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300-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백헌 리중건 선생 행적비 건립추진위원
김성기 리희승 허웅 리주홍 박지홍
리영구 리병선 조기출 안차숙 하성락
박경수 리병로 안인호 리창형 리쾌녕
조용희 리상조 리동녕
김성기 리희승 허웅 리주홍 박지홍
리영구 리병선 조기출 안차숙 하성락
박경수 리병로 안인호 리창형 리쾌녕
조용희 리상조 리동녕
백헌 리중건 선생 행적비
선생의 본관은 여주요 관명은 중건이요 자는 인일이오 아호는 백헌이시다. 단기 4223년에 이곳 경남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에서 함안에 처음 들어오신 사직공의 13대손이오. 리종환 옹의 외아드님으로 태어나셨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스므살 되시던 4243년에 나라가 무너질 새 머리 깎고 서울로 올라가서 뜻있는 선비들과 깊이 사귀시었다. 대종교에 몸을 뭍이시고 고향에 대종교의 마음을 심어 겨레의 넋을 불러 일으키시었다. 4246년 향리에 동명학교를 세우고 리희석 안기호 리영재 려해 안영중 리필수 여러분들을 서울과 마산에서 초빙하여 가르치게 하였으니 이도 오로지 겨레의 얼을 심어 겨레의 뿌리를 깊이 북돋우려 하신 뜻이었다. 동명학교를 일으킬 새 재종형 연건 종형 학구 두 분이 크게 돕더라. 선생은 최규동 선생이 세우신 중동중학교를 거쳐서 일본 동경 동양대학 명문학과에서 수학 졸업하셨다. 4246년 족질 병화와 함께 신소
년을 간행하여 어린이의 마음 속에 겨레의 넋을 불러일으키시었다. 4266년 수표동 교육협회 속에 중앙인서관을 설립하여 온 겨레의 지식보급 향상을 꾀하였다. 여기서 찍어낸 책들은 세종어제 훈민정음 조선문학전집 소년 동요집 월남리 상재 주시경 선생 유고 노동독본 노동산수와 같은 것으로 그 뜻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찍은 대종교 책자들을 통하여 만주에 망명한 안희제 리연건씨와 일을 도모하셨다. 선생의 사귀신 사람들만 보아도 당시의 높깊은 뜻을 품은 분들이니 월남 리상재 어른의 간곡하신 지도를 받으셨고 특히 백은 유진태 선생의 뜨거운 나라사랑의 마음에 접할 기회가 자주 있었으며 장지영 리병기 리윤재 신명균 최현배 정열모 리극로 윤호병씨와 친분이 두터웠다. 선생은 한글학회를 측면에서 적극 도와 오늘의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뜨겁던 애국심은 리우식 안사열 조용갑 김영호 하영식씨를 움직여 재정적 도움을 받았다. 그가 이러한 큰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고결한 성품과 신의와 강직하고 겸허하고 검소한 인품에 있었다. 선생은 평소에 캡모자에 검은 두루막의 한복에 고무신의 차림으로 다녔으며 헌옷에 일꾼 차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던 그 풍모는 아직도 눈 앞에 훤하니 진흙속에 묻힌 박옥처럼 지내셨다. 언제나 가난하고 눌러지내는 사람들을가엾이 여기시는 그 따뜻한 마음씨는 즈믄해 드멘해에 길이 빛날 것이 밝도다. 선생의 슬하에는 양자인 병표 한 분이 있을 뿐이며 4270년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여의셨다. 고향과 서울의 벗들과 후배들은 그를 고마워하여 여기 돌에 몇가지만 적어 그 거룩한 뜻을 기리고저 한다.
단기 4310년 (서기 1977년) 12월 14일에 이 빗돌을 세우다.
단기 4310년 (서기 1977년) 12월 14일에 이 빗돌을 세우다.
년을 간행하여 어린이의 마음 속에 겨레의 넋을 불러일으키시었다. 4266년 수표동 교육협회 속에 중앙인서관을 설립하여 온 겨레의 지식보급 향상을 꾀하였다. 여기서 찍어낸 책들은 세종어제 훈민정음 조선문학전집 소년 동요집 월남리 상재 주시경 선생 유고 노동독본 노동산수와 같은 것으로 그 뜻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찍은 대종교 책자들을 통하여 만주에 망명한 안희제 리연건씨와 일을 도모하셨다. 선생의 사귀신 사람들만 보아도 당시의 높깊은 뜻을 품은 분들이니 월남 리상재 어른의 간곡하신 지도를 받으셨고 특히 백은 유진태 선생의 뜨거운 나라사랑의 마음에 접할 기회가 자주 있었으며 장지영 리병기 리윤재 신명균 최현배 정열모 리극로 윤호병씨와 친분이 두터웠다. 선생은 한글학회를 측면에서 적극 도와 오늘의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뜨겁던 애국심은 리우식 안사열 조용갑 김영호 하영식씨를 움직여 재정적 도움을 받았다. 그가 이러한 큰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고결한 성품과 신의와 강직하고 겸허하고 검소한 인품에 있었다. 선생은 평소에 캡모자에 검은 두루막의 한복에 고무신의 차림으로 다녔으며 헌옷에 일꾼 차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던 그 풍모는 아직도 눈 앞에 훤하니 진흙속에 묻힌 박옥처럼 지내셨다. 언제나 가난하고 눌러지내는 사람들을가엾이 여기시는 그 따뜻한 마음씨는 즈믄해 드멘해에 길이 빛날 것이 밝도다. 선생의 슬하에는 양자인 병표 한 분이 있을 뿐이며 4270년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여의셨다. 고향과 서울의 벗들과 후배들은 그를 고마워하여 여기 돌에 몇가지만 적어 그 거룩한 뜻을 기리고저 한다.
단기 4310년 (서기 1977년) 12월 14일에 이 빗돌을 세우다.
글 문학박사 무돌 김정기, 글씨 창남 고동주
단기 4310년 (서기 1977년) 12월 14일에 이 빗돌을 세우다.
글 문학박사 무돌 김정기, 글씨 창남 고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