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89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딜쿠샤의 복원
서울특별시는 딜쿠샤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2016년 관계기관(서울특별시, 기획재정부, 문화재청, 종로구)과 업무협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2017년 8월에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를 등록하였다. 2017년 7월에는 딜쿠샤에 거주하던 주민들과 원만히 합의하여 이주를 완료하였다. 이후 본격적으로 딜쿠샤를 복원하고 전시관으로 만들기 위해 학술연구와 설계용역을 실시하였다. 2018년 11월에 건물의 원형을 복원하는 공사를 시작해 2020년 12월에 복원을 완료하였다. 복원공사를 마친 후 딜쿠샤의 내부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살던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하였다. 거실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테일러 부부가 한국에서 생활했던 모습과 앨버트 W. 테일러의 언론활동을 주제로 한 전시실로 조성하여 2021년 3월에 개관하였다.
서울특별시는 딜쿠샤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2016년 관계기관(서울특별시, 기획재정부, 문화재청, 종로구)과 업무협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2017년 8월에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를 등록하였다. 2017년 7월에는 딜쿠샤에 거주하던 주민들과 원만히 합의하여 이주를 완료하였다. 이후 본격적으로 딜쿠샤를 복원하고 전시관으로 만들기 위해 학술연구와 설계용역을 실시하였다. 2018년 11월에 건물의 원형을 복원하는 공사를 시작해 2020년 12월에 복원을 완료하였다. 복원공사를 마친 후 딜쿠샤의 내부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살던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하였다. 거실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테일러 부부가 한국에서 생활했던 모습과 앨버트 W. 테일러의 언론활동을 주제로 한 전시실로 조성하여 2021년 3월에 개관하였다.
AP통신원 앨버터 W. 테일러
1919년 2월 28일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 T. 테일러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 앨버트 W. 테일런ㄴ AP통신으로부터 고종의 장례식을 취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상태였다. 아들과 아내를 보러 병원에 온 앨버트는 우연히 침대 속에 감춰져 있던 종이 뭉치를 발견하였다. 한국어에 능통했던 앨버트는 이것이 독립선언서라는 것을 알아챘고, 즉시 관련 기사를 작성해 독립선언서와 함께 동생 위리엄에게 전달하였다. 윌리엄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 기사를 미국에 보내는데 성공했고, 독립선언서가 국외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앨버트는 독립운동가의 재판과 제암리 학살하건을 취재하기도 했다. 앨버트가 AP통신원으로 활동한 내용은 그가 장모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남아있다.
1919년 2월 28일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 T. 테일러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 앨버트 W. 테일런ㄴ AP통신으로부터 고종의 장례식을 취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상태였다. 아들과 아내를 보러 병원에 온 앨버트는 우연히 침대 속에 감춰져 있던 종이 뭉치를 발견하였다. 한국어에 능통했던 앨버트는 이것이 독립선언서라는 것을 알아챘고, 즉시 관련 기사를 작성해 독립선언서와 함께 동생 위리엄에게 전달하였다. 윌리엄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 기사를 미국에 보내는데 성공했고, 독립선언서가 국외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앨버트는 독립운동가의 재판과 제암리 학살하건을 취재하기도 했다. 앨버트가 AP통신원으로 활동한 내용은 그가 장모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남아있다.
3.1독립선언서의 해외 타전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포한 독립선언서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이다. 3.1운동 당시 AP통신(Associated Press)의 한국통신원 앨버트 W. 테일러는 독립선언서를 국외로 전달해 한국 민족이 독립을 선언했음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에 공헌하였다.
앨버트는 독립 만세운동이 시작된 3월 1일에 아내 메리 L.테일러가 아들을 낳아 입원하고 있던 세브란스병원에서 우연히 침대 속에 숨겨진 독립선언서를 발견하였다. 앨버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3.1운동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여 독립선언서와 함께 미국의 AP통신에 보냈다. 앨버트가 독립선언서를 해외에 전달한 사실은 메리가 쓴 회고록 『호박목걸이』에 자세히 나와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AP통신원이었던 앨버트는 독립선언서와 관련 기사를 그의 동생 윌리엄에게 주었고, 윌리엄은 이를 구두 뒤축에 숨겨 일본 도쿄로 가져가서 전신으로 미국에 보냈다. 앨버트가 AP통신에 전달한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뿌려졌다. 그 기사는 1919년 3월 13일자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에 "서울, 3월 12일(Associated Press)-한국의 독립선언서에 2천만 민족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정의와 인도의 이름으로 말한다."라는 내용으로 보도되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포한 독립선언서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이다. 3.1운동 당시 AP통신(Associated Press)의 한국통신원 앨버트 W. 테일러는 독립선언서를 국외로 전달해 한국 민족이 독립을 선언했음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에 공헌하였다.
앨버트는 독립 만세운동이 시작된 3월 1일에 아내 메리 L.테일러가 아들을 낳아 입원하고 있던 세브란스병원에서 우연히 침대 속에 숨겨진 독립선언서를 발견하였다. 앨버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3.1운동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여 독립선언서와 함께 미국의 AP통신에 보냈다. 앨버트가 독립선언서를 해외에 전달한 사실은 메리가 쓴 회고록 『호박목걸이』에 자세히 나와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AP통신원이었던 앨버트는 독립선언서와 관련 기사를 그의 동생 윌리엄에게 주었고, 윌리엄은 이를 구두 뒤축에 숨겨 일본 도쿄로 가져가서 전신으로 미국에 보냈다. 앨버트가 AP통신에 전달한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뿌려졌다. 그 기사는 1919년 3월 13일자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에 "서울, 3월 12일(Associated Press)-한국의 독립선언서에 2천만 민족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정의와 인도의 이름으로 말한다."라는 내용으로 보도되었다.
동시대의 언론인
일제 강점기에 베델·맥켄지·스코필드 등과 같은 서양인들은 언론활동으로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
베델(Ernest T. Bethell, 배설(裵說), 1872~1909)은 항일 신문인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하여 일제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였다. 베델은 일제의 불법적이고 강제적인 국권 침략을 언론을 통해 알리고 한국의 국권 회복 운동을 돕다 1909년 5월 1일 36살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맥켄지(Frederick A. McKenzie, 1869~1931)는 1904년 이후 여러 번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1907년에는 경기·충청·강원도의 산속까지 들어가서 직접 의병을 만나 취재를 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비극(쏟 Tragedy of Korea)』,『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을 출간하여 일제의 만행과 식민통치를 알렸다. 이 책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동정과 반일 분위기를 일으키는 데에 기여하였다.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석호필(石虎弼), 1889~1970)는 일제가 경기도 수원 제암리의 주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을 때 현장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국외의 언론 기관에 보냈다. 스코필드가 찍은 '제암리학살사건' 현장 사진은 국외에 소개되어 일제의 포악상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0년 캐나다로 돌아간 후에는 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사정을 널리 알렸다.
일제 강점기에 베델·맥켄지·스코필드 등과 같은 서양인들은 언론활동으로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
베델(Ernest T. Bethell, 배설(裵說), 1872~1909)은 항일 신문인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하여 일제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였다. 베델은 일제의 불법적이고 강제적인 국권 침략을 언론을 통해 알리고 한국의 국권 회복 운동을 돕다 1909년 5월 1일 36살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맥켄지(Frederick A. McKenzie, 1869~1931)는 1904년 이후 여러 번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1907년에는 경기·충청·강원도의 산속까지 들어가서 직접 의병을 만나 취재를 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비극(쏟 Tragedy of Korea)』,『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을 출간하여 일제의 만행과 식민통치를 알렸다. 이 책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동정과 반일 분위기를 일으키는 데에 기여하였다.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석호필(石虎弼), 1889~1970)는 일제가 경기도 수원 제암리의 주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을 때 현장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국외의 언론 기관에 보냈다. 스코필드가 찍은 '제암리학살사건' 현장 사진은 국외에 소개되어 일제의 포악상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0년 캐나다로 돌아간 후에는 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사정을 널리 알렸다.
정미의병(丁未義兵) 사진
이 사진은 영국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극동 특파원으로 대한제국에 파견된 캐나다 출신의 영국 기자 프레드릭 A. 멕켄지가 1907년 양평에서 찍은 의병사진이다. 멕켄지는 지방의 산속까지 직접 들어가 의병들을 취재하였는데, 군복을 입지 않은 모습에서 의병의 주축이 평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은 영국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극동 특파원으로 대한제국에 파견된 캐나다 출신의 영국 기자 프레드릭 A. 멕켄지가 1907년 양평에서 찍은 의병사진이다. 멕켄지는 지방의 산속까지 직접 들어가 의병들을 취재하였는데, 군복을 입지 않은 모습에서 의병의 주축이 평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암리학살사건 현장 사진
1919년 4월 18일에 프랭크 W. 스코필드가 촬영한 것으로 일제의 방화로 파괴된 제암리 민가의 모습이다.
1919년 4월 18일에 프랭크 W. 스코필드가 촬영한 것으로 일제의 방화로 파괴된 제암리 민가의 모습이다.
제암리학살사건 취재
3.1운동이 일어나면서 경기도 수원에서는 일제의 식민기관, 관공리에 대항하는 만세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일제는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수원 주민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학살과 방화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은 1919년 4월 15일 제암리에 들어가 주민들을 불러 모아 교회 안에 가두고 창문을 통해 총을 쏘아 학살하고 교회 건물과 마을 전체에 불을 놓았다.
3.1운동 당시 AP통신원이었던 앨버트 W. 테일러는 '제암리학살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인 4월 16일 서울 주재 미국 영사 커티스(Raymond S. Curtice),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 선교사와 함께 제암리를 방문하여 취재하였다. 그리고 4월 19일에는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대리 로이즈(William Royds)와 미국 선교사 노블(W. A. Noble) 등과 함께 제암리와 수촌리를 찾아가 현장을 취재하였다.
메리 L 테일러가 쓴 회고록 『호박목걸이』에 따르면, 앨버트는 낮에 영국 영사, 미국 영사와 함께 마을 전체가 불타 버린 모습을 확인하였고 마을이 불타는 광경도 촬영하였다고 한다. 그는 제암리에서의 일제의 잔악 행위를 생존한 주민들에게 직접 들었다. 이렇게 취재한 기사 내용은 AP통신으로 전해져 미국 주요 언론에 보도되었다. 앨버트의 기사는 일본의 반인륜적인 탄압 행위를 알리고, 한국에 우호적인 국제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면서 경기도 수원에서는 일제의 식민기관, 관공리에 대항하는 만세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일제는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수원 주민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학살과 방화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은 1919년 4월 15일 제암리에 들어가 주민들을 불러 모아 교회 안에 가두고 창문을 통해 총을 쏘아 학살하고 교회 건물과 마을 전체에 불을 놓았다.
3.1운동 당시 AP통신원이었던 앨버트 W. 테일러는 '제암리학살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인 4월 16일 서울 주재 미국 영사 커티스(Raymond S. Curtice),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 선교사와 함께 제암리를 방문하여 취재하였다. 그리고 4월 19일에는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대리 로이즈(William Royds)와 미국 선교사 노블(W. A. Noble) 등과 함께 제암리와 수촌리를 찾아가 현장을 취재하였다.
메리 L 테일러가 쓴 회고록 『호박목걸이』에 따르면, 앨버트는 낮에 영국 영사, 미국 영사와 함께 마을 전체가 불타 버린 모습을 확인하였고 마을이 불타는 광경도 촬영하였다고 한다. 그는 제암리에서의 일제의 잔악 행위를 생존한 주민들에게 직접 들었다. 이렇게 취재한 기사 내용은 AP통신으로 전해져 미국 주요 언론에 보도되었다. 앨버트의 기사는 일본의 반인륜적인 탄압 행위를 알리고, 한국에 우호적인 국제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서울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 가옥(딜쿠샤)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
딜쿠샤는 미국인 앨버트 W. 테일러와 아내 메리 L. 테일러가 1924년에 지은 집으로, 페르시아어로 '기쁜마음'이라는 뜻이다. 앨버트 W. 테일러는 운산금광의 광산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1897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광산업과 상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에는 연합통신사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과 3.1운동,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1942년에 조선총독부의 강제 추방에 의해 미국으로 떠났던 앨버트 W. 테일러는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하던 중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1948년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딜쿠샤는 1942년에 테일러 부부가 떠난 후 소유주가 바뀌고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면서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 그러던 중 2006년에 아들 브루스 T. 테일러가 딜쿠샤를 다시 찾으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딜쿠샤의 복원사업을 진행하여 2021년에 시민들에게 공개하였다.
딜쿠샤는 미국인 앨버트 W. 테일러와 아내 메리 L. 테일러가 1924년에 지은 집으로, 페르시아어로 '기쁜마음'이라는 뜻이다. 앨버트 W. 테일러는 운산금광의 광산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1897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광산업과 상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에는 연합통신사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과 3.1운동,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1942년에 조선총독부의 강제 추방에 의해 미국으로 떠났던 앨버트 W. 테일러는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하던 중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1948년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딜쿠샤는 1942년에 테일러 부부가 떠난 후 소유주가 바뀌고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면서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 그러던 중 2006년에 아들 브루스 T. 테일러가 딜쿠샤를 다시 찾으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딜쿠샤의 복원사업을 진행하여 2021년에 시민들에게 공개하였다.
서울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 가옥(딜쿠샤)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
딜쿠샤는 미국인 앨버트 W. 테일러와 아내 메리 L. 테일러가 1924년에 지은 집으로,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이다.
앨버트 W. 테일러는 운산금광의 광산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1897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광산업과 상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에는 연합통신사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과 3·1운동,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1942년에 조선총독부의 강제 추방에 의해 미국으로 떠났던 앨버트 W. 테일러는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하던 중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1948년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딜쿠샤는 1942년에 테일러 부부가 떠난 후 소유주가 바뀌고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면서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 그러던 중 2006년에 아들 브루스 T. 테일러가 딜쿠샤를 다시 찾으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딜쿠샤의 복원사업을 진행하여 2021년에 시민들에게 공개하였다.
딜쿠샤는 미국인 앨버트 W. 테일러와 아내 메리 L. 테일러가 1924년에 지은 집으로,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이다.
앨버트 W. 테일러는 운산금광의 광산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1897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광산업과 상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에는 연합통신사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과 3·1운동,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1942년에 조선총독부의 강제 추방에 의해 미국으로 떠났던 앨버트 W. 테일러는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하던 중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1948년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딜쿠샤는 1942년에 테일러 부부가 떠난 후 소유주가 바뀌고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면서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 그러던 중 2006년에 아들 브루스 T. 테일러가 딜쿠샤를 다시 찾으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딜쿠샤의 복원사업을 진행하여 2021년에 시민들에게 공개하였다.
딜쿠샤 정초석(定礎石)
딜쿠샤(DOLKUSHA)의 정초석에는 "딜쿠샤 1923 『시편』 1927편 1절"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서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편 1절
딜쿠샤를 세울 때 테일러 부부는 마을 사람들의 항의와 무당의 저주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이유는 은행나무와 샘골이 있던 땅을 당시 한국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었던 앨버트 W. 테일러는 어려움 속에서도 딜쿠샤를 잘 완공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 덕분이라는 믿음으로 딜쿠샤의 정초석에 『시편』 127편 1절을 새겨 넣었다.
딜쿠샤(DOLKUSHA)의 정초석에는 "딜쿠샤 1923 『시편』 1927편 1절"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서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편 1절
딜쿠샤를 세울 때 테일러 부부는 마을 사람들의 항의와 무당의 저주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이유는 은행나무와 샘골이 있던 땅을 당시 한국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었던 앨버트 W. 테일러는 어려움 속에서도 딜쿠샤를 잘 완공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 덕분이라는 믿음으로 딜쿠샤의 정초석에 『시편』 127편 1절을 새겨 넣었다.
DILKUSHA 1923
PSALM CXXVII-I
PSALM CXXVII-I
딜쿠샤의 역사
딜쿠샤(DILKUSHA)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으로 앨버트 W.테일러와 메리 L. 테일러 부부가 살던 집의 이름이다. 테일러 부부는 192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25년에 딜쿠샤를 완공하였다. 1926년에는 화재가 발생해 1930년에 재건되었다. 1942년 일제가 테일러 부부를 추방한 후 딜쿠샤는 동생 윌리엄 W. 테일러가 잠시 관리하였다. 이후 1959년에 자유당 조경규의원이 딜쿠샤를 매입하였으나 1963년에 조경규 의원의 재산이 국가로 넘어가면서 딜쿠샤도 국가 소유가 되었다. 그 후로 딜쿠샤는 오랜 기간 방치되어 본모습을 잃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5년에 서일대학교 김익상 교수가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 T. 테일러의 의뢰를 받아 딜쿠샤를 찾아내었다. 2006년 브루스는 마침내 66년 만에 자신이 이런 시절에 살던 딜쿠샤를 방문하였고, 딜쿠샤는 그렇게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딜쿠샤(DILKUSHA)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으로 앨버트 W.테일러와 메리 L. 테일러 부부가 살던 집의 이름이다. 테일러 부부는 192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25년에 딜쿠샤를 완공하였다. 1926년에는 화재가 발생해 1930년에 재건되었다. 1942년 일제가 테일러 부부를 추방한 후 딜쿠샤는 동생 윌리엄 W. 테일러가 잠시 관리하였다. 이후 1959년에 자유당 조경규의원이 딜쿠샤를 매입하였으나 1963년에 조경규 의원의 재산이 국가로 넘어가면서 딜쿠샤도 국가 소유가 되었다. 그 후로 딜쿠샤는 오랜 기간 방치되어 본모습을 잃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5년에 서일대학교 김익상 교수가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 T. 테일러의 의뢰를 받아 딜쿠샤를 찾아내었다. 2006년 브루스는 마침내 66년 만에 자신이 이런 시절에 살던 딜쿠샤를 방문하였고, 딜쿠샤는 그렇게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테일러 부부의 결혼과 한국 입국
미국인 사업가 앨버트 W. 테일러와 영국인 연국배우였던 메리 L. 테일러는 호박 목걸이로 인연을 맺어 1917년 인도에서 결혼하였다. 앨버트와 매리의 결혼은 당시 주목을 받으면서 신문에도 소개되었다. 신혼여행을 겸하여 3개월에 걸친 여정 끝에 한국에 입국한 테일러 부부는 '작은 회색집(The Little Gray Home)'이라고 불리던 서대문의 한옥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테일러 부부는 인왕산의 끝자락, 큰 은행나무가 있는 행촌동에 '기쁜 마음'이라는 뜻의 '딜쿠샤(DILKUSHA)'를 지었다. 테일러 가족은 1924년 봄에 딜쿠샤에 입주하였으며, 1942년 조선총독부가 외국인 추방령으로 앨버트와 메리를 한국에서 추방할 때까지 딜쿠샤에서 거주하였다.
미국인 사업가 앨버트 W. 테일러와 영국인 연국배우였던 메리 L. 테일러는 호박 목걸이로 인연을 맺어 1917년 인도에서 결혼하였다. 앨버트와 매리의 결혼은 당시 주목을 받으면서 신문에도 소개되었다. 신혼여행을 겸하여 3개월에 걸친 여정 끝에 한국에 입국한 테일러 부부는 '작은 회색집(The Little Gray Home)'이라고 불리던 서대문의 한옥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테일러 부부는 인왕산의 끝자락, 큰 은행나무가 있는 행촌동에 '기쁜 마음'이라는 뜻의 '딜쿠샤(DILKUSHA)'를 지었다. 테일러 가족은 1924년 봄에 딜쿠샤에 입주하였으며, 1942년 조선총독부가 외국인 추방령으로 앨버트와 메리를 한국에서 추방할 때까지 딜쿠샤에서 거주하였다.
앨버트 W. 테일러
1875년 미국의 네바다(Nevada)주에서 출생한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는 광산기술자였던 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GHeorge Alexander Taylor)의 일을 돕기 위해 1897년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앨버트 W. 테일러는 영국 출신 연극배우였던 메리 린리와 사랑에 빠져 1917년 인도에서 결혼하였다. 앨버트는 한국에서 광산과 '테일러 상회'를 경영하였으며, 1919년 AP통신(Associated Press)의 한국 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고종 국장(國葬)과 3.1운동, 제암리학살 사건, 독립운동가의 재판 등을 취재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자 1942년 조선총독부는 테일러 부부를 추방하였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했던 앨버트는 1948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아내 메리는 늘 한국을 그리워하던 앨버트를 한국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어 주었다.
메리 L. 테일러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는 1889년 9월 영국 첼트넘(Cheltenham)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결혼 전 이름은 힐다 무아트 빅스(Hilda Mouat-Biggs)로 모험을 좋아하고 독립심이 강했다. 그녀는 부모의 바람으로 프랑스 신부학교에 입학했다가 그 길을 거부하고, 연극배우 '메리 린리(Mary Linley)'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메리는 인도, 홍콩 등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순회공연을 하던 중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앨버트 W. 테일러를 만났다. 둘은 1917년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한국에 입국해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메리는 한국에서도 자신의 특기를 살려 친구들과 함께 연극 공연을 하였고,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의 풍경과 한국 사람을 그린 그림을 많이 남겼다. 1948년 앨버트가 사망하자 메리는 가족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남편의 유해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간 메리는 1982년 캘리포니아 멘도시노(Mendocino)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875년 미국의 네바다(Nevada)주에서 출생한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는 광산기술자였던 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GHeorge Alexander Taylor)의 일을 돕기 위해 1897년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앨버트 W. 테일러는 영국 출신 연극배우였던 메리 린리와 사랑에 빠져 1917년 인도에서 결혼하였다. 앨버트는 한국에서 광산과 '테일러 상회'를 경영하였으며, 1919년 AP통신(Associated Press)의 한국 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고종 국장(國葬)과 3.1운동, 제암리학살 사건, 독립운동가의 재판 등을 취재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자 1942년 조선총독부는 테일러 부부를 추방하였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했던 앨버트는 1948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아내 메리는 늘 한국을 그리워하던 앨버트를 한국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어 주었다.
메리 L. 테일러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는 1889년 9월 영국 첼트넘(Cheltenham)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결혼 전 이름은 힐다 무아트 빅스(Hilda Mouat-Biggs)로 모험을 좋아하고 독립심이 강했다. 그녀는 부모의 바람으로 프랑스 신부학교에 입학했다가 그 길을 거부하고, 연극배우 '메리 린리(Mary Linley)'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메리는 인도, 홍콩 등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순회공연을 하던 중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앨버트 W. 테일러를 만났다. 둘은 1917년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한국에 입국해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메리는 한국에서도 자신의 특기를 살려 친구들과 함께 연극 공연을 하였고,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의 풍경과 한국 사람을 그린 그림을 많이 남겼다. 1948년 앨버트가 사망하자 메리는 가족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남편의 유해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간 메리는 1982년 캘리포니아 멘도시노(Mendocino)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기쁜 마음, 딜쿠샤
앨버트 W. 테일러와 메리 L.테일러는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산책하다가 은행나무가 있는 넓은 땅을 발견하였다. 이곳은 예부터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행촌동(杏村洞)'이었는데, 은행나무에 마음을 빼앗긴 메리는 이곳에 집을 짓고 싶어했다. 그러다 얼마 후 은행나무가 있는 땅의 주인이 사망했고, 이 소식을 들은 앨버트는 바로 그 땅을 매입해 집을 지었다. 메리는 자신들의 집에 '딜쿠샤(기쁜마음, DILKUSHA)'라는 이름을 붙였다. 딜쿠샤는 메리가 인도에서 방문했던 러크나우의 궁전이었는데, 언젠가 자신에게도 집이 생긴다면 이 이름을 붙이겠다고 결심했다. 1923년에 착공하여 1924년에 완공된 딜쿠샤는 마을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은행나무와 까치샘이 있는 곳에 지어졌다는 이유로 공사 초기 주민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딜쿠샤는 1926년에 벼락을 맞고 화재가 발생해 1930년에 재건하였다.
앨버트 W. 테일러와 메리 L.테일러는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산책하다가 은행나무가 있는 넓은 땅을 발견하였다. 이곳은 예부터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행촌동(杏村洞)'이었는데, 은행나무에 마음을 빼앗긴 메리는 이곳에 집을 짓고 싶어했다. 그러다 얼마 후 은행나무가 있는 땅의 주인이 사망했고, 이 소식을 들은 앨버트는 바로 그 땅을 매입해 집을 지었다. 메리는 자신들의 집에 '딜쿠샤(기쁜마음, DILKUSHA)'라는 이름을 붙였다. 딜쿠샤는 메리가 인도에서 방문했던 러크나우의 궁전이었는데, 언젠가 자신에게도 집이 생긴다면 이 이름을 붙이겠다고 결심했다. 1923년에 착공하여 1924년에 완공된 딜쿠샤는 마을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은행나무와 까치샘이 있는 곳에 지어졌다는 이유로 공사 초기 주민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딜쿠샤는 1926년에 벼락을 맞고 화재가 발생해 1930년에 재건하였다.
1층 거실
일층에 있는 너비 14미터의 넓은 거실은 그 앞에 있는 포치에 가려서 많이 어두웠기 때문에 벽에 황금빛이 도는 노란색 페인트를 칠했다. 이 거실은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디너파티나 연회, 무도회에 사용되었다. 「호박목걸이(Chain of Amber)」 중에서······
딜쿠샤의 1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지인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여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거실 벽면은 한국의 습한 장마철을 대비해 벽지를 붙이는 대신 페인트로 칠해 꾸몄고, 뒤쪽 벽에는 벽난로가 있는 넓고 깊은 잉글누크(Inglenook)를 만들었다. 벽난로의 양쪽에는 등받이가 높은 나무 의자를 두어 안락한 공간을 만들었으며, 겨울에는 대형 난로를 하나 더 놓아 한국의 매서운 추위에 대비했다. 계단 옆에는 큰 소리로 째깍거리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거실 전체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포치로 나가는 곳은 출입문과 함께 양쪽으로 여는 큰 유리문을 세 개 더 설치하였다.
① 앤틱식탁 및 의자 ② 괘종시계 ③ 코너 벤치 ④ 삼층장 ⑤ 경기도반닫이 ⑥ 난로 ⑦ 벽등 ⑧ 식탁보 ⑨ 은촛대와 컵 ⑩ 종 ⑪ 은제 컵 ⑫ 조상 초상 판화 ⑬ 가문 문장 ⑭ 칼튼하우스데스크
일층에 있는 너비 14미터의 넓은 거실은 그 앞에 있는 포치에 가려서 많이 어두웠기 때문에 벽에 황금빛이 도는 노란색 페인트를 칠했다. 이 거실은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디너파티나 연회, 무도회에 사용되었다. 「호박목걸이(Chain of Amber)」 중에서······
딜쿠샤의 1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지인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여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거실 벽면은 한국의 습한 장마철을 대비해 벽지를 붙이는 대신 페인트로 칠해 꾸몄고, 뒤쪽 벽에는 벽난로가 있는 넓고 깊은 잉글누크(Inglenook)를 만들었다. 벽난로의 양쪽에는 등받이가 높은 나무 의자를 두어 안락한 공간을 만들었으며, 겨울에는 대형 난로를 하나 더 놓아 한국의 매서운 추위에 대비했다. 계단 옆에는 큰 소리로 째깍거리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거실 전체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포치로 나가는 곳은 출입문과 함께 양쪽으로 여는 큰 유리문을 세 개 더 설치하였다.
① 앤틱식탁 및 의자 ② 괘종시계 ③ 코너 벤치 ④ 삼층장 ⑤ 경기도반닫이 ⑥ 난로 ⑦ 벽등 ⑧ 식탁보 ⑨ 은촛대와 컵 ⑩ 종 ⑪ 은제 컵 ⑫ 조상 초상 판화 ⑬ 가문 문장 ⑭ 칼튼하우스데스크
테일러 가족의 한국에서의 생활
앨버트 W. 테일러의 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는 미국이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획득한 후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광산 기술자 중 한 명이었다. 앨버트와 그의 동생 윌리엄은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이듬해인 1897년 조선에 입국하였다. 앨버트는 운산금광과 직산금광에서 감독관과 총 관리인으로 일한 후 1936년 부터는 음첨골금광을 경영하였다. 또한 동생과 함께 '테일러 상회'를 경영하며 한국에서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테일러 가족은 한국에서 아름다운 금강산을 여행하였고, 무더운 여름이면 강원도 화진포와 원산 갈마해변에서 휴가를 즐겼다. 또한 경성에 거주하던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서울구락부(Seoul Club)와 서울유니온구락부(The Seoul Union)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친목을 쌓았다.
앨버트 W. 테일러의 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는 미국이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획득한 후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광산 기술자 중 한 명이었다. 앨버트와 그의 동생 윌리엄은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이듬해인 1897년 조선에 입국하였다. 앨버트는 운산금광과 직산금광에서 감독관과 총 관리인으로 일한 후 1936년 부터는 음첨골금광을 경영하였다. 또한 동생과 함께 '테일러 상회'를 경영하며 한국에서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테일러 가족은 한국에서 아름다운 금강산을 여행하였고, 무더운 여름이면 강원도 화진포와 원산 갈마해변에서 휴가를 즐겼다. 또한 경성에 거주하던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서울구락부(Seoul Club)와 서울유니온구락부(The Seoul Union)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친목을 쌓았다.
한국 유람과 서울구락부
테일러 가족은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곳을 여행하며 아름다운 한국의 풍경을 경험하였다. 메리 L. 테일러는 원산의 호텔에 머물 때 금강산여행 안내서를 읽은 후 아름다운 금강산의 매력에 빠졌다. 1939년에 메리는 아들 블루스 T. 테일러와도 내금강을 여행하였는데, 메리는 이때 보았던 아름다운 금강산의 모습을 그림과 기사로도 남겨 놓았다. 또한 여름이면 무더위를 피해 강원도 원산 갈마 해변의 별장(더 헤이븐, The Haven)과 강원도 화진포의 별장(에이트 벨스, Eight Bells)에서 휴가를 보냈다.
한편 테일러 부부는 당시 경성에 거주하던 외국인들과 함께 서울구락부(Seoul Club)와 서울유니온구락부(The Seoul Union)에서 다양한 친목활동을 하며 지냈다. 서울구락부는 1892년 서울에 거주하던 외교관들이 만든 '외교관구락부(Diplomatic Consular Club)’가 1902년에 이름을 바꾼 것으로 당시 다양한 국가의 외국인들이 참여하는 사교 단체였다. 1888년에 만들어진 서울유니온구락부는 서울에 거주하던 서양인들의 모임으로 주로 테니스와 수영, 당구 등의 체육 활동을 했으며, 각종 모임, 예배, 강연을 열기도 했다. 메리 L.테일러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서울여성구락부(Women’s Club in Seoul)'에서 연극부장을 맡아 공연을 열기도 했다.
테일러 가족은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곳을 여행하며 아름다운 한국의 풍경을 경험하였다. 메리 L. 테일러는 원산의 호텔에 머물 때 금강산여행 안내서를 읽은 후 아름다운 금강산의 매력에 빠졌다. 1939년에 메리는 아들 블루스 T. 테일러와도 내금강을 여행하였는데, 메리는 이때 보았던 아름다운 금강산의 모습을 그림과 기사로도 남겨 놓았다. 또한 여름이면 무더위를 피해 강원도 원산 갈마 해변의 별장(더 헤이븐, The Haven)과 강원도 화진포의 별장(에이트 벨스, Eight Bells)에서 휴가를 보냈다.
한편 테일러 부부는 당시 경성에 거주하던 외국인들과 함께 서울구락부(Seoul Club)와 서울유니온구락부(The Seoul Union)에서 다양한 친목활동을 하며 지냈다. 서울구락부는 1892년 서울에 거주하던 외교관들이 만든 '외교관구락부(Diplomatic Consular Club)’가 1902년에 이름을 바꾼 것으로 당시 다양한 국가의 외국인들이 참여하는 사교 단체였다. 1888년에 만들어진 서울유니온구락부는 서울에 거주하던 서양인들의 모임으로 주로 테니스와 수영, 당구 등의 체육 활동을 했으며, 각종 모임, 예배, 강연을 열기도 했다. 메리 L.테일러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서울여성구락부(Women’s Club in Seoul)'에서 연극부장을 맡아 공연을 열기도 했다.
딜쿠샤로의 귀향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한국에 거주하던 적국국민들을 수용소에 구금하였다. 앨버트 W. 테일러도 이떄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사우어하우스에 구금되었고, 메리 L. 테일러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구금에서 풀려난 후 테일러 부부는 1942년 조선총독부의 외국인추방령에 따라 강제로 한국을 떠나야 했다. 앨버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던 중 1948년 6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메리는 남편의 유해와 함께 1948년 9월 인천으로 입국하였다. 일제가 테일러 부부를 추방한 지 6년 만이었다. 마음의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항상 바랐던 앨버트는 '양화진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아버지 옆에 묻혔다. 메리는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딜쿠샤를 방문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한국에 거주하던 적국국민들을 수용소에 구금하였다. 앨버트 W. 테일러도 이떄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사우어하우스에 구금되었고, 메리 L. 테일러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구금에서 풀려난 후 테일러 부부는 1942년 조선총독부의 외국인추방령에 따라 강제로 한국을 떠나야 했다. 앨버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던 중 1948년 6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메리는 남편의 유해와 함께 1948년 9월 인천으로 입국하였다. 일제가 테일러 부부를 추방한 지 6년 만이었다. 마음의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항상 바랐던 앨버트는 '양화진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아버지 옆에 묻혔다. 메리는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딜쿠샤를 방문하였다.
2층 거실
이 응접실이야말로 우리 집에서 제일 중요한 곳으로 딜쿠샤의 심장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아끼는 물건들과 여가 시간을 즐길 만한 것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호박목걸이(Chain of Amber)』 중에서······
딜쿠샤의 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이었다. 벽난로 위에는 앨버트 W. 테일러가 수집한 고려청자들이 놓여 있었고, 고려청자들 사이에는 다양한 형태의 말 모형들이 있었다. 자수나 그림으로 된 열 폭의 큰 병풍도 있었는데, 테일러 부부는 조선의 궁궐에서 쓰던 방식대로 병풍들을 폈다 접었다 하면서 벽을 만들거나 방의 크기를 조절하였다. 2층의 베란다는 '티켈(Tickell) 테라스'라고 불렀는데, 날씨가 더울 때는 대나무 기둥 위로 자라난 등나무 덩굴이 포치 전체에 그늘을 만들어, 하늘색 페인트로 칠한 거실이 마치 계곡처럼 초록빛이 되었다.
① 코너 벤치 ② 이지체어 ③ 벤치형 의자 ④ 모자이크램프 ⑤ 라운지체어 ⑥ 조각테이블 ⑦ 주칠원반 ⑧ 삼층장 ⑨ 난로 ⑩ 램프테이블 ⑪ 페르시아산 러너 ⑫ 자수화조도병풍 ⑬ 수납장 ⑭ 궤 ⑮ 너싱체어 ⑯ 슬랙램프 ⑰ 사이드테이블 ⑱ 비연호 ⑲ 도자기 말 모형 ⑳ 옥제 나무공예품
이 응접실이야말로 우리 집에서 제일 중요한 곳으로 딜쿠샤의 심장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아끼는 물건들과 여가 시간을 즐길 만한 것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호박목걸이(Chain of Amber)』 중에서······
딜쿠샤의 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이었다. 벽난로 위에는 앨버트 W. 테일러가 수집한 고려청자들이 놓여 있었고, 고려청자들 사이에는 다양한 형태의 말 모형들이 있었다. 자수나 그림으로 된 열 폭의 큰 병풍도 있었는데, 테일러 부부는 조선의 궁궐에서 쓰던 방식대로 병풍들을 폈다 접었다 하면서 벽을 만들거나 방의 크기를 조절하였다. 2층의 베란다는 '티켈(Tickell) 테라스'라고 불렀는데, 날씨가 더울 때는 대나무 기둥 위로 자라난 등나무 덩굴이 포치 전체에 그늘을 만들어, 하늘색 페인트로 칠한 거실이 마치 계곡처럼 초록빛이 되었다.
① 코너 벤치 ② 이지체어 ③ 벤치형 의자 ④ 모자이크램프 ⑤ 라운지체어 ⑥ 조각테이블 ⑦ 주칠원반 ⑧ 삼층장 ⑨ 난로 ⑩ 램프테이블 ⑪ 페르시아산 러너 ⑫ 자수화조도병풍 ⑬ 수납장 ⑭ 궤 ⑮ 너싱체어 ⑯ 슬랙램프 ⑰ 사이드테이블 ⑱ 비연호 ⑲ 도자기 말 모형 ⑳ 옥제 나무공예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