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사나사 원증국사석종비 | 舍那寺 圓證國師石鐘碑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73호
이 석종비는 고려 말기의 승려인 원증국사 태고보우(圓國師 太古普愚, 1301~ 1382)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塔碑)이다. 이 비는 화강암으로 된 지대석을 파서 비 몸을 끼워 세웠는데 비 몸 양옆에 길고 네모난 기둥을 세워 비를 받치고, 위에는 밑이 둥글고 위는 평평한 지붕돌을 얹어 비의 몸체를 보호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비는 1379년에 세워진 여주 신륵사(神勒寺)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와 유사하나 형식이 그보다 간단하다. 지붕돌이나 기단, 편마암으로 구성된 비의 일부가 파손되어 비문 내용을 온전히는 알 수 없으나, 정도전(鄭道傳)이 비문을 짓고 재림사(梓林寺) 주지인 선사훤문이 글씨를 썼으며, 1386년에 보우의 제자인 달심(澾心)이 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73호
이 석종비는 고려 말기의 승려인 원증국사 태고보우(圓國師 太古普愚, 1301~ 1382)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塔碑)이다. 이 비는 화강암으로 된 지대석을 파서 비 몸을 끼워 세웠는데 비 몸 양옆에 길고 네모난 기둥을 세워 비를 받치고, 위에는 밑이 둥글고 위는 평평한 지붕돌을 얹어 비의 몸체를 보호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비는 1379년에 세워진 여주 신륵사(神勒寺)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와 유사하나 형식이 그보다 간단하다. 지붕돌이나 기단, 편마암으로 구성된 비의 일부가 파손되어 비문 내용을 온전히는 알 수 없으나, 정도전(鄭道傳)이 비문을 짓고 재림사(梓林寺) 주지인 선사훤문이 글씨를 썼으며, 1386년에 보우의 제자인 달심(澾心)이 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나사 원증국사탑 | 舍那寺 圓證國師塔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72호
고려 말기의 승려인 원증국사 태고보우(圓證國師 太古普愚, 1301~ 1382) 사리를 모시고 있는 부도이다. 이 부도는 기단과 몸돌만으로 이루어진 종 모양으로, 사각형의 기단 윗면에 연꽃 모양을 새겨 몸돌의 받침을 이루고 있다. 종 모양의 몸돌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맨 꼭대기에 연봉오리형 구슬 모양의 장식인 보주만이 있다. 원증국사 석종비의 기록에 따르면 보우가 입적한 다음 해인 고려 우왕 9년(1383)에 그의 제자인 달심(澾心)이 부도를 세우고 그 후 1386년에 원증국사 석종비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72호
고려 말기의 승려인 원증국사 태고보우(圓證國師 太古普愚, 1301~ 1382) 사리를 모시고 있는 부도이다. 이 부도는 기단과 몸돌만으로 이루어진 종 모양으로, 사각형의 기단 윗면에 연꽃 모양을 새겨 몸돌의 받침을 이루고 있다. 종 모양의 몸돌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맨 꼭대기에 연봉오리형 구슬 모양의 장식인 보주만이 있다. 원증국사 석종비의 기록에 따르면 보우가 입적한 다음 해인 고려 우왕 9년(1383)에 그의 제자인 달심(澾心)이 부도를 세우고 그 후 1386년에 원증국사 석종비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양평 용천리 삼층석탑 | 楊平 龍天里 三層石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1호
고려 시대 일반형 석탑인 3층 석탑으로, 지대석이 탑의 다른 부문과는 다르기 때문에 원래 자리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기단은 4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위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우주, 隅柱)이 표현되어 있다. 탑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다른 돌로 만들어졌고 특히 1층 몸돌이 2층과 3층에 비해 높아 독특한 모습이다. 지붕돌의 아래에는 3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는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위로 들려 있으며, 탑의 지붕돌 위의 정상부에는 주발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모양의 복발, 구슬 모양의 장식인 보주 등의 상륜 부재를 받치는 장식인 노반석(露盤石)이 놓여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1호
고려 시대 일반형 석탑인 3층 석탑으로, 지대석이 탑의 다른 부문과는 다르기 때문에 원래 자리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기단은 4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위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우주, 隅柱)이 표현되어 있다. 탑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다른 돌로 만들어졌고 특히 1층 몸돌이 2층과 3층에 비해 높아 독특한 모습이다. 지붕돌의 아래에는 3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는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위로 들려 있으며, 탑의 지붕돌 위의 정상부에는 주발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모양의 복발, 구슬 모양의 장식인 보주 등의 상륜 부재를 받치는 장식인 노반석(露盤石)이 놓여 있다.
경기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 사나사
大寂光殿(대적광전)
양평의병 전투지 - 사나사
관리번호 : 15-1-24
관리자 : 대한불교조계종 사나사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사나사길 329
1907년 10월 양평의병이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곳이다. 일제가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군대를 해산시키면서 의병의 대일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즈음 양평의병은 용문산의 용문사를 비롯하여 상원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양평의병이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양평의병은 1907년 10월 27일 일본군 보병 제13사단 예하 51연대 제11중대와 사나사에서 격전을 벌였다. 양평의병의 근거지였던 사나사는 이때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걸쳐 복원되었다.
관리번호 : 15-1-24
관리자 : 대한불교조계종 사나사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사나사길 329
1907년 10월 양평의병이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곳이다. 일제가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군대를 해산시키면서 의병의 대일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즈음 양평의병은 용문산의 용문사를 비롯하여 상원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양평의병이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양평의병은 1907년 10월 27일 일본군 보병 제13사단 예하 51연대 제11중대와 사나사에서 격전을 벌였다. 양평의병의 근거지였던 사나사는 이때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걸쳐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