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392-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선원사 동종 | 禪院寺 銅鐘
대웅전 안에 있는 이 종은 조선시대 말기에 만든 것이다. 종의 몸통 위 아래에 수평으로 네 개의 띠를 둘러 다섯 칸으로 나누었다. 그중 맨 위칸에는 열 한 개의 작은 원을 나열하고 원 안에 범(梵)자를 1자씩 넣었다. 둘째 칸은 둘레를 따라가며 네 방향에 유곽이라고 부르는 큼직한 사각형을 하나씩 두었다. 네 개의 유곽 테두리에 덩굴문양을 두르고, 그 안에 꽃무늬를 세 개씩 3열로 배열하였다. 유곽들 사이에는 보살상을 조각하였으며, 그 아래에 갖가지 글을 새겼다. 종을 제작한 기법은 서툴지만 무늬가 다채롭고 독특하다.
선원사 대웅전 | 禪院寺 大雄殿
이 건물은 선원사의 중심 법당으로 1961년에 신도들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처음 세웠다고 한다. 그는 남원의 지형으로 보아 중심산인 백공산의 지세가 약한데 반해 변두리산인 교룡산의 지세가 강하다고 했다. 그래서 도선국사는 백공산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이곳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로 사람들은 이 절이 남원의 번영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어 각별히 보호하고 후원해 왔다. 이 대웅전은 조선시대 말에 지은 목조 기와건물이다.
대웅전 안에 있는 이 종은 조선시대 말기에 만든 것이다. 종의 몸통 위 아래에 수평으로 네 개의 띠를 둘러 다섯 칸으로 나누었다. 그중 맨 위칸에는 열 한 개의 작은 원을 나열하고 원 안에 범(梵)자를 1자씩 넣었다. 둘째 칸은 둘레를 따라가며 네 방향에 유곽이라고 부르는 큼직한 사각형을 하나씩 두었다. 네 개의 유곽 테두리에 덩굴문양을 두르고, 그 안에 꽃무늬를 세 개씩 3열로 배열하였다. 유곽들 사이에는 보살상을 조각하였으며, 그 아래에 갖가지 글을 새겼다. 종을 제작한 기법은 서툴지만 무늬가 다채롭고 독특하다.
선원사 대웅전 | 禪院寺 大雄殿
이 건물은 선원사의 중심 법당으로 1961년에 신도들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처음 세웠다고 한다. 그는 남원의 지형으로 보아 중심산인 백공산의 지세가 약한데 반해 변두리산인 교룡산의 지세가 강하다고 했다. 그래서 도선국사는 백공산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이곳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로 사람들은 이 절이 남원의 번영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어 각별히 보호하고 후원해 왔다. 이 대웅전은 조선시대 말에 지은 목조 기와건물이다.
冥府殿(명부전)
남원 선원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소조시왕상 일괄 | 南原 禪院寺 木造地藏菩薩三尊像 및 塑造十王像一括
남원 선원사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보살삼존상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왕상은 1610년(광해군 2)에 수화승 원오(元悟)를 비롯한 9명의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것이다. 그리고 태산대왕과 귀왕 등은 1646년(인조 24)에 수화승 도색(道賾) 등이 조성한 불상으로, 총 25구, 복장유물 18점이 일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선원사 명부전 목조지장 보살삼존상과 소조시왕상 등은 원래 완주 위봉사에서 조성된 후, 1910년대 현재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선원사 명부전 불상들은 17세기 전반의 불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지장보살삼존상을 비롯한 권속들이 모두 완전하게 남아있으며, 조성 시기와 작가 등이 밝혀져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반 명부(冥府) 신앙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남원 선원사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보살삼존상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왕상은 1610년(광해군 2)에 수화승 원오(元悟)를 비롯한 9명의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것이다. 그리고 태산대왕과 귀왕 등은 1646년(인조 24)에 수화승 도색(道賾) 등이 조성한 불상으로, 총 25구, 복장유물 18점이 일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선원사 명부전 목조지장 보살삼존상과 소조시왕상 등은 원래 완주 위봉사에서 조성된 후, 1910년대 현재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선원사 명부전 불상들은 17세기 전반의 불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지장보살삼존상을 비롯한 권속들이 모두 완전하게 남아있으며, 조성 시기와 작가 등이 밝혀져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반 명부(冥府) 신앙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명부전은 사람이 죽은 뒤 살아있을 때의 일을 심판받는 명부를 상징하는 곳으로, 죽은 자들을 모두 구원하고 마지막에 지옥에서 나오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사후에 10번의 재판을 주관하는 10명의 왕들을 모신 전각이다. 주로 영가의 위패를 모시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곳이다.
가까이서 보면 태극기를 볼 수 있다.
大正 六年 丁巳 十一月五日 爲始 南原郡 萬行山 禪院寺 地藏菩薩及 十王 順新 造成 十七日 回向 奉安 于大法堂 證明 震應慧燦 誦呪 守日 持殿 英喆 金魚 片手萬聦 尚旿 幸恩 奉仁 明眞 成烈 法祥 鍾頭應守 供養主炯根 相洙 都監品善 別座斗滿 隨喜結緣成贊 斗永 泰順 五峰 時休持 水龍琪善 化主 徐氏桂花
대정 6년 정사 10월 5일 위시 남원군 만행산 선원사 지장보살급 십왕 순신 조성 17일 회향 봉안 우대법당 증명 진응혜찬 송주 수일 지전 영철 김어 편수만총 상오 행은 봉인 명진 성렬 법상 종두응수 공양주형근 상수 도감품선 별좌두만 수희결연성찬 두영 태순 오봉 시휴지 수용기선 화주 서씨계화
대정 6년 정사 10월 5일 위시 남원군 만행산 선원사 지장보살급 십왕 순신 조성 17일 회향 봉안 우대법당 증명 진응혜찬 송주 수일 지전 영철 김어 편수만총 상오 행은 봉인 명진 성렬 법상 종두응수 공양주형근 상수 도감품선 별좌두만 수희결연성찬 두영 태순 오봉 시휴지 수용기선 화주 서씨계화
獨判大施主 乾命 姜英安 坤命 崔淸水 坤命 金○山 弟嫂 趙永壽 長子 容浩 婦 文賢鍾 次子 慶燮 婦 李秉斗 長孫 基周 次孫 泰周 三孫 萬周 四孫 興周
독판대시주 건명 강영안 곤명 최청수 곤명 김○산 제수 조영수 장자 조용호 부 문현종 차자 경섭 부 이병두 장손 기주 차손 태주 3손 만주 4손 흥주
독판대시주 건명 강영안 곤명 최청수 곤명 김○산 제수 조영수 장자 조용호 부 문현종 차자 경섭 부 이병두 장손 기주 차손 태주 3손 만주 4손 흥주
남원시 도통동 392-1 선원사 명부전의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괘불탱화에서 태극기가 발견되어, 찾고자 도착한 남원역.
藥師殿(약사전)
선원사 철조여래좌상 | 禪院寺 鐵造如來坐像
이 철불은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높이는 1.2m, 무릎폭은 90㎝이다. 타원형 얼굴에 날카로운 눈과 예리한 코, 꽉 다문 입술 등에서 고려시대 철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신체는 부드러운 어깨선, 듬직한 가슴, 좁은 허리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책상다리를 한 하체도 비교적 사실적이다. 옷은 얇게 표현하였는데, 마치 한복을 입은 것처럼 옷 가슴을 V자로 여민 것이 특이하다. 얼굴은 다소 과장되어 온화함과 우아함을 잃어버린 반면, 신체는 자연스러운 안정을 이루고 있다. 손은 근래에 새로이 만들어 끼운 것이다.
선원사 약사전 | 禪院寺 藥師殿
이 건물은 중생의 고뇌를 구제하는 약사불을 모신 법당으로,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영조 30년(1754)에 다시 지었다.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처음 세웠다. 사람들은 이 절이 남원의 번영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어 각별히 보호하고 후원해 왔다. 정유재란으로 절이 불타고 철제불상만 남게 되자, 절을 복구하면서 그 불상을 이곳 약사전에 모셨다. 받침부는 자연석을 낮게 쌓고 그 위에 돌판을 얹었으며, 기둥은 중간 부위를 볼록하게 부풀려 놓았다. 지붕과 처마의 앞면은 비교적 수평선을 이루어 소박한 멋을 풍긴다.
이 철불은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높이는 1.2m, 무릎폭은 90㎝이다. 타원형 얼굴에 날카로운 눈과 예리한 코, 꽉 다문 입술 등에서 고려시대 철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신체는 부드러운 어깨선, 듬직한 가슴, 좁은 허리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책상다리를 한 하체도 비교적 사실적이다. 옷은 얇게 표현하였는데, 마치 한복을 입은 것처럼 옷 가슴을 V자로 여민 것이 특이하다. 얼굴은 다소 과장되어 온화함과 우아함을 잃어버린 반면, 신체는 자연스러운 안정을 이루고 있다. 손은 근래에 새로이 만들어 끼운 것이다.
선원사 약사전 | 禪院寺 藥師殿
이 건물은 중생의 고뇌를 구제하는 약사불을 모신 법당으로,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영조 30년(1754)에 다시 지었다.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처음 세웠다. 사람들은 이 절이 남원의 번영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어 각별히 보호하고 후원해 왔다. 정유재란으로 절이 불타고 철제불상만 남게 되자, 절을 복구하면서 그 불상을 이곳 약사전에 모셨다. 받침부는 자연석을 낮게 쌓고 그 위에 돌판을 얹었으며, 기둥은 중간 부위를 볼록하게 부풀려 놓았다. 지붕과 처마의 앞면은 비교적 수평선을 이루어 소박한 멋을 풍긴다.
大雄殿(대웅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