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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서울 종로구 화동 104
- 탐방로그
- 서울 종로구 화동 104 서울역 앞에 위치한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을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왈우 曰愚 강우규 姜宇奎 1859.9.6~1920.11 의사 義士
강우규 의사는 1859년 6월 5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셨다. 1883년 함경남도 홍원군 영덕리로 이주하여 함경도 일대에서 민족교육과 기독교 전도사업을 통하여 독립운동의 역군을 양성하였고,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국권이 상실되자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후 1915년 길림성 요하현 신흥동으로 이주,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여 청소년의 민족의식 고취와 기독교 전도사업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을 펼치셨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동료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앞장섰으며 이후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의 요하현지부장을 맡아 활동하셨다. 1919년 8월 5일 폭탄을 품은채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서울에 도착, 9월 2일 남대문 역두(현 서울역)에서 새로 부임하는 신임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 세계만방에 대한의 독립정신을 알리었다. 이듬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제작 : 사단법인 강우규 의사 기념 사업회
후원 : 국가보훈처, 서울특별시
조각 : 심정수
제작일시 : 2011년 8월 8일
강우규 의사는 1859년 6월 5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셨다. 1883년 함경남도 홍원군 영덕리로 이주하여 함경도 일대에서 민족교육과 기독교 전도사업을 통하여 독립운동의 역군을 양성하였고,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국권이 상실되자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후 1915년 길림성 요하현 신흥동으로 이주,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여 청소년의 민족의식 고취와 기독교 전도사업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을 펼치셨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동료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앞장섰으며 이후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의 요하현지부장을 맡아 활동하셨다. 1919년 8월 5일 폭탄을 품은채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서울에 도착, 9월 2일 남대문 역두(현 서울역)에서 새로 부임하는 신임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 세계만방에 대한의 독립정신을 알리었다. 이듬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제작 : 사단법인 강우규 의사 기념 사업회
후원 : 국가보훈처, 서울특별시
조각 : 심정수
제작일시 : 2011년 8월 8일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
왈우 강우규 의사(曰愚 姜宇奎 義士)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斷頭臺上(단두대상)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猶在春風(유재춘풍)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有身無國(유신무국)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豈無感想(기무감상)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강우규 의사가 순국 직전에 남긴 유시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斷頭臺上(단두대상)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猶在春風(유재춘풍)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有身無國(유신무국)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豈無感想(기무감상)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강우규 의사가 순국 직전에 남긴 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