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 팔의사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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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양촌리 198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6월 서대문감옥 6월 함흥감옥 2년의 옥고를 겪었다. 손톱 발톱과 살을 찢는 고문에도 결코 굽히지 않아 투철한 독립지사로서 뭇사람의 숭앙을 받았다. 출 옥후 옛동지들과 망국의 한을 되씹다가 1944년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주현 구여순 장두관 등 11명이 고려구국동맹회를 조직하여 지하운동에 심혈을 바쳐오던 중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63년 11월 2일 별세하시니 양촌리 뒷산 선영하 양좌원에 부인 안보가와 쌍분으로 잠드시다. 선생의 행적을 어찌 작은 돌에 모두 담을 수 있으랴. 이제 조국의 높푸른 하늘에 저토록 태양이 찬란하듯 선생의 그 거룩한 뜻은 겨레와 함께 영원하리라!
마산대학교수 밀양 박동백 근찬
1982년 11월 일 석당 선생 묘역 정화사업위원회 수
삼진지방의 삼일독립운동 개요
1919년 국권회복 중앙총부로부터 서부경남 일원의 독립만세의거의 지도책임을 맡은 변상태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장날을 기하여 봉기하였다. 이날 장터의 중앙에 단을 만들고 권영대는 독립운동의 취지를 설명하였으며 장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일체가 되어 일어났으며 독립만세의 함성은 앞바다를 들끓게 하였다. 시위군중은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진동에 나아가 민족정기를 크게 떨쳤으며 수많은 우리의 동포가 일본헌병에게 끌려가 말할 수 없는 치욕의 고문 끝에 아홉분이 옥고를 치루었다. 그러나 불타오르는 민족의 의기는 결코 굴하지 않았다. 변상태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일주일 후인 4월 3일에 크게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은 음력으로 삼월 삼짇날이다. 이날 진전면 양촌 냇가에는 일천여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진동으로 향하니 연도에 대기하던 군중이 계속 합세하여 8천이 넘는 대중을 이루었다. 시위행렬이 진북교에 이르자 다리를 사이하여 미리 포진하고 있던 일본 헌병과 그 보조원 20여명이 진로를 막았으나 선두에서 태극대 기를 들고 군중을 휘동하던 김수동은 달려드는 헌병을 뿌리쳐 다리 아래로 던졌다. 이에 일헌병이 발포하니 김수동은 흉탄에 숨졌고 그 옆에 있던 변갑섭은 태극대 기를 이어받아 전진하다가 일헌병의 칼에 두 어깨를 잘리어 쓰려졌다. 이날 앞장섰던 여덟분이 적의 총칼에 숨지고 스물 두분이 부상을 입었으며 현장은 피의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일곱분이 참담한 옥고를 치루었다. 이 삼진의 독립만세의거는 수원. 수안. 선천의 의거와 더불어 4대 의거로 일컬어진다.
삼진의 독립만세의거
ㅇ 순국하신 분들 - 김수동, 변상복, 김호현, 김영환, 변갑섭, 고묘주, 이기봉, 홍두익
ㅇ 형을 받으신 분들 - 변상태 3년, 변상섭 2년, 김영종 2년, 변상현 2년, 구수서 2년, 변종영 2년, 변상술 2년
ㅇ 부상을 당하신 분들 - 변현, 박종숙, 고재록, 고운석, 황봉성, 김동이, 변상준, 김대업, 권태문, 권영달, 이몽재, 권영민, 박금용, 조용옥, 문재수, 변용섭, 손삼용, 구말서, 홍성오, 박용한, 변정섭, 김봉조

고현의 독립만세의거
ㅇ 형을 받으신 분들 - 권영대 1년, 백승학 1년, 백운태 1년, 노수환 6개월, 권오규 6개월, 박순조 6개월, 이교영 매90대, 권오성 매90대, 김봉조 매90대
八義士之墓(팔의사지묘)
1919년 3월 1일 중앙에서 울려퍼진 독립만세의 우렁찬 함성은 요원의 불꽃처럼 전국으로 퍼져 삼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다.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이를 막론하고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하여 구름처럼 일어나 시위 행렬에 뛰어들어 침략자 일본 군대의 총칼 앞에 아무 두려움 없이 앞을 다투어 몸을 내어던져 이 땅을 애국의 선혈로 물들였으니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양촌리 198 팔의사묘역을 찾아왔다.
삼진(진동 진전 진북)8의사 묘 - (김수동 변갑섭 변상복 김영환 고묘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

모두 경남 창원(昌原)사람으로 1919. 4. 3 진전, 진북, 진동의 연합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 시위대열이 진북면 사동리(社洞里) 다리 앞에 이르렀을때 출동한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에 흉탄을 맞아 순국하였으며 정부에서는 이분들의 공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묘소 소재지 :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양촌리 8의사 묘역
3.1독립만세 순국8의사 묘역
조국을 빼앗긴 분노는 구천을 메웠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열의와 투지는 사해에 넘쳤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굴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한 선생은 열일곱의 나이로 정명교 황병기 등과 뜻을 모아 엽총 등을 무기로 창의준비를 했으나 일제 헌병에게 탐지됨에 총기를 불사르고 뜻을 펴지 못한 채 뒷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부터 8.15광복의 그 날까지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날이 없었고 자리의 따스한 날이 없었으나 그 일편단심은 봄의 선구자 진달래꽃보다 더 붉게 타올랐음이리랴! 선생은 초계변씨 28세손으로 1889년 10월 11일 경남 의창군 진전면 양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경재요 호는 석당이다. 어려서부터 정의감이 강하여 국정의 잘못을 통탄하더니 부산상실학교 3학년이던 1910년 일제 침략으로 나라를 잃자 최기택 성학영 등 여섯 동지와 조국광복을 위
해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결연히 학교를 중퇴 대붕회를 조직한 뒤 동지 규합에 전념하였다. 1917년 윤상태 남형우 안희제 박중화 등 50여 동지와 대동청년단에 가입 모험부장이 됨으로서 국내외를 연결하는 활동책임을 졌다. 대동청년단은 당시 국내에 기반을 가진 유일한 독립운동 결사였다. 1919년 2월 하순 대동청년단 동지들로부터 전보를 받고 상경하여 만세의거에 참가한 뒤 서부 경남 일원의 중책을 띠고 귀가하였다. 그리하여 함안군 군북면 사촌 조용태 집에 머물면서 군북 의거 준비를 지휘하였다. 3월 하순 귀가하여 동지 권영대 권태용 친제 상헌 등과 종중 선실 일신재에서 고향의 거사 준비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 3월 28일 선생이 주모한 고현의거는 앞바다마저 들끓게 하였고 4월 4일 선생이 지휘한 삼진의거는 국내 4대의거의 하나로 손꼽혔다. 선생은 그날 진양군 남문산에서 동지 서상일 김관제 신종목과 만나 앞으로의 제반 계획을 상의하고 곧이어 합천군 초계로 거유 이직현을 방문하여 국사를 담론하면서 그의 근친인 이원화에게 초계의거를 위임하였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제령 위반죄로 심의된 대구 28인 사건의 한 사람이었으나 피신하여 체포는 면하였다. 28인 사건은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하였으며 이에 관련된 사람은 주로 대동청년단원으로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쳐 활약하는 열혈 우국지사들이었다. 곽인협 김상집 등과 아사동맹회를 조직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22년 1년간의 일본 피신생활에서 돌아와 전남 송절리의 호남물산 사장인 종제 상구의 거실에서 의열단의 투사 이종암을 만나 3000원을 수교하여 상해로 가게 하였다. 다음 해 3월 18일 이종암은 상해 황포탄에서 침략의 원흉 일제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전중의일)을 저격하였다. 22년 7월 선생은 일제 헌병에게 체포되어 미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