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766-34
- 탐방로그
- 정읍근대역사관에 방문하기 위해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에 왔다. 역사관이 위치한 용서마을에는 여러 일본근대식 건물들이 보존되어 있고, 이 중 대부분은 농촌지역의 식민지 수탈사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두 번째로 찾은 곳은 구마모토 사택이다.
정읍 화호리 구 일본인 농장 가옥
정읍 화호리 구 일본인 농장 가옥은 정읍과 김제 일대에 대규모 토지를 차지한 일본인 농장주 구마모토 리헤이가 소유했던 주택이다. 주택의 앞면 왼쪽에 사무용 건물이 나와있고 그 오른쪽 뒤에 일본인이 거주하던 건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두 건물을 복도로 연결하였다. 근대기 일본식 주택의 배치 방식과 공간적 특징이 나타나 있으며, 일제강점기 일본인 농장주의 생활양식과 이들의 농촌수탈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읍 화호리 구 일본인 농장 가옥은 정읍과 김제 일대에 대규모 토지를 차지한 일본인 농장주 구마모토 리헤이가 소유했던 주택이다. 주택의 앞면 왼쪽에 사무용 건물이 나와있고 그 오른쪽 뒤에 일본인이 거주하던 건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두 건물을 복도로 연결하였다. 근대기 일본식 주택의 배치 방식과 공간적 특징이 나타나 있으며, 일제강점기 일본인 농장주의 생활양식과 이들의 농촌수탈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호리 일제강점기 수탈현장
화호리는 숙구지라고 불리었던 곳이며, 광활한 김제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은 지배층의 착취와 일제강점기 주요 수탈대상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진출한 일본인 지주들은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소작을 통해 농장을 운영하였으며 여기에서 생산된 쌀은 신태인역을 거쳐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현재 이곳 화호리 일대에는 구마모토 농장의 사택과 창고, 다우에 농장 사무실로 사용되었던 우체국 등 당시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있어 근대 식민지 역사 이해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화호리는 숙구지라고 불리었던 곳이며, 광활한 김제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은 지배층의 착취와 일제강점기 주요 수탈대상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진출한 일본인 지주들은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소작을 통해 농장을 운영하였으며 여기에서 생산된 쌀은 신태인역을 거쳐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현재 이곳 화호리 일대에는 구마모토 농장의 사택과 창고, 다우에 농장 사무실로 사용되었던 우체국 등 당시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있어 근대 식민지 역사 이해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766-34 정읍근대역사관 화호리 일제강점기 수탈현장 안내판을 찾아가고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정읍 화호리 구 일본인 농장 가옥
정읍근대역사관
300m →
국가등록문화재
정읍 화호리 구 일본인 농장 가옥
정읍근대역사관
300m →
정읍근대역사관
정읍근대역사관
용서마을 종합안내도
용서마을의 뜻은 "용 용(龍) + 상서로울 서 (瑞)"이다.
용서마을은 신태인읍의 주요 곡창지대인 화호리 평야를 배경으로, 일본근대식 건물이 보존되어 있는 마을로 당산나무 언덕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농촌지역의 식민지 수탈사를 가감없이 증언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근대문화유산(일제 강점기 화호병원, 화호우체국, 일본인 농장주 "구마모토" 가옥, 농산과장 사택, 일본 근대식 건물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마을이다.
용서마을의 뜻은 "용 용(龍) + 상서로울 서 (瑞)"이다.
용서마을은 신태인읍의 주요 곡창지대인 화호리 평야를 배경으로, 일본근대식 건물이 보존되어 있는 마을로 당산나무 언덕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농촌지역의 식민지 수탈사를 가감없이 증언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근대문화유산(일제 강점기 화호병원, 화호우체국, 일본인 농장주 "구마모토" 가옥, 농산과장 사택, 일본 근대식 건물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마을이다.
첫 번째 방향 안내판을 만났다.
←구마모토 사택
농산과장 사택→
←구마모토 사택
농산과장 사택→
제일 먼저 농산과장 사택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