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일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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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115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일제시대 제주도 개량서당의 훈장과 학생들 / 제주도 조천리 남자의 체격측정사진(1914년) / 사립제주의신학교 설립자금 출연내용을 담은 자료 / 조선어학회에서 펴낸 ‘초등국어교본’ 내용 / 제주 학우회 경성지회에서 제주 출신 졸업생을 송별하는 사진(1928년) / 일제하 제주도 여성운동의 선구자인 최정숙(왼쪽)과 경평국(가운데)
故白膺善君之墓(고 백응선 군 지묘)
애국지사 백응선(白膺善) 묘비문(墓碑文)
“군의 이름은 응선(膺善)이요 본관은 수원 백씨(水原白氏)이고 찬규(粲奎)의 아들이다. 1896년 3월 27일에 낳고 1920년 3월 28일에 죽었다. 교래리경 조인납(助仁納) 선고(先考)의 무덤 우측 곤좌(坤坐)의 무덤이다. 딸 하나를 두었다. 기미년 봄 군(君)과 더불어 뜻을 같이 한 14인은 독립을 선전하다가 체포되어 복역(服役)을 마치고 출옥(出獄)하였는데 반년이 못되어 문득 불귀(不)의 객(客)이 되었도다. 오호라! 슬프도다. 마음속에 새겨 말하노라 오호라! 백군(君)이여, 천명(天命)이런가 운명(運命)이런가. 동지(同志) 14인은 바야흐로 투옥(投獄)되었지만 조국 독립을 위하여 내 몸 버리기를 홍모(鴻毛)와 같이 가볍게 여겼는데 급기야 출옥하였지만 일편단심 맹세한 것은 지난날과 같도다. 오호라! 백군이여, 천명이런가 운명이런가. 동지(同志)들이 같이 죽지 못하고 같이 따라 간장(肝臟)을 여미고 창자를 찢지 못함이여. 오호라!백군 이여, 천명이런가 운명이런가. 동지 14인은 군의 영(靈)에 통곡하며 군의 영을 다소나마 위로하고자 단갈(短碣)에 새기노라. 단군 4255년 임술 3월”
∎이 묘비(墓碑)는 조천만세운동 동지 김용찬, 김시은, 김시범, 이문천, 김경희, 김연배, 박두규, 김필원, 황진식, 김희영(김희수), 고재륜, 김형배, 김장환 등 13인이 옥살이할 때 노역으로 받은 돈을 모아서 세운 것이다.
제주 항일 유공 서훈자
제주항일기념관
제주항일기념관 안내
□ 건립배경
제주기미독립 만세운동의 진원지인 조천 미맛동산(만세동산)을 성역화하고, 제주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전시하여 우리고장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과 애국, 애향정신 함양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
□ 시설현황
ㅇ 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1156번지 일대 (58,582㎡)
ㅇ 기념관: 제1전시실, 제2전시실, 영상관
- 착공 : 1996년 3월 1일(제77주년 3.1절)
- 개관 : 1997년 8월 15일(제52주년 광복절)
ㅇ 기타주요시설 : 3.1독립운동기념탑, 애국선열추모탑, 창열사(위패봉안실), 절규상, 함성상
문주, 연주, 야외공연장, 광장, 주차장, 야외화장실
□ 관람시간 : 09:00~18:00
□ 휴관일
•1월 1일, 설날 연휴 및 추석 연휴
5인의 군상 상징 조형물
Symbolic Statue with 5 People / 五人群像象征雕塑 / 5人群像象徵造形物
제주도의 지형을 8각형으로 표현한 기단위에 험난하고 척박한 제주의 상황을 암석과, 일제의 침략을 거세게 밀어닥치는 파도로 표현을 했는데 이에 저항하는 제주인들의 항일정신을 5인 군상으로 상징화 하였다. 그리고 아기와 함께 정면을 응시하는 왼쪽 모자상은 후손들에게 영원히 계승될 자주독립 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애국선열을 추모하는 글
우리 제주도민은 역사적 환경의 전통성과 지리적 환경의 특수성을 말미암아 불의를 용납할 수 없는 정의감과 부당한 억압에 대한 저항의식이 남달리 강하였다.
일찌기 16세기에 임진왜란을 일으켜 우리 민족에게 지울 수 없는 아픔을 주었던 일본은 근세 말기에 이르러 다시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려보기 시작하다가, 1876년에는 이른바 병자수호조규를 강제로 체결함을 시작으로 1904년에는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이 연이어 이루어지더니,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던 것이다. 다음 1907년에는 다시 한일신협약이 체결되더니, 1910년 드디어 한일합방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 조국은 완전히 일본에게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의 격동기에 있어서 우리 제주도민은 1883년, 일본어민에 의한 어업권의 침탈을 강경하게 항의하는 등 점차 반일의 자세를 가다듬더니, 한일합방을 바로 앞둔 1909년에는 일부 제주 유림들을 중심으로 왜적토벌을 결의하고 제주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나, 모처럼의 창의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8년의 법정사 항쟁을 전후하여서는 제주도의 모든 종교계가 교파를 초춸하여 항일 투쟁에 나섰던 것이며, 그 이듬해인 1919년에는 제주도 항일운동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이른바 조천만세운동을 시발로, 전도적인 항일운동이 거세게 전개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1930년을 전후하였던 제주해녀의 일제에 대한 항쟁의 경우는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그만큼 강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데서 더욱 주목할만 하거니와, 이 밖에도 1930년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제주농민조합 항일사건, 서귀리의 독서회사건, 조천리 출신들이 중심이 된 신좌소비조합운동사건, 제주농업학교에 있어서의 일본인 교사 배척사건, 부당졸업사정 항의사건, 독서회운동 사건 등 사회 지도자충, 노동자 농민층, 학생층들이 총망라된 대대적인
유림의 동향과 집의계(儒林的动向和集义契)
19세기말 제주의 유림은 대원군을 탄핵하다가 제주에 유배된 최익현(崔益鉉)의 영향을 받아 기호학파의 맥을 이었다. 또한 전라도 장성의 기우만(奇宇萬)을 사숙하였다. 그들은 위정척사 의 명분 아래 신학문의 수용에 뚜렷이 반대 입장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귤림서원 등이 폐지됨으로써 유생들의 결집체는 와해되어 버렸다. 갑오. 을미개혁에 따른 신식 행정제도의 실시와 단발령의 단행에 반발해 건양 원년(1896) 제주군 한북리(漢北里) 유생 강유석(姜瑜奭)과 송계홍(宋啓弘) 등이 민란을 일으켜 경무청을 파괴하였는데, 이는 당시 유생층의 불만을 대변한 것이었다.
제주의 유림들은 을사조약과 국권 피탈을 겪으며 항일의 의지를 담은 집의계(集義契)를 결성하고 문연사(文淵社)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들 유림의 정신적인 맥을 이어서 1909년 의병항쟁과 1919년 조천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대마도로 호송되어가는 최익현(1906년)

조설대-을사조약에 대항하여 이응호를 중심으로 12인의 제주 유림들이 집의계를 결성한 장소
격문을 작성한 김석윤 / 김만석의 묘비(대정읍 안성리) / 의병장 고사훈의 묘비(좌)와 묘(우) / 고사훈 관련기사
법정사 항일운동
대표적인 검찰 송치자 – 김연일, 방동화, 강창규, 박명수 / 김연일 지사의 가출옥 증표, 1923년 / 제주도 소요사건[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265, 266면)] 관련문서 / 법정사 항일운동 송치자 66인 명부가 기록된 조형물 / 법정사 항일운동 상징탑 / 법정사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