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혁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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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632-9 뒤편 골목길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영원한 청년 박재혁 의사
부산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1920. 9. 14
박재혁의 의거 그리고 그의 고통과 죽음은 부산 근대와 부산 정신사에서 하나의 엄숙한 항목이다. 부산의 근대는 찢긴 근대였고 특히 부산은 일제 수탈의 맨 앞에서 거의 벌거벗은 채 놓여 있었는데 요컨데 벌거벗은 채 찢긴 것이 박재혁의 고통이었다. 그는 왜 그토록 지독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으며, 그 고통에 이른 그의 의거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 고통 속에서 깃든 것, 그 역사적 맥락과 정신을 찾아내 세워야 하는 것이다. 박재혁 의거는 식민지하 찢긴 근대의 좌표 속에 우리의 자각을 만들어갔다. 계몽적 흐름과 근대학교 설립에 뿌리를 두면서 이윽고 뜨거운 부산정신을 선포했던 것이다.
박재혁 의거는 식민치하 찢긴 근대의 좌표 속에 우리의 자각을 만들어갔던 계몽적 흐름과 근대학교 설립에 뿌리를 부면서 이루고 뜨거운 부산 정신을 선포했던 것이다.

독립운동은 단순히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일운동이면서 반제국주의운동이었고, 또한 근대 민족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이었다. 독립운동은 쓰러진 식민지 경험을 거친 우리 근대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피압박과 저항을 통해 근대를 잊힐 수 밖에 없었다. 그 고난의 강에서 피압박과 저항의 근대인으로 박재혁이 있다는 것이다. 남영사상-청년운동-근대 부산진 그룹이라는 세 가지 요소는 박재혁 의거를 떠받치고 있는 손발같은 것이다. 거기에 부산 근대를 관통하는 정신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올바로 세워야 한다.

박재혁의 의혈투쟁은 민주화를 향한 열정을 불태운 부산 역사의 뿌리에 있을 것이다.

-영원한 청년 의사 박재혁 중에서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 박재혁 의사 옥중 말씀 중
■ 1915년 부산부청과 부산경찰서 가운데에서 오른쪽에 위치한 건물이 박재혁 의사가 거사한 부산경찰서이다.
■ 박재혁 의사 의거터
■ 부산일보 호외(1920년 9월 14일)
영원한 청년 박재혁 의사
■ 투탄 전 친구 최천택과 함께
■ 박재혁 의사 건국훈장(독립장_1962.3.1)
■ 국립서울현충원 박재혁 의사 묘
▲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때 급우들과 함께 – 왼쪽 흰색 한복 박재혁 학생
▲ 정공단의 친구이자 동지 –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박재혁, 최천택, 오재영(오택), 김영주, 왕치덕, 김인택
▲ 박재혁 의사 출신학교 부산공립상업학교 조회 모습
▲ 박재혁 의사 졸업 기념사진 – 부산공립상업학교 제4회 졸업(1915.03.22)
조국독립을 위하여 청춘을 바친 청년 박재혁 의사 거리
이광수 선생 안내판 옆으로 박재혁 선생의 안내판들이 건립되어 있었다.
박재혁 朴載赫
1895~1921

왜놈 손에 죽임을 당하느니 오히려 내손으로 목숨을 꺾어 버리겠다.
- 박재혁 의사 옥중 말씀 중에서 -

1895년 5월 17일 경상남도 부산부 범일동 183번지에서 아버지 박희선과 어머니 이치수의 1남 1녀, 독자로 태어나 부산진사립육영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를 거처 부산공립상업학교(부산상고, 현 개성고)에 입학하였다.

박재혁은 부산진사립육영학교 재학 중, 교장 김상하 외 최천택, 김영주, 백용수 등 75명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고,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재학 중 최천택, 김병태, 박홍규 등과 동국역사 책 등사 배포사건으로 주모자 박재혁 등은 일제 경찰에 불온학생으로 낙인찍혔으며, 이듬해 비밀결사인 '구세단'을 결성 후 활동 적발로 일제 부산경찰서에 구금되는 등 학창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부양과, 독립운동에 기여하기 위하여 친척 박국선이 경영하는 경북 왜관역전의 곡물무역상에서 일을 하다 상해와 싱가포르를 오가며 인삼 등의 무역업을 하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1920년 4월 의열단에 입단,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부산경찰서장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박재혁은 폭탄 한개와 거사비용 등을 가지고 상해에서 일본을 거쳐 부산으로 넘어와, 같은 해 9월 14일 오후 2시 40분경 부산경찰서로 들어가 하시모토 서장 앞에서 폭탄을 터뜨렸으나 하시모토 서장은 경상, 박재혁은 중상을 입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21년 경성고등법원에서 원판결 무기징역은 취소되고 사형이 확장되었으나, 대구감옥에서 복역 중 왜놈 손에 죽기 싫다며 옥중 단식을 하다 순국하였다.

1962년 3월 1일 박재혁 의사에게 건국훈장 단장(현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69년 박재혁의사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12년 8월 14일 부산동구청은 범일동 조방로 630m 구간을 박재혁 거리로 명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