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21-1
- 탐방로그
- 유홍석 가족묘의 GPS 상 주소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 21-1이지만 넓은 범위를 포괄하므로 춘천시 남면 가정리 349-1을 찾아가는 편이 좋다. 이곳에는 유홍석 선생 묘, 유제원, 윤희순 선생 합폄묘, 윤희순 선생 사적비, 유돈상 선생 묘가 있다. 유홍석 선생의 아들이 유제원 선생, 유제원 선생의 아들이 유돈상 선생으로, 세 인물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고흥유씨(고흥류씨) 집안 독립운동가이다. 윤희순 선생은 유제원 선생의 부인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과 연루되여 만주 흥경현 경찰서에서 비통히 학살되니 그 참상은 목불인견이라. 여사는 시모와 아들의 생명보존을 위하여 풍찬노숙 만주 땅을 헤매며 남편을 내조하다 1934년 차자 연익을 출산하였으나 천인공노할 왜경이 여사가 은거한 집에 불을 질러 구사일생으로 시모와 아들을 구출하시니 이 어찌 선대의 은우하심이 아니리요. 그것도 잠시 이듬해 7월 남편 류돈상 지사가 대한독립단 청년단원 교육 중 왜적의 급격으로 피체되여 무순현옥에서 모진 고문으로 빈사 상태에서 출옥 즉후 순국하니 아들을 잃은 충격에 노시모마저 운명하시다. 이때 여사의 나이 28세라. 황막한 이국 땅에서 두 아들에 목숨을 지키고져 몸부림친 형극의 고초를 어이 다 상상하리오까. 여필종부라 시재당숙 극와장의 인도로 두 아들을 이끌고 충북 산청면 고국을 찾았으나 호구지책을 감내할 길 없는 가난에 다시 만주로 가게 되니 독립투사의 아내와 자식이 머물 곳은 한반도 땅이나 만주 땅이나 막막할 뿐 잃어버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항쟁의 시련은 노모와 젊은 아내 어린 아들까지 지탱할 길 없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손가. 사면초가 왜적의 소굴에서 천행만고 목숨을 부지하다 폭악한 왜경에게 잡혀 잔인한 고문의 여독으로 1940년 3월 초 어느날 천추의 한을 가슴에 묻은 채 가련히 생을 마치시니 향년은 33세라 한다. 시대비운의 역사속에서 여사께서 격으신 생의 수난은 독립운동가의 딸과 3대를 이어 구국투쟁에 목숨 바친 독립지사의 며느리와 아내로서 걸어오신 발자국마다 혈루로 얼룩졌으니 오호통재라. 이 쓰라린 사록은 천지신명이나 아실런지 어이 필설로다 형용하오리까. 그 후 장자 연직마저 요절하니 유일한 혈손은 연익이라. 광복 후 12세에 환국하여 정처없는 유랑생활로 성장하여 1968년 선영을 찾아 통곡으로 성묘하고 1978년부터 춘천에 정착 순국선열의 충의선양과 묘성역화사업에 진력하다 평생을 오매불망하던 선대의 유해를 찾아 만주로 들어가 994년 천우신조하여 조모 윤희순 여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 선영에 안장하고 다음해부터 수차 만주로 가 부모님 유해를 찾았으나 뜻을 못 이루어 아버님이 순국한 무순 땅 흙 한 줌 떠다 혼백을 모시고 중
국에서 모친 종이 옥순 이모님을 모셔다 극진히 뫼시던 중 뜻밖에 TV를 접한 박한설 교수의 도움으로 서울에 있는 외가 일족을 찾아 만주 길림성으로 달려가 효임 이모님을 상면하니 이 또한 선대현령이 굽어 살피신 계시라 아니하리요. 광복회 강원도지부장으로 민족정기 선양을 위한 정신운동에 헌신하는 아드님을 도와 일하면서 몽매간에도 어머님 유해를 못 찾아 자식된 도리를 못함을 몹시 애통하는 아들의 심정을 시생 희동은 선대의 돈독한 세교와 사가의 구국의지 상통했던 유지를 받들어 여사의 일대기를 지었으며 아들은 여기 아버님 묘역 옆에 어머님의 애모비를 세우나이다.
광복회 강원도지부 사무국장 권희동 지음 서기 1998년 8월 15일 자 연익 세움
광복회 강원도지부 사무국장 권희동 지음 서기 1998년 8월 15일 자 연익 세움
묘소의 GPS상의 주소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21-1이지만 넓은 산 지역을 포괄한다.
대신, 묘에서 가장 가까운 번지인 349-1을 찾아가는 것이 좋다.
대신, 묘에서 가장 가까운 번지인 349-1을 찾아가는 것이 좋다.
이곳에는 유홍석 선생 묘, 유제원, 윤희순 선생 합폄묘, 윤희순 선생 사적비, 유돈상 선생 묘가 있다.
유홍석 선생의 아들이 유제원 선생, 유제원 선생의 아들이 유돈상 선생으로, 세 인물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고흥유씨(고흥류씨) 집안 독립운동가이다.
윤희순 선생은 유제원 선생의 부인이다.
유홍석 선생의 아들이 유제원 선생, 유제원 선생의 아들이 유돈상 선생으로, 세 인물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고흥유씨(고흥류씨) 집안 독립운동가이다.
윤희순 선생은 유제원 선생의 부인이다.
항일 독립 애국선열 묘역 이전비
이곳은 의병장 유홍석 지사와 최초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 대한독립단에서 구국 항일투쟁에 신명을 바친 유돈상 지사의 묘역이다.
위 선열은 국내 의병 항쟁을 비롯하여 국외(중국) 망명, 민족운동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모두 중국 땅에서 서거하셨다.
유홍석 지사는 1930년 11월, 윤희순 의사는 1994년 10월, 유돈상 지사는 1994년 7월 춘천 남면 관천리에 안장되었다가, 국권 수호를 위한 춘천 의병 항쟁의 진원지인 남면 가정리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 성역화와 함께 민족정신 함양을 위하여 2012년 4월 6일 후손 연익에 의하여 이곳으로 묘역을 이전하였다.
광복회강원도지부 전 사무국장 권희동 근찬
이곳은 의병장 유홍석 지사와 최초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 대한독립단에서 구국 항일투쟁에 신명을 바친 유돈상 지사의 묘역이다.
위 선열은 국내 의병 항쟁을 비롯하여 국외(중국) 망명, 민족운동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모두 중국 땅에서 서거하셨다.
유홍석 지사는 1930년 11월, 윤희순 의사는 1994년 10월, 유돈상 지사는 1994년 7월 춘천 남면 관천리에 안장되었다가, 국권 수호를 위한 춘천 의병 항쟁의 진원지인 남면 가정리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 성역화와 함께 민족정신 함양을 위하여 2012년 4월 6일 후손 연익에 의하여 이곳으로 묘역을 이전하였다.
광복회강원도지부 전 사무국장 권희동 근찬
유제원, 윤희순 선생의 장남인 유돈상 선생의 묘이다.
봉분 옆에는 유돈상 선생의 묘비와 더불어 선생의 부인 묘비가 있다.
유돈상 선생의 부인은 두 분이다. 함열남궁씨와 죽산음씨이다.
봉분 옆에는 유돈상 선생의 묘비와 더불어 선생의 부인 묘비가 있다.
유돈상 선생의 부인은 두 분이다. 함열남궁씨와 죽산음씨이다.
각각 왼쪽 묘비부터, '애국지사 유돈상지묘, 배 유인 함열남궁씨 부좌', '죽산 음씨 채봉여사 애모비'라고 새겨져 있다.
유돈상 선생 및 부인 함열낭궁씨의 묘비문이다.
지사의 휘는 돈상 도는 동식 영식이요, 자는 백윤 호는 해암이요, 성은 류씨니 고흥인이다. 증조는 휘 중학이요, 조는 휘 홍석이니 호가 외당으로 춘천 의병장이요, 고는 휘 제원이니 호가 항재요, 비는 해주윤씨 희순이니 윤익상의 따님이다. 지사가 고종 31년 9월 29일에 춘천군 남면 발산리에서 출생하니 이해에 동학난과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일어나고 단발령으로 국내가 시끄러웠으며 이어서 다음해 을미년에는 왜인의 민비시해 사변이 벌어져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적과 투쟁하였으며 또 10년 후에는 일제에 의한 을사조약이 늑결됨을 계기로 다시 을사의병이 일어나고 이어서 2년 후에는 구 한국군대 해산을 계기로 정미의병이 일어나 맹렬한 항일전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지사는 이러한 환경속에서 성장했을 뿐 아니라 조부와 부모가 모두 의병에 가담하여 춘천의병을 주도하였으므로 자연히 애국사상과 항일정신이 싹트게 되었다. 그런데 수차에 걸친 의병투쟁도 왜적의 잔악한 강압으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니 조부 외당은 왜적의 통치하에서는
지사의 휘는 돈상 도는 동식 영식이요, 자는 백윤 호는 해암이요, 성은 류씨니 고흥인이다. 증조는 휘 중학이요, 조는 휘 홍석이니 호가 외당으로 춘천 의병장이요, 고는 휘 제원이니 호가 항재요, 비는 해주윤씨 희순이니 윤익상의 따님이다. 지사가 고종 31년 9월 29일에 춘천군 남면 발산리에서 출생하니 이해에 동학난과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일어나고 단발령으로 국내가 시끄러웠으며 이어서 다음해 을미년에는 왜인의 민비시해 사변이 벌어져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적과 투쟁하였으며 또 10년 후에는 일제에 의한 을사조약이 늑결됨을 계기로 다시 을사의병이 일어나고 이어서 2년 후에는 구 한국군대 해산을 계기로 정미의병이 일어나 맹렬한 항일전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지사는 이러한 환경속에서 성장했을 뿐 아니라 조부와 부모가 모두 의병에 가담하여 춘천의병을 주도하였으므로 자연히 애국사상과 항일정신이 싹트게 되었다. 그런데 수차에 걸친 의병투쟁도 왜적의 잔악한 강압으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니 조부 외당은 왜적의 통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하고 다음해에 솔가하여 만주로 망명 의병의 재거와 국권의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년 후인 1913년에 객지에서 돌아갔으며 다음해에는 숙부 제설이 또 다음해에는 족종조 의암 류인석과 부친 항재가 차례로 돌아가니 이제 지사 형제는 만리 타국에서 의거할데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지사는 부조의 뜻을 이어 국권회복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회인현 대야하에서 아우 민상과 김용필 음성국 음성진 이길용 장인도 이동만 안중학 및 중국인 장껑호(본명 영방) 등 동지 180여명을 규합하여 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 홍익단과 합세하여 전투준비를 하던 중 왜병의 기습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지사는 이름을 효준 효남으로 바꿔가면서 활동을 재개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또 국내로 잡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만주와 국내를 넘나들며 맹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35년에 왜병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 죽게 되었으므로 가족이 무순현감옥으로 가서 인수해오다가 중도에서 운명하니 때는 1935년 7월 19일이었다. 동지 음성진 등이 시신을 무순현 용봉 항남산에 장사지내고 돌에다 류자만 새겨놓고 돌아왔다. 그 후 광복으로 가족들이 귀국하니 중국과는 연락이 두절되고 50여년 동안 세월만 흐르다가 1993년 4월 13일에 이르러 정부에서 지사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를 계기로 지사의 아들 연익씨가 부친의 묘를 찾기 위해 1994년 7월 15일에 중국 무순으로 가서 해성시 일원을 수소문하였으나 지형의 심한 변화로 인하여 마침내 찾지 못하고 묘소 부근의 흙 한 줌을 가지고 돌아와 춘천군 남면 관천리 선영하에 혼백장을 지내게 되었다. 생각하건대 지사는 의병가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살아서는 위난속에서 지내며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고 죽어서는 60여년을 적막한 이국 산야에서 방황하였으니 그 애절함을 어찌 다 표현하랴. 다행히 혼백이나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니 이제 지사는 편안히 눈을 감고 명복을 누릴 것이다. 지사의 전배는 함열남궁씨이니 1894년에 태어나 1922년 6월 13일에 만주에서 돌아가니 그곳에 모셨다가 1930년에 지사가 선영하로 이장하였더니 이번에 지사의 혼백과 함께 합폄하게 되었고 후배는 죽산 음
씨니 부는 성국으로 1908년에 태어나 1940년에 돌아갔는바 역시 묘소는 찾지를 못하였는데 자 연익과 손자 석균 영균을 두었다. 그밖에 지사의 가계와 구체적 사실은 외당과 항재의 묘비에 자세히 실렸으므로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단기 4327년 8월 15일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박한설 근찬 광복회 강원도지부 근립
단기 4327년 8월 15일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박한설 근찬 광복회 강원도지부 근립
유돈상 선생의 부인인 음채봉 선생 애모비문이다.
여사의 본관은 죽산이요 휘는 채봉이라 1908년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경릉리에서 부친 음성국 공과 모친 손정숙 여사의 1남 3녀 중 장녀로 출생하시다. 일찍이 부친 성국공과 백부 성진공 형제는 국권상실을 통분하여 구국에 의지를 품고 평안도에서 활동하다. 여사가 10세되던 1917년 만주로 온 가솔이 망명하여 어려서부터 왜적을 피해 전전불매하며 성장하니 당년 21세되던 해에 지하독립운동을 하던 부친께서 대한독립단의 유돈상 지사를 찾아 침략자를 응징하는 원한을 생전에 못풀줄도 모르니 공은 내 여식과 혼인하여 자손을 보아 후일을 기약하자며 청혼함에 양가는 인연이 되니 이로부터 여사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시작되었다. 1932년 구국 지하활동 중인 부친이 대한독립단
여사의 본관은 죽산이요 휘는 채봉이라 1908년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경릉리에서 부친 음성국 공과 모친 손정숙 여사의 1남 3녀 중 장녀로 출생하시다. 일찍이 부친 성국공과 백부 성진공 형제는 국권상실을 통분하여 구국에 의지를 품고 평안도에서 활동하다. 여사가 10세되던 1917년 만주로 온 가솔이 망명하여 어려서부터 왜적을 피해 전전불매하며 성장하니 당년 21세되던 해에 지하독립운동을 하던 부친께서 대한독립단의 유돈상 지사를 찾아 침략자를 응징하는 원한을 생전에 못풀줄도 모르니 공은 내 여식과 혼인하여 자손을 보아 후일을 기약하자며 청혼함에 양가는 인연이 되니 이로부터 여사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시작되었다. 1932년 구국 지하활동 중인 부친이 대한독립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