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 188-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憂國志士 鶴巖 李觀述 遺蹟碑(우국지사 학암 이관술 유적비)
憂國志士 鶴巖 李觀述 遺蹟碑(우국지사 학암 이관술 유적비)
憂國志士 鶴巖 李觀述 遺蹟碑(우국지사 학암 이관술 유적비)
학암 ○○○○○○ 명 수○○○○○○씨 충숙공의 19세손으로 1902년 음 4월 25일 부 종락과 모 덕산이씨 사이에서 ○○○○서 입암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나라는 왜의 침략을 받아 국가의 운명이 바람앞에 들불처럼 어지러웠다. 따라서 선생은 왜의 식민지 아래서 신음하는 이 민족의 해방과 광복이후 조국의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 왜의 식민지 아래에서는 민족주의자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 때문에 왜경에게 모진 고문과 옥살이 또한 여러번 겪었다. 왜의 압제 속에 선생은 학문을 깨우치는 것만이 조국의 광복을 앞당길 수 있다고 믿고 1922년 서울 중동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25년 졸업과 동시에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에 졸업하고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이로부터 교내에서 학생들에게 항일사상
학암 ○○○○○○ 명 수○○○○○○씨 충숙공의 19세손으로 1902년 음 4월 25일 부 종락과 모 덕산이씨 사이에서 ○○○○서 입암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나라는 왜의 침략을 받아 국가의 운명이 바람앞에 들불처럼 어지러웠다. 따라서 선생은 왜의 식민지 아래서 신음하는 이 민족의 해방과 광복이후 조국의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 왜의 식민지 아래에서는 민족주의자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 때문에 왜경에게 모진 고문과 옥살이 또한 여러번 겪었다. 왜의 압제 속에 선생은 학문을 깨우치는 것만이 조국의 광복을 앞당길 수 있다고 믿고 1922년 서울 중동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25년 졸업과 동시에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에 졸업하고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이로부터 교내에서 학생들에게 항일사상
을 고취시켰던 선생은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에 자극을 받아 학생자치 및 경찰의 교내 출입 반대 등을 외치며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주도했고 이후 민족주의자로서 부득기 1932년 교직을 그만 두어야 했다. 이로부터 동지인 이순근 이도엽 조정래 그리고 누이동생 순금과 함께 조선반제동맹을 조직하여 한국자주독립을 위한 9개항의 요구조건을 선언하므로써 왜도를 놀라게하였다.
당시로서는 감히 누구도 용기를 낼수 없는 9개 항의 선언문에는 1. 조선어 본위 교육의 실시 2. 식민지 노예교육의 반대 3. 국유임야를 민중의 공유 4. 전 수리조합은 농민의 관리 5. 조선의 절대적 독립 6.재 조선 왜군대 및 헌병 즉시 전부 철퇴 7. 지나 만주 왜군대 및 군함 즉시 철퇴 8. 전 정치범인 즉시 무죄석방 9. 치안유지법 철퇴 등이다. 이 선언문이 지금도 한국 총무처 기록보관소에 남아있다. 이로 인하여 재판에 회부되어 4년의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신병으로 보석되었다. 그 해 8월 또다시 학교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벌였던 선생은 왜경에 체포되어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 1935년에는 이재유 등 항일동지들과 반제국주의적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여 국민들의 항일정신을 고취시켰으며 1937년에는 서울 영등포 지역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는 노동자 조직을 이용해 항일운동을 펴기도 했다. 1940년을 전후해 그동안 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해 독립운동을 포기했던 동지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위한 '경성콤' 그룹을 조직했던 선생은 이떄문에 다시 수감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여의 옥고를 치루다 병보석이 되어 귀향했다. 1944년 3월 10일 다시 형무소로부터 수감통보를 받고 이에 불응하고 입암본가에서 도주한것이 재향의 마지막이었다. 왜말 수많은 동지들이 왜의 혹독한 고문과 회유에 못이겨 변절하는 자도
당시로서는 감히 누구도 용기를 낼수 없는 9개 항의 선언문에는 1. 조선어 본위 교육의 실시 2. 식민지 노예교육의 반대 3. 국유임야를 민중의 공유 4. 전 수리조합은 농민의 관리 5. 조선의 절대적 독립 6.재 조선 왜군대 및 헌병 즉시 전부 철퇴 7. 지나 만주 왜군대 및 군함 즉시 철퇴 8. 전 정치범인 즉시 무죄석방 9. 치안유지법 철퇴 등이다. 이 선언문이 지금도 한국 총무처 기록보관소에 남아있다. 이로 인하여 재판에 회부되어 4년의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신병으로 보석되었다. 그 해 8월 또다시 학교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벌였던 선생은 왜경에 체포되어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 1935년에는 이재유 등 항일동지들과 반제국주의적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여 국민들의 항일정신을 고취시켰으며 1937년에는 서울 영등포 지역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는 노동자 조직을 이용해 항일운동을 펴기도 했다. 1940년을 전후해 그동안 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해 독립운동을 포기했던 동지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위한 '경성콤' 그룹을 조직했던 선생은 이떄문에 다시 수감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여의 옥고를 치루다 병보석이 되어 귀향했다. 1944년 3월 10일 다시 형무소로부터 수감통보를 받고 이에 불응하고 입암본가에서 도주한것이 재향의 마지막이었다. 왜말 수많은 동지들이 왜의 혹독한 고문과 회유에 못이겨 변절하는 자도
있었으나 선생은 끝까지 지도를 굽히지 아니하고 이 나라의 광복과 후진 교육을 위해 훌륭한 업적을 세웠으나 안타깝게도 아직 역사의 그늘 속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선생과 부인 밀양박씨 사이에 여식 5형제 정환 성옥 경옥 정성 경환을 두었으나 광복 전후 가정풍란 속에 부모 형제 흩어지고 다만 끝에 혈육 경환이가 아버님은 지금 어디서 무었을 하고 계시는지 외치면서 이 빛난 행적 만분지일이라도 이 세상에 재조명 될까 하여 각계 유능한 인사의 아낌없는 협조하에 송옹 종중에서 선생께서 재향 시절을 보내시던 유서 깊은 이곳에 유적비를 세우다.
광복 후 52년(1996) 4월 일
인동 장성운은 글을 짓고 ○○ 이원섭은 글씨를 쓰다
광복 후 52년(1996) 4월 일
인동 장성운은 글을 짓고 ○○ 이원섭은 글씨를 쓰다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 257 입암마을 독립운동가 이관술 생가터를 찾았다.
憂國志士 鶴巖 李觀述 遺蹟碑(우국지사 학암 이관술 유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