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라이동 313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조설대(朝雪臺) / 소재지: 제주시 연미마을
이 조설대는 1905년 제2차 한일협약(乙巳條約)의 체결후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일합방)하자 이응호(李膺鎬)를 중심으로 한 12인의 소장파 유림(儒林)들이 집의계(集義契)란 모임을 결성 이곳에 모여 항의 의지를 굳히고 울분을 달래며 광복투쟁을 결의하여 석벽에 "朝朝雪臺(조설대)"를 음각(陰刻)하였다.
조설대의 뜻은 조선(朝鮮)의 수치를 설욕(辱)하겠다는 뜻이며 집의계 동지 12인은 진옹(震翁) 이응호(오라인 본관 경주), 소명(少明) 김좌겸(오라인 본관 광산), 백헌(柏軒) 김병로(이호인 본관 광산), 석봉(石峯) 서병수(대구인 본관 달성), 연수(蓮叟) 김병구(도평인 본관 광산), 모송재(慕松齋) 고석구(오라인 본관 제주), 심재(心齋) 김석익(이도인 본관 광상), 죽헌(竹軒) 김기수(영평인 본관 나주), 모헌(慕軒) 강철호(대정인 본관 진주), 소야(小野) 김이중(거로인 본관 나주), 만각(晩覺) 강석종(오라인 본관 신천), 야은(野隱) 임성숙(대정인 본관 평택) 등이다. 특히 이응호는 집의계의 대표로 활약하며 "탁라국서(乇羅國書)"와 김석익의 "탐라기년(耽羅記年)"은 민족혼을 지키려고 기술한 중요한 뜻이 담겨있는 저서이다. 또 이곳 조설대는 마을 고로(古老)들의 구전에 의하면 조선중엽 이후 국상을 당하였을시 리민들이 모여 곡하던 망곡(望哭)의 터로도 알려진 곳이다.
이 조설대는 1905년 제2차 한일협약(乙巳條約)의 체결후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일합방)하자 이응호(李膺鎬)를 중심으로 한 12인의 소장파 유림(儒林)들이 집의계(集義契)란 모임을 결성 이곳에 모여 항의 의지를 굳히고 울분을 달래며 광복투쟁을 결의하여 석벽에 "朝朝雪臺(조설대)"를 음각(陰刻)하였다.
조설대의 뜻은 조선(朝鮮)의 수치를 설욕(辱)하겠다는 뜻이며 집의계 동지 12인은 진옹(震翁) 이응호(오라인 본관 경주), 소명(少明) 김좌겸(오라인 본관 광산), 백헌(柏軒) 김병로(이호인 본관 광산), 석봉(石峯) 서병수(대구인 본관 달성), 연수(蓮叟) 김병구(도평인 본관 광산), 모송재(慕松齋) 고석구(오라인 본관 제주), 심재(心齋) 김석익(이도인 본관 광상), 죽헌(竹軒) 김기수(영평인 본관 나주), 모헌(慕軒) 강철호(대정인 본관 진주), 소야(小野) 김이중(거로인 본관 나주), 만각(晩覺) 강석종(오라인 본관 신천), 야은(野隱) 임성숙(대정인 본관 평택) 등이다. 특히 이응호는 집의계의 대표로 활약하며 "탁라국서(乇羅國書)"와 김석익의 "탐라기년(耽羅記年)"은 민족혼을 지키려고 기술한 중요한 뜻이 담겨있는 저서이다. 또 이곳 조설대는 마을 고로(古老)들의 구전에 의하면 조선중엽 이후 국상을 당하였을시 리민들이 모여 곡하던 망곡(望哭)의 터로도 알려진 곳이다.
'조설대' 비석은 후학들에 의해 동산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조설대’라는 글씨는 현무암 자연석에 새겨져 있어서 마멸될 우려가 있으므로 보호석으로 가려놓았다.
제주 제주시 오라이동 3135에 위치한 조설대비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