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30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우재 이병찬 선생 동상 건립기
옛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 밀려드는 일본의 세력을 막아내지 못하고 융희 4년 서기 1910년 8월 나라가 일본에 합병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을 이기지 못한 의사들이 일어나 향병을 모집하여 적과 싸우기도 하고 혹은 기호를 보아 적의 원흉을 저격하기도 하며 혹은 국외로 나가 동지를 규합, 독립군을 결성하여 적과 대전하기도 하고 혹은 열강국을 찾아가 국권 회복을 호소하는 다양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이 고장 복내면에 방년 24세의 청년으로 분연히 조국광복에 헌신하여 호남의 대표적인 역할을 했던 분이 있었으니 바로 우재 이병찬 선생이다. 선생의 또 다른 이름은 병호요 자는 성부이며 본관은 광주인으로 고려말의 명현 둔촌 선생 집의 후예요 입향조 양진재공 수관의 12대손이며 심재공 정회의 장남이다. 학령에 이르러 조선조 말 월파 정시림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망국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은인자중하던 차 만주에서 애국지사들의 광복 운동이 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그들과 접선하였다. 선생은 1913년 채기중 선생이 주도한 풍기의 대한광복단과 1915년 박상진 선생이 주도한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약하다가 1915년 7월 15일 박상진, 우재룡 선생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규모로 조직을 정비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전국에 비밀기관을 설치 운용키로 하였는데 여기서 선생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전라도 지부장의 중책을 맡았다. 1916년 겸백면의 박문용 선생과 모의하여 복내면 회계원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이 강제로 부과한 세금 일화 이천 원을 징수한 것과 지방의 부호들로부터 모금한 돈을 합쳐 독립군 군자금으로 밀송하고 전라남북도를 왕래하면서 비밀조직의 확대, 일제 고관과 친일 분자의 숙청, 일본 주요 기관의 파괴, 독립군자금의 모금을 위해 활동하던 중 밀고한 자가 있어 1918년 4월 목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5년 형을 선고받아 1919년 2월 공주감옥으로 이감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당시의 의열지사들의 행적을 일일이 조사 확인하여 훈포장을 추서하고 유족들을 위안해 주었는데 선생께는 1990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으며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309호 묘지에 이장되었다.
아아! 선생이 어찌 이를 기대하고 투쟁하였으리오마는 국가로서는 이것으로 최소한의 보상을 한 셈이요. 선생은 많은 후세인에게 귀감으로 우뚝 서게 되었도다. 예향 보성인으로서 경향 각지에 살고 있는 뜻있는 분들이 선생의 이러한 애국애족의 유적을 전하기 위해 추모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선생의 동상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나에게 건립기문을 부탁하니 평소 선생과 같은 마을에 거주하면서 선생을 잘 알고 존경했던 터라 감히 사양치 못하고 이렇게 쓰노니 선생의 동상이 구국의 표상으로 오래오래 이 고장의 빛을 내리라.
옛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 밀려드는 일본의 세력을 막아내지 못하고 융희 4년 서기 1910년 8월 나라가 일본에 합병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을 이기지 못한 의사들이 일어나 향병을 모집하여 적과 싸우기도 하고 혹은 기호를 보아 적의 원흉을 저격하기도 하며 혹은 국외로 나가 동지를 규합, 독립군을 결성하여 적과 대전하기도 하고 혹은 열강국을 찾아가 국권 회복을 호소하는 다양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이 고장 복내면에 방년 24세의 청년으로 분연히 조국광복에 헌신하여 호남의 대표적인 역할을 했던 분이 있었으니 바로 우재 이병찬 선생이다. 선생의 또 다른 이름은 병호요 자는 성부이며 본관은 광주인으로 고려말의 명현 둔촌 선생 집의 후예요 입향조 양진재공 수관의 12대손이며 심재공 정회의 장남이다. 학령에 이르러 조선조 말 월파 정시림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망국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은인자중하던 차 만주에서 애국지사들의 광복 운동이 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그들과 접선하였다. 선생은 1913년 채기중 선생이 주도한 풍기의 대한광복단과 1915년 박상진 선생이 주도한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약하다가 1915년 7월 15일 박상진, 우재룡 선생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규모로 조직을 정비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전국에 비밀기관을 설치 운용키로 하였는데 여기서 선생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전라도 지부장의 중책을 맡았다. 1916년 겸백면의 박문용 선생과 모의하여 복내면 회계원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이 강제로 부과한 세금 일화 이천 원을 징수한 것과 지방의 부호들로부터 모금한 돈을 합쳐 독립군 군자금으로 밀송하고 전라남북도를 왕래하면서 비밀조직의 확대, 일제 고관과 친일 분자의 숙청, 일본 주요 기관의 파괴, 독립군자금의 모금을 위해 활동하던 중 밀고한 자가 있어 1918년 4월 목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5년 형을 선고받아 1919년 2월 공주감옥으로 이감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당시의 의열지사들의 행적을 일일이 조사 확인하여 훈포장을 추서하고 유족들을 위안해 주었는데 선생께는 1990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으며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309호 묘지에 이장되었다.
아아! 선생이 어찌 이를 기대하고 투쟁하였으리오마는 국가로서는 이것으로 최소한의 보상을 한 셈이요. 선생은 많은 후세인에게 귀감으로 우뚝 서게 되었도다. 예향 보성인으로서 경향 각지에 살고 있는 뜻있는 분들이 선생의 이러한 애국애족의 유적을 전하기 위해 추모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선생의 동상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나에게 건립기문을 부탁하니 평소 선생과 같은 마을에 거주하면서 선생을 잘 알고 존경했던 터라 감히 사양치 못하고 이렇게 쓰노니 선생의 동상이 구국의 표상으로 오래오래 이 고장의 빛을 내리라.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300 복내중학교 내 이병찬(이병호) 지사 동상을 찾았다.
우재 이병찬 지사 동상
우재 이병찬 지사는 복내면 시천리에서 1886년 11월 18일 출생하여 조선조 말 월파 정시림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1910년 망국(경술국치)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1912년 만주에 있는 독립지사와 연락을 취하며 일제가 부과한 세금을 강탈하고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정에 밀송하는 등 각 지방을 왕래 비밀조직을 확대하였으며, 1915년 7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조직된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전라도 지부장으로 선임되어 일제 고관 및 친일배의 주살과 일제 기관을 파괴하고 국권 회복을 도모하시다 목포에서 1918년 7월 일경에 피체되어 1919년 2월 28일 공주감옥에서 보안법 및 공갈, 총포류단속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62년 4월 20일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 동상은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성금과 국고와 지방비를 지원받아 2001년 10월 20일 건립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배위와 함께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309호에 안장되어 있다.
우재 이병찬 지사는 복내면 시천리에서 1886년 11월 18일 출생하여 조선조 말 월파 정시림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1910년 망국(경술국치)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1912년 만주에 있는 독립지사와 연락을 취하며 일제가 부과한 세금을 강탈하고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정에 밀송하는 등 각 지방을 왕래 비밀조직을 확대하였으며, 1915년 7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조직된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전라도 지부장으로 선임되어 일제 고관 및 친일배의 주살과 일제 기관을 파괴하고 국권 회복을 도모하시다 목포에서 1918년 7월 일경에 피체되어 1919년 2월 28일 공주감옥에서 보안법 및 공갈, 총포류단속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62년 4월 20일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 동상은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성금과 국고와 지방비를 지원받아 2001년 10월 20일 건립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배위와 함께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309호에 안장되어 있다.
우재 이병찬 지사 상
우재 이병찬 지사 상
애국지사 우재 이병찬 선생 동상 건립기
옛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 밀려드는 일본의 세력을 막아내지 못하고 융희 4년 서기 1910년 8월 나라가 일본에 합병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을 이기지 못한 의사들이 일어나 향병을 모집하여 적과 싸우기도 하고 혹은 기호를 보아 적의 원흉을 저격하기도 하며 혹은 국외로 나가 동지를 규합, 독립군을 결성하여 적과 대전하기도 하고 혹은 열강국을 찾아가 국권 회복을 호소하는 다양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이 고장 복내면에 방년 24세의 청년으로 분연히 조국광복에 헌신하여 호남의 대표적인 역할을 했던 분이 있었으니 바로 우재 이병찬 선생이다. 선생의 또 다른 이름은 병호요 자는 성부이며 본관은 광주인으로 고려말의 명현 둔촌 선생 집의 후예요 입향조 양진재공 수관의 12대손이며 심재공 정회의 장남이다. 학령에 이르러 조선조 말 월파 정시림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망국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은인자중하던 차 만주에서 애국지사들의 광복 운동이 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그들과 접선하였다. 선생은 1913년 채기중 선생이 주도한 풍기의 대한광복단과 1915년 박상진 선생이 주도한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약하다가 1915년 7월 15일 박상진, 우재룡 선생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규모로 조직을 정비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전국에 비밀기관을 설치 운용키로 하였는데 여기서 선생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전라도 지부장의 중책을 맡았다. 1916년 겸백면의 박문용 선생과 모의하여 복내면 회계원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이 강제로 부과한 세금 일화 이천 원을 징수한 것과 지방의 부호들로부터 모금한 돈을 합쳐 독립군 군자금으로 밀송하고 전라남북도를 왕래하면서 비밀조직의 확대, 일제 고관과 친일 분자의 숙청, 일본 주요 기관의 파괴, 독립군자금의 모금을 위해 활동하던 중 밀고한 자가 있어 1918년 4월 목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5년 형을 선고받아 1919년 2월 공주감옥으로 이감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당시의 의열지사들의 행적을 일일이 조사 확인하여 훈포장을 추서하고 유족들을 위안해 주었는데 선생께는 1990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으며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309호 묘지에 이장되었다.
아아! 선생이 어찌 이를 기대하고 투쟁하였으리오마는 국가로서는 이것으로 최소한의 보상을 한 셈이요. 선생은 많은 후세인에게 귀감으로 우뚝 서게 되었도다. 예향 보성인으로서 경향 각지에 살고 있는 뜻있는 분들이 선생의 이러한 애국애족의 유적을 전하기 위해 추모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선생의 동상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나에게 건립기문을 부탁하니 평소 선생과 같은 마을에 거주하면서 선생을 잘 알고 존경했던 터라 감히 사양치 못하고 이렇게 쓰노니 선생의 동상이 구국의 표상으로 오래오래 이 고장의 빛을 내리라.
옛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 밀려드는 일본의 세력을 막아내지 못하고 융희 4년 서기 1910년 8월 나라가 일본에 합병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을 이기지 못한 의사들이 일어나 향병을 모집하여 적과 싸우기도 하고 혹은 기호를 보아 적의 원흉을 저격하기도 하며 혹은 국외로 나가 동지를 규합, 독립군을 결성하여 적과 대전하기도 하고 혹은 열강국을 찾아가 국권 회복을 호소하는 다양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이 고장 복내면에 방년 24세의 청년으로 분연히 조국광복에 헌신하여 호남의 대표적인 역할을 했던 분이 있었으니 바로 우재 이병찬 선생이다. 선생의 또 다른 이름은 병호요 자는 성부이며 본관은 광주인으로 고려말의 명현 둔촌 선생 집의 후예요 입향조 양진재공 수관의 12대손이며 심재공 정회의 장남이다. 학령에 이르러 조선조 말 월파 정시림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망국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은인자중하던 차 만주에서 애국지사들의 광복 운동이 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그들과 접선하였다. 선생은 1913년 채기중 선생이 주도한 풍기의 대한광복단과 1915년 박상진 선생이 주도한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약하다가 1915년 7월 15일 박상진, 우재룡 선생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규모로 조직을 정비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전국에 비밀기관을 설치 운용키로 하였는데 여기서 선생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전라도 지부장의 중책을 맡았다. 1916년 겸백면의 박문용 선생과 모의하여 복내면 회계원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이 강제로 부과한 세금 일화 이천 원을 징수한 것과 지방의 부호들로부터 모금한 돈을 합쳐 독립군 군자금으로 밀송하고 전라남북도를 왕래하면서 비밀조직의 확대, 일제 고관과 친일 분자의 숙청, 일본 주요 기관의 파괴, 독립군자금의 모금을 위해 활동하던 중 밀고한 자가 있어 1918년 4월 목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5년 형을 선고받아 1919년 2월 공주감옥으로 이감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당시의 의열지사들의 행적을 일일이 조사 확인하여 훈포장을 추서하고 유족들을 위안해 주었는데 선생께는 1990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으며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309호 묘지에 이장되었다.
아아! 선생이 어찌 이를 기대하고 투쟁하였으리오마는 국가로서는 이것으로 최소한의 보상을 한 셈이요. 선생은 많은 후세인에게 귀감으로 우뚝 서게 되었도다. 예향 보성인으로서 경향 각지에 살고 있는 뜻있는 분들이 선생의 이러한 애국애족의 유적을 전하기 위해 추모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선생의 동상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나에게 건립기문을 부탁하니 평소 선생과 같은 마을에 거주하면서 선생을 잘 알고 존경했던 터라 감히 사양치 못하고 이렇게 쓰노니 선생의 동상이 구국의 표상으로 오래오래 이 고장의 빛을 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