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의병발상지 표지석(양동만세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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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418-3
탐방로그
경기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418-3 양동만세공원에 위치한 을미의병발상지 표지석을 찾았다. 양동만세공원 내에는 을미의병발상지 표지석 외에도 양동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도 함께 위치해 있다. 2013년, 양동역사만들기사업 추진위원회에서 이곳에 양동만세공원 조성사업을 추진, 양동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세웠고 2014년, 부지 포장 및 조경 공사와 을미의병발상지 표지석을 이전하여,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을 높이 선양하고, 후손에게 위국충절과 겨레사랑의 정신을 이어받게 하고자, 양평군과 양동면민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이 공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양동만세공원 조성 취지문
1919년 4월 7일(을미년) 지평군 상동면(지금의 양평군 양동면) 주민 등 3천 여(일제 추산) 군중이 상동면사무소 앞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를 진압하려는 일제 기마헌병의 무자비한 총칼로 강제 해산되니, 사상자가 다수이고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거나 태형을 받고 풀려난 사람 또한 수십 명이었다. 그해 서울에서 시작된 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보다 24년 앞선 1895년 퇴앙 안종응의 집(양동면 석곡리 355번지, 사이실 마을)에서 선생의 주도하에 이춘영, 안승우와 청운면 출신 김백선 의병장을 중심으로 창의 출병하여, 후에 호좌의진의 중추를 이루니, 이를 을미의병, 지평의병 또는 전기의병이라고 하는데 최초의 의병 봉기로서 의병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효시가 됐고 후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양동은 개항 이후 의병운동의 발상지일 뿐 아니라 양동기미독립만세운동을 통해 3.1운동을 확산시킨 의향이다. 이에 2013년, 양동역사만들기사업 추진위원회에서 이곳에 양동만세공원 조성사업을 추진, 양동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세웠고 2014년, 부지 포장 및 조경 공사와 을미의병발상지 표지석을 이전하여,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을 높이 선양하고, 후손에게 위국충절과 겨레사랑의 정신을 이어받게 하고자, 양평군과 양동면민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이 공원을 조성하였다.
2015년 6월 6일 양동면장 이금훈
을미의병발상지
을미의병발상지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양평의병묘역아래 사이실 355번지 집터(301평)는 퇴앙 안종응, 하사 안승우, 우하 안기영 3대가 출생하여 세거한 곳으로 '을미의병' 발상지이다. 양동은 당시 지평현 상동면이었으므로 '지평의병'이라고도 한다.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한국을 병탄하려고 국권을 농락하더니, 마침내 1895년(乙未) 우리나라의 중전 민 황후를 학살하고 단발령을 강제로 실시하는 등 우리 조국과 민족을 강점하여 식민지화하려는 야만성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에 의분을 참지 못한 퇴앙이 동지들과 거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하사의 친우인 석곡리 목골출신 괴은 이춘영 의사가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찾아와 퇴앙과 계책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괴은은 청운면으로 가서 김백선 의사를 만나 거의하기로 하고 의병 400명을 모집하여 원주 안창으로 집결시켰다. 퇴앙은 제천에 있는 하사에게 명하기를,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의암 류인석 선생에게 의병참여와 계책을 문의하여 안창으로 오라고 하였다. 하사가 명을 수행하여 일행과 함께 안창 만수암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이춘영ㆍ김백선ㆍ 김사정 여러 의사와 더불어 창의 호국투쟁을 결의하고 음력 11월 28일 안창역에서 장수 괴은 이춘영이 단상에 올라 깃발을 높이 드니, 전국에서 가장 먼저였다. 의병진은 원주를 점령하고 제천으로 진격하여 류인석 선생을 대장에 추대하였다. 류인석 대장은 의병진을 재편하고 장기항전에 들어가 연합의진으로 발전하여 충주성을 빼앗으려고 항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류인석 선생은 재기를 꿈꾸며 의병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갔으나 1896년 음력 7월 31일 회인현 사첨자 파저강변에서 창의 8개월 만에 무장해제 되어 해산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가장 방대하고 가장 치열하고 가장 장기화된 항쟁으로, 독립투쟁으로 이어졌다. 이상으로 보면 양동면 석곡리 355번지 집터는 화서학파가 위정척사 사상을 기반으로 창의 호국투쟁을 처음 논의한 곳이다. 이는 한국근대항일민족운동 50년사의 시발점이라는 데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것이다. 결론적으로 양평군 양동면은 명실상부한 1895년 을미의병(지평의병)의 발상지였다. 양평문화원 양동분원의 요청으로 2011년 봄에 짓는다.
지은이: 독립기념관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김호일 / 경기향토문화연구소연구위원 / 전 경원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장삼현 / 세운이:양평군 양동면 양평문화원 양동분원 / 세운날:단기4345년 서기2012년 임진 10월 28일
양동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양동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양평군 양동면은 대한민국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예부터 예를 숭상하고 충효를 실천하며 산자수명하고 인심 또한 후하여 복받은 땅으로 살기좋은 고장이다. 일제의 침략야욕이 노골적이던 1895년(을미년) 일본의 자객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일제에 맞서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양동출신의 이춘영, 안승우 두 의병장과 청운면 출신의 김백선 의병장이 중심이 되어 창의 출병하여 후에 호좌의진의 중추를 이룬다. 이를 을미의병, 지평의병 또는 전기의병이라고 하는데 개항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 봉기로서 의병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효시가 됐고 후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으니 호국의 땅으로 의향의 고장이기도 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우리나라는 명목상으로는 보호국이라고 했으나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는 한일신협약과 기유각서 등이 이완용의 매국 내각과 일본의 한국통감부 사이에 체결되어, 국권을 점차적으로 침탈해갔다. 그리고 종국에는 1910년에 한일합병조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멸망했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의병과 민중봉기가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일어나 끈질기게 이어졌다. 1919년(기미년)에는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포의 영향을 받아 서울에서 3.1운동이 발발하여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양동에서는 전석현, 이종성 공이 통문을 돌려 동지를 규합하여 1919년 4월 7일, 양동면사무소 광장에 많은 면민과 인근 타면 사람들이 모여 전석현공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종성공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여 모두 외치니 사기가 충천하고 천지가 진동하였다. 참여한 군중이 호응하여 시가지를 돌아 양평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행진하자 남녀노소 할것 없이 나와 힘을 합하니 그 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양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기마헌병이 출동하여 무자비하게 총칼을 휘둘러 강제로 해산시킴에 따라 사상자가 다수이고 체포된 사람 또한 수십 명이었다. 이 독립만세운동으로 주도자인 전석현, 이종성공은 경성지방 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했으며, 선도자인 이종철, 심원각, 이섭, 박철현, 정호철, 박성근, 이백석, 이성섭 공은 태형 90대로 사경이 되어 방면되고 그 외에는 가담 정도에 따라 수십 명이 태형 60대에서 30대로 방면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거나 다친 분들은 물론 태형을 받고 방면된 나머지 분들의 성명마저 알 길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양동기미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선인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며, 사생취의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세우다.
2013년 11월 양동역사만들기 추진위원회
양평군 양동면은 대한민국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예부터 예를 숭상하고 충효를 실천하며 산자수명하고 인심 또한 후하여 복받은 땅으로 살기좋은 고장이다. 일제의 침략야욕이 노골적이던 1895년(을미년) 일본의 자객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일제에 맞서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양동출신의 이춘영, 안승우 두 의병장과 청운면 출신의 김백선 의병장이 중심이 되어 창의 출병하여 후에 호좌의진의 중추를 이룬다. 이를 을미의병, 지평의병 또는 전기의병이라고 하는데 개항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 봉기로서 의병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효시가 됐고 후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으니 호국의 땅으로 의향의 고장이기도 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우리나라는 명목상으로는 보호국이라고 했으나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는 한일신협약과 기유각서 등이 이완용의 매국 내각과 일본의 한국통감부 사이에 체결되어, 국권을 점차적으로 침탈해갔다. 그리고 종국에는 1910년에 한일합병조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멸망했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의병과 민중봉기가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일어나 끈질기게 이어졌다. 1919년(기미년)에는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포의 영향을 받아 서울에서 3.1운동이 발발하여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양동에서는 전석현, 이종성 공이 통문을 돌려 동지를 규합하여 1919년 4월 7일, 양동면사무소 광장에 많은 면민과 인근 타면 사람들이 모여 전석현공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종성공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여 모두 외치니 사기가 충천하고 천지가 진동하였다. 참여한 군중이 호응하여 시가지를 돌아 양평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행진하자 남녀노소 할것 없이 나와 힘을 합하니 그 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양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기마헌병이 출동하여 무자비하게 총칼을 휘둘러 강제로 해산시킴에 따라 사상자가 다수이고 체포된 사람 또한 수십 명이었다. 이 독립만세운동으로 주도자인 전석현, 이종성공은 경성지방 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했으며, 선도자인 이종철, 심원각, 이섭, 박철현, 정호철, 박성근, 이백석, 이성섭 공은 태형 90대로 사경이 되어 방면되고 그 외에는 가담 정도에 따라 수십 명이 태형 60대에서 30대로 방면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거나 다친 분들은 물론 태형을 받고 방면된 나머지 분들의 성명마저 알 길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양동기미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선인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며, 사생취의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세우다.
2013년 11월 양동역사만들기 추진위원회
경기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418-3 양동만세공원 양동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