본어를 배웠다. 1939년 4월 1일 돌산국민학교 입학검정시험에 합격 3학년에 편입하여 3,4학년 모두 우등상을 받았다. 5,6학년때도 공부 잘했고 개근상도 타면서 1943년 3월 25일 돌산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성격이 명랑하고 활달하며 운동을 좋아하고 힘도 세고 담도 컸다고한다. 광주학생운동의 무조자로 징역을 살고나온 노병주어른의 후배로부터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를 가진 문명국인데 일본이 무력으로 합병했다. 나라를 되찾기위해 의병들이 일어났고 기미년에 독립운동도 했으나 일본이 무참하게 진압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징역도 살았다. 중국 상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난뒤부터 식민지 현실에 민족적 의분을 느꼈다.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여러 해를 끌자 밥그릇 국그릇 수저까지 공출해가면서 학생들은 송진을 따오게 하고 청년들은 강제 징용되어 군대나 탄광으로 끌려갔다. 여수 신월리에는 비행장을, 돌산임포에는 해안포 진지를 만든다고 남의 땅을 강제로 수용하고 처녀듥도 잡아가버려 세상인심이 뒤숭숭하던 어느날, 둘째형의 병을 치료해주던 송낙섭(38세)으로부터 '일본이 기습공격으로 전쟁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미국과 영국의 영토를 점령했으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은 국토가 작고 물자도 없어 고전하고 있다. 점령지역에 물자를 산처럼 쌓아 놓고도 길목을 지키는 미국과 영국의 잠수함때문에 운반할 수 없어 군수품이 바닥나면 일본은 패망할것이고 조선은 미국과 영국 덕으로 해방 될것이다"는 말을 들었다. 그해 9월 초순에는 일본 대만 연락선 아마토마루가 격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9월 23일 오후 3시부터 땔감을 구하러 날막다 율림리 산으로 가고 오던 목화받 돌담 옆의 바위 4개에 각각 朝鮮日本別國(조선일본별국, 조선과 일본은 다른 나라다.), "日本局度マケ(일본국도졌다), "朝鮮萬歲(조선만세), 朝鮮之光(조선지광, 조선은 광복한다) 스무자를 정성을 다해 새겨놓았다.
돌산지역 항일운동사
여수시 돌산지역은 예로부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용감하게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웠던 의로운 고장이다. 삼국시대부터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본산산성 등 여러 곳에 산성과 봉수를 축조하여 방어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종3품 방답진(防踏鎭)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라남도 수군절도사(약칭: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동명이인이신 이순신(李純信) 첨사가계셨다. 이충무공의 뜻에 따라 방답구선(防踏龜船)이란 거북선도 만들었다. 이순신 첨사가 지휘한 방답진 장졸들은 1592년 임진년 음력으로 5월 3일 밤 썰물을 타고 경상도로 출전하여 5월 7일 옥포해전, 합포해전, 5월 8일 적진포해전에서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2차 출전 때 처음으로 거북선을 앞세워 5월 29일 사천해전, 6월 2일 당포해전, 6월 8일 한산대첩, 7월 10일 안골포해전에서 대승하고 개선하였다. 1593 계사년 2월 10, 12, 18, 22. 3월 6일 장문포해전에서 승리하고 개선하였다. 일본의 작전은 육군이 전광석화같이 점령해가면 수군은 서해바다로 진출하여 한강과 대동강에서 육군에 보급품을 주어 조선과 명나라를 없애려는 계획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왜적의 기세와 야욕을 초반부터 여지없이 꺾어버렸다. 본영 여수에서 전쟁터였던 경상도까지 노를 젓고 가고오기에 군사들이 너무 힘들어 태풍이 불어도 안전한 팔풍대석 한산도에 6월 21일 행영(行營)을 설치하여 수송선만 여수와 한산도를 오고가니 너무 좋았다더라(일본강점기에 한려수도(閑麗水道)는 승리의 바닷길로 은연중에 민족혼을 살리려고 조선8경 중에 포함시킴) 8월 30일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 겸 초대 충청 전라 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除授)받았다. 8월 29일~9월 1일 웅천해전, 1594 갑오년 9월 29일 부산포해전, 10월 1일 영등포해전도 승리하였다. 1597 정유년 1월 27일 일본의 계략에 속아 이순신 장군을 삭탈관직 투옥시키고 원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죽게 된 것을 확인한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7월 15~16일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은 참패, 전멸하고 원균 통제사도 전사하였다. 백의종군길에서 7월 22일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하여 9월 16일 불과 13척으로 명랑대첩, 1598 무술년 9월 20~10월 8일 순천왜교성전투(7년 전쟁 중에 조·명·일 3국의 육군과 수군 5만 1천여 명이 함께 싸운 유일한 전투) 중 11월 18일 밤, 왜교성에 있는 소서행장을 朝(조)·明(명) 연합함대 1만 5천명과 함선들이 장도 송도 묘도바다에 변함없이 포위하고 있는 것처럼 속이고,
돌산지역 항일운동사
여수시 돌산지역은 예로부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용감하게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웠던 의로운 고장이다. 삼국시대부터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본산산성 등 여러 곳에 산성과 봉수를 축조하여 방어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종3품 방답진(防踏鎭)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라남도 수군절도사(약칭: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동명이인이신 이순신(李純信) 첨사가계셨다. 이충무공의 뜻에 따라 방답구선(防踏龜船)이란 거북선도 만들었다. 이순신 첨사가 지휘한 방답진 장졸들은 1592년 임진년 음력으로 5월 3일 밤 썰물을 타고 경상도로 출전하여 5월 7일 옥포해전, 합포해전, 5월 8일 적진포해전에서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2차 출전 때 처음으로 거북선을 앞세워 5월 29일 사천해전, 6월 2일 당포해전, 6월 8일 한산대첩, 7월 10일 안골포해전에서 대승하고 개선하였다. 1593 계사년 2월 10, 12, 18, 22. 3월 6일 장문포해전에서 승리하고 개선하였다. 일본의 작전은 육군이 전광석화같이 점령해가면 수군은 서해바다로 진출하여 한강과 대동강에서 육군에 보급품을 주어 조선과 명나라를 없애려는 계획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왜적의 기세와 야욕을 초반부터 여지없이 꺾어버렸다. 본영 여수에서 전쟁터였던 경상도까지 노를 젓고 가고오기에 군사들이 너무 힘들어 태풍이 불어도 안전한 팔풍대석 한산도에 6월 21일 행영(行營)을 설치하여 수송선만 여수와 한산도를 오고가니 너무 좋았다더라(일본강점기에 한려수도(閑麗水道)는 승리의 바닷길로 은연중에 민족혼을 살리려고 조선8경 중에 포함시킴) 8월 30일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 겸 초대 충청 전라 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除授)받았다. 8월 29일~9월 1일 웅천해전, 1594 갑오년 9월 29일 부산포해전, 10월 1일 영등포해전도 승리하였다. 1597 정유년 1월 27일 일본의 계략에 속아 이순신 장군을 삭탈관직 투옥시키고 원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죽게 된 것을 확인한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7월 15~16일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은 참패, 전멸하고 원균 통제사도 전사하였다. 백의종군길에서 7월 22일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하여 9월 16일 불과 13척으로 명랑대첩, 1598 무술년 9월 20~10월 8일 순천왜교성전투(7년 전쟁 중에 조·명·일 3국의 육군과 수군 5만 1천여 명이 함께 싸운 유일한 전투) 중 11월 18일 밤, 왜교성에 있는 소서행장을 朝(조)·明(명) 연합함대 1만 5천명과 함선들이 장도 송도 묘도바다에 변함없이 포위하고 있는 것처럼 속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