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수리 611 만세운동기념비동산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3.1독립만세운동 민족대표 권동진(權東鎭) 선생
1861년 12월 15일 소수면 아성리 출생
1880년 구한말 사관학교 졸업 무관으로 활동
1900년 천도교 입교후 계몽운동에 매진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 서대문형무소 3년 복역 출옥 후 신간회 활동 주도
1946년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위원회 위원장
1947년 3월 9일 별세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861년 12월 15일 소수면 아성리 출생
1880년 구한말 사관학교 졸업 무관으로 활동
1900년 천도교 입교후 계몽운동에 매진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 서대문형무소 3년 복역 출옥 후 신간회 활동 주도
1946년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위원회 위원장
1947년 3월 9일 별세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우당 권동진 선생 어록
삼일운동 직후 일경에 체포된 권동진 선생은 경무총감부 검사가 "피고는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심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렇다 독립이 될 때까지는 어떻게 하든지 할 것이다. 지금 독립이 안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의 뜻을 가지고 씨를 심어 놓으면 장래 기필코 열매가 열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권동진 선생은 고등법원에서도 판사의 심문에 대해 계속 확신에 찬 파종론을 피력했다.
"그렇게 해서 씨를 뿌려 두면 수년 뒤에는 반드시 그 결과로서 독립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권동진 선생이 피력한 바와 같이 이 땅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바쳐 흘린 피가 희생의 밀알이 되어 드디어 우리는 1945년 광복과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대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삼일운동 직후 일경에 체포된 권동진 선생은 경무총감부 검사가 "피고는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심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렇다 독립이 될 때까지는 어떻게 하든지 할 것이다. 지금 독립이 안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의 뜻을 가지고 씨를 심어 놓으면 장래 기필코 열매가 열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권동진 선생은 고등법원에서도 판사의 심문에 대해 계속 확신에 찬 파종론을 피력했다.
"그렇게 해서 씨를 뿌려 두면 수년 뒤에는 반드시 그 결과로서 독립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권동진 선생이 피력한 바와 같이 이 땅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바쳐 흘린 피가 희생의 밀알이 되어 드디어 우리는 1945년 광복과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대업을 이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