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시립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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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교동5길 2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양산시 교동 306-1 춘추공원 내에 양상시립독립기념관이 개관하여 찾았다.
양산시립독립기념관
1906년 통도사 경내 명신학교 설립
1908년 서병희 의병장 양산및 경남에서 활동
1909년 서병희 의병장 순국
1911년 양산공립보통학교(현 양산초등학교) 설립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결성. 윤현진의 형 윤현태 관여
1916년 통도사 지방학림 개설
1919년 4차례 만세운동 전개, 김철수 동경2.8독립선언 주도, 윤현진 상해 임시정부 초대재무차장 선임, 이규홍, 윤현진 임시정부 국무위원
1920년 양산청년회 결성, 의춘상행 설립
1921년 9월 17일 상해에서 윤현진 서거
1922년 양만우, 친일 승려 강대련 교단 축출(명고축출사건), 양산부인회 조직
1925년 신흥동우회 결성
1926년 양산 최초의 노동단체 노우(勞友)동맹조직
1927년 양산청년동맹 결성
1928년 신간회 양산지회 결성
1931년 양산농민조합 조직
1932년 양산농민조합 양산경찰서 시위운동 전개
1934년 통도중학교(현 보광중학교) 개교
1938년 강성욱, 양산 원동면에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집 사실 전파
1941년 김말복, 조병구 통도중학교에서 민족의 역사 교육 및 배일 사상 전파
1942년 서장주, 요코하마에서 항일운동 전개
서병희와의 인연, 김병희·김교상 부자의 의병활동
서병희의 고향인 좌삼에서 1㎞ 떨어진 상삼마을에는 김병희(金柄熙)가 살았다. 김병희와 서병희는 16살 차이가 나는데 김병희가 동몽교관으로 후진양성랑 때 어린 시절의 서병희가 인근 마을에 살았기에 배우러 다녔을 것으로 보인다. 그 아들 김교상(金敎相)과는 5살 차이가 나므로 형과 아우로 지냈을 수도 있다. 이런 인연으로 김병희 부자는 서벙희에게 군자금 5천엔을 건넨 바 있다. 서병희가 하북면 성천리에서 일본인을 참살한 사건 후 울산수비대는 의병소탕작전에 나섰다, 그 전부터 양산 천성산 주변 내원사, 웅상 일원에는 서병희의 의병이 있던 곳이라 일본군경의 철저한 수색대상이었다. 김병희가 살았던 상삼마을에는 일본 군경이 변장하여 숨어 있었다. 김병희와 김교상 부자는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포수 수 십명을 상시 고용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잠복한 일본군이 화적떼라고 생각하고 1908년 6월 26일 11시경 교전을 벌였다. 교전은 김교상이 김병희와 함께 자신의 집에 은닉해 둔 총기를 발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잠시 후 김교상이 이들이 일본 수비대임을 알고 사격을 중지했으나, 일본군은 관병임을 알고도 고희로 발포한 것이라 하여 김교상 부자를 체포하고 무기를 압수한 후 심문하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군은 김병희 부자를 보복 고문한 뒤 하북면 성천마을앞 통도사 자비도량 근처의 소나무에 3일간 매단 뒤 처형시켰고, 삼감마을 우동신 노인과 구하스님이 거두었다고 한다.
양산의 의병전쟁과 서병희(徐丙熙, 1867~1909)
양산 상북면 좌삼리(左森里) 출생으로 1881년(고종 18)까지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1887년에 상경하여 한의학을 배워 양산에서 한의원을 경영하였다. 을사보호조약으로 국운이 기우는 모습에 한탄했던 서병희는 1907년(순종 즉위년) 의병장 허위(許蔿)의 휘하에 들어갔다.
1908년 1월 13도 연합군의 서울탈환 작전에 결사대 300명의 선봉장으로 참여했으나 실패한 후, 허위의 밀지에 따라 영남으로 내려와 의병을 일으켰다. 부대원 51명과 함께 경주 산내면의 윤정의(尹政儀)와 연합하여 병력 68명, 화승총 58정·양총 2정·군도 1진으로 부대를 재편하였다. 이후 서병희는 울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 많은 타격을 입혔다. 1908년 3월에는 경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였다. 1908년 경상남도 산청으로 이동해 의병장 박동의(朴東儀) 휘하에 들어가 이학로(李學魯)와 함께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여 큰 피해를 입혔다. 서병희는 1909년 3월에 이학로로부터 독립해 독자적인 부대 편제를 갖추고, 함안, 창원, 진주 등 경상남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909년 10월 11일에 체포되었다. 취조 과정에서도 끝까지 부하들의 이름과 잠복지 등을 밝히지 않고 향년 43세로 순국하였다. 국권 상실을 끝까지 막기 위해서 의병활동을 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양산시 상북면 수서로 159(좌삼리 97번지)에 그의 생가가 있었으나 현재에는 멸실되고 공터만 남아 있다.
신평만세운동
3월 5일 한용운의 밀명을 받은 오택언은 독립선언서를 한가득 가지고 통도사에 도착하였으나 3월 7일 밀고로 주동자로 피검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우스님(양대응, 梁大應)을 중심으로 김진옥, 박세문, 이기주 등과 함께 거사는 차질없이 추진되었다.
만우스님은 통도사 지방학림(현 보광중학교)의 학생대표 김상문, 통도사 강원 승려 등과 함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3월 13일 신평장날을 택하고 만세운동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예정대로 3월 13일 신평 장날에 하북면 줄다리기 대회를 빙자하여 군중집회가 개최되었으며 거사 당일 통도사 부속 보통학림 및 지방 학림 학생 김상문을 위시한 수십 명의 불교 전수부 학생, 승려 등이 줄다리기 군중 및 장꾼들과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전단을 배포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를 감행하였다.
뒤늦게 사건을 접수한 헌병경찰이 현장을 급습하자 군종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주모자 김진욱은 체포되었으며, 김상문은 피신 후 상해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하북면사무소에 근무한 박세문은 거사에 참여하고 주동자들을 피신시키기도 하였다.
만해 한용운의 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 단상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2일 개성, 3일 예산 등으로 이어졌고 19일에는 괴산, 21일에는 제주까지 이어져 전국 13도에 골고루 파급되었다.
이러한 만세운동의 확산 과정에서 불교계에서도 서울 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지방까지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특히 한용운은 2월 28일 밤 중앙학림 학생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 모아 수개월동안 준비한 독립만세운동 과정을 설명하고 3천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었다. 이날의 참석자는 김봉신(金奉信), 신상완(申尙玩), 김대용(金大鎔), 오택언(吳澤彦), 김법린(金法麟), 박민오(朴玟悟) 등이었다.
한용운은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건네주고, 이를 시내에 배포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중앙학림 학생들은 한용운의 밀명을 위해 자리를 옮겨 긴급회의를 하였다. 가장 연장자인 신상완을 총 참모로 추대하였고, 백성욱과 박민오는 서울에 남아 연락망 및 지휘를 맡았다. 각 지방을 담당한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은 3월 1일, 서울 시내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몸에 소중히 간직하고 그날 밤 각 지방의 사찰로 향하여 그 지방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지도하였다. 정병헌은 구례 화엄사, 김대용은 대구 동화사, 김법린·김상헌은 동래 범어사, 김봉신은 합천 해인사를 담당하였다. 양산의 통도사(通度寺) 방면은 이 사찰 출신의 오택언(吳澤彦)이 불교중앙학림 대표로 내려왔으며, 그 때가 3월 5일이었다.
양산장터 만세운동 (1차 의거 1919.3.27)
엄주태(嚴柱泰)는 동래시장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양산공립보통학교로 가서 전병건(全秉健)과 함께 3월 27일 양산읍 장날을 기하여 선언서를 배부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7일 엄주태와 전병건은 선언서를 양산군청 사환 정주봉(鄭周奉)에게 부탁하여 50매를 등사하였고, 3월 25일에는 정주봉에게 양산군청 등사판을 중부동(中部洞) 엄주태 집으로 옮기게 한 후, 독립선언서 200매와 공약서, 경고문 등을 등사하고 큰 깃발도 만드는 등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27일 장날을 맞이하여 장꾼 3,000여 명이 모여 있는 가운데 주동자들은 시장 중앙에서 선언서를 배포한 후 독립만세를 외쳤고 군중들이 적극 호응하였다. 경찰이 해산을 시도하고 주동자를 검거하자, 시위군중은 양산헌병분견소(梁山憲兵分遣所)와 군청으로 몰려가서 항의하였다. 헌병은 실탄을 발사하며 군중에 해산시키려 했으나 해산하기는커녕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사태가 급박해지자 부산헌병분대에서 12명의 군인을 급파하여 시위대와 계속해서 대치하다가, 검거된 주동자들을 석방을 전제로 시위대는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양산헌병분견소는 엄주태를 비롯한 주동자들을 다시 구속하였다.

양산장터 만세운동(2차 의거, 1919.4.1)
3월 27일 양산시장 만세운동에서 주동자들이 재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중들이 다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검거를 피한 이상환(李相煥)과 류경문(柳敬文) 등이 중심이 되어 4월 1일 오후 2시경 궐기하였다. 2,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양산 시가지를 누비며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양산헌병 분견소로 진격하여 구속자 석방을 외쳤다, 이 2차 의거에서 이상환, 류경문 등이 검거되었다.
양산장터 만세운동 전개지도
① 양산군청 ② 양산헌병분견소 ③ 양산우체국 ④ 양산면사무소 ⑤ 양산공립보통학교 ⑥ 양산금융조합 ⑦ 양산심상소학교 ⑧ 양산장터 만세운동 진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