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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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21-1
탐방로그
유홍석 가족묘의 GPS 상 주소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 21-1이지만 넓은 범위를 포괄하므로 춘천시 남면 가정리 349-1을 찾아가는 편이 좋다. 이곳에는 유홍석 선생 묘, 유제원, 윤희순 선생 합폄묘, 윤희순 선생 사적비, 유돈상 선생 묘가 있다. 유홍석 선생의 아들이 유제원 선생, 유제원 선생의 아들이 유돈상 선생으로, 세 인물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고흥유씨(고흥류씨) 집안 독립운동가이다. 윤희순 선생은 유제원 선생의 부인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항일 독립 애국선열 묘역 이전비

이곳은 의병장 유홍석 지사와 최초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 대한독립단에서 구국 항일투쟁에 신명을 바친 유돈상 지사의 묘역이다.
위 선열은 국내 의병 항쟁을 비롯하여 국외(중국) 망명, 민족운동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모두 중국 땅에서 서거하셨다.
유홍석 지사는 1930년 11월, 윤희순 의사는 1994년 10월, 유돈상 지사는 1994년 7월 춘천 남면 관천리에 안장되었다가, 국권 수호를 위한 춘천 의병 항쟁의 진원지인 남면 가정리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 성역화와 함께 민족정신 함양을 위하여 2012년 4월 6일 후손 연익에 의하여 이곳으로 묘역을 이전하였다.

광복회강원도지부 전 사무국장 권희동 근찬
소망 / 충효 / 애국 / 자손 / 만대 보존 / 윤희순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윤희순 여사의 친필이다.
애달픈 노래

애닯도다 애닯도다 형제간의 싸움이요
부자간의 싸움이라 이런 일이 어디 있나
우리 조선 백성들이 이렇듯이 어두운가
제 임금을 버리고서 남의 임금 섬길쏘냐
우리 조선 버리고서 남의 나라 섬길쏘냐
애닯도다 애닯도다 우리 조선 애닯도다
자기 처를 버리고서 남의 처를 사랑하니
분한 마음 볼 수 없어 내 가슴을 두드리니
내 가슴만 아플세라 귀한 목숨 아무 데나
버릴쏘냐 나도 나가 의병하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도와주세

이 노래를 부르면서 도와주세
유제원 선생과 윤희순 선생의 묘이다.
유제원 선생은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이시다.

윤희순 선생의 묘는 10월 20일 춘천시 남면 관천리 고흥류씨 선영에 남편 유제원과 합폄되었다. 이후 춘천 의병항쟁의 진원지인 춘천시 남면 가정리의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 성역화와 함께 유제원, 윤희순 선생의 묘는 2012년 4월 6일 고흥유씨(고흥류씨) 가족묘역으로 이전되었다.
윤희순 선생 사적비이다. '애국선열 윤희순 여사 사적비'라고 새겨져 있다.

본 사적비는 윤희순의 여성 의병활동과 항일독립투쟁활동을 기리기 위하여 강원대 박한설 교수가 사적비문(碑文)을 찬(撰)하고 애국선열 윤희순여사유해봉환제전위원회 위원장 이상룡과 집행위원장 김형배 외 위원 일동이 1994년 10월 20일에 세운 것이다. 이후 춘천 의병 항쟁의 진원지인 춘천시 남면 가정리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 성역화와 함께 2012년 4월 6일 고흥유씨(고흥류씨) 가족 묘역이 이전하면서 사적비도 함께 이전하였다.
여사의 성은 윤씨요, 휘는 희순이니 해주윤씨 익상의 따님으로 철종 11년에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품성이 명민하고 부모에게 효순하였으며 기상이 씩씩하고 활달하였는데 16세에 항재 류제원 공에게 시집온 후 그 관후하고 상밀한 솜씨로 어려운 가정을 잘 이끌어나갔다. 그런데 을미년에 이르러 왜적이 민비를 참살하는 사변이 일어나자 춘천에서는 전국 최초로 의병이 봉기하여 맹렬한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시부인 외당 선생과 항제 등 온 집안이 여기에 가담하여 싸우게 되었다. 과당이 전장으로 출발한 후 여사는 후원에 단을 몯고 매일 밤 정화수를 떠놓고 의병의 승리와 시부의 무사귀환을 하늘에 비는 한편 왜적의 만행을 규탄하는 포고문과 일제의 앞잡이를 질책하는 경고문을 지어 발포하고 또 병정 노래를 지어 국민의 분기와 의병 참여를 권유하고 의병가를 지어 의병들의 사기를 격려하기도 했는데 특히 역사상 초유의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도 의병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심지어 남장을 하고 정보를 수집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 후 정미년에 구 한국군대 해산 사건을 계기로 다시 격렬한 의병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때에 과당은 의기청년 6백여명을 모아 주민 수 천명과 함께 남면 가정리 여우내골에서 대약과 강환을 만들며 유격훈련을 실시하니 여사는 참판댁 약암댁 남종댁 가정댁
등 안사람 80여명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거두어 의병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직접 의병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외당은 준비가 완료되자 춘천 진병산과 의암소 및 홍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우다가 가평 주길리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므로 제천 장담으로 가서 상처를 치료하며 다시 의병을 모집하던 중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었다. 이때에 외당은 크게 분노하여 왜적의 통치를 받을 수는 없다 하고 1911년에 전가족이 중국 해성현 묘관둔으로 망명하여 의병의 재거를 추진하다가 불운하게도 1913년부터 외당과 의암과 항재가 차례로 도라가니 남은 가족들은 만리 타국에서 의지할 데가 없게 되고 어린 자질들은 여사가 홀로 보호해야 하게 되었다. 더구나 국권회복운동은 중단할 수 없다 하여 돈상 민상 교상 등 세 아들이 이를 계승하기로 하고 음성국 음성진 금민와 및 중국인 장영방 등 18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니 이후 20년간 가정은 여사가 혼자 꾸려나가게 되었다. 그간의 피눈물 나는 시련은 매거할 수도 없거니와 여사는 그 혹독한 고생도 국권이 회복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는데 1935년에 이르러 장자 돈상이 왜병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 죽으니 여사의 인내력도 한계에 이르러 살 의욕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사는 재종 시동생 직와장에게 어린 손자들을 부탁하는 서언을 남기고 또 해주윤씨 일생록을써서 자손들에게 후일을 당부한 후 아들이 숨을 거둔 지 12일만인 8월 1일에 세상을 떠나니 슬프다. 여사는 그 파란만장한 일생을 끝마치게 되었다. 이때에 여사는 수가 76세로서 해성현 묘관둔 북산에 임시로 이장하였다. 그 후 정부에서는 여사의 애국활동을 인정하여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또 1990년에는 다시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승격시켰는데 지역에서는 여성으로 일생을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한 공을 기리고자 1982년 11월 9일에 이상주 강원대학교 총장이 여사의 향리인 춘천군 남면 발산리 항곡에 해주윤씨 의적비를 건립하였고 1990년 11월 5일에는 여성단체 예림회에서 춘천시립도서관 정원에 여사의 동상을 세운 바 있다. 그러나 여사의 묘소는 반세기의 남북분단과 중국과의 교통사절로 실전하였으므로 손자 연익씨가 이를 애통히 여겨 1984년 6월 28일에 부군 항재의 묘비를 세울 때에 여사의 신위를 돌에 새겨 합폄한 바 있었는데 그 후 중국과의 왕래가 가능해졌으므로 금년 7월 15일에 연익씨가 중국으로 들어가 해성시 묘관촌에서 옛날 동지 영수덕 영수곤 진장림 장건평 갈복순 등 중국인을 만나 여사의 묘를 찾으니 이제 여사는 생전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더우기 여사는 건국유공자로서 유해의 봉환을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게 되고 또 여사의 안장을 위하여 거도적으로 애국선열 윤희순 여사 유해 봉환제전 위원회를 구성하여 의전을 집행키로 하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금의환향인가! 뿐만 아니라 현
지의 중국인들도 위대한 애국자를 그대로 보낼 수 없다 하여 여사의 묘지에 충효예의 자손만대 보존이라는 여사의 유훈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니 여사의명예가 영원토록 빛날 것이다. 이리하여 오늘 여사의 유체가 부군 곁에 나란히 묻치게 되었으니 이제 여사는 편안히 눈을 감고 기쁘게 잠이 들 것이다. 생각하건대 전쟁과 충렬은 남성에 관계된 일이요, 여성은 집밖으로 나오는 것도 예사롭지 않던 시대에 윤여사는 규중의 몸임에도 불고하고 국권의 상실을 좌시만 할 수 없다 하여 소매를 걷어부치고 의병활동에 뛰어든 후 40년 동안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도 오직 국권회복을 위해 일생을 바쳤으니 모든 국민은 윤여사의 거룩한 애국애족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아! 장하도다. 윤여사여 자랑스럽도다. 윤여사여!

단기 4327년 10월 20일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박한설 근찬
애국선열 윤희순 여사 유해 봉환제전 위원회 위원장 이상룡 집행위원장 김배 외 위원 일동 근립
윤희순 의사께 바치는 글

아, 윤희순! 뒤뜰에 단을 세워 정안수 떠 놓고 춘천의병 전승 빌며 삼백일 기도 내 한 몸 바쳐서 나라가 한다면 남녀 구별 쓸데없네 오로지 애국이요 만주 땅 허허벌판 이름 없는 망명 생활 조선 독립 일념으로 군사훈련 몸소 받고 노학당 학교 세워 애국혼 길러내니 높은 뜻 흘러 흘러 이곳에 살아나네 무순감옥 모진 고문 아들마저 잃고 나니 칠십육 세 한평생을 나라 위해 쓰인 몸 쓸쓸히 눈 감을 때 새 한 마리 울었을까 안사람 의병가를 목메게 부르노라 아, 윤희순! 그 혼불 영원토록 아, 윤희순! 조국을 지키노라

윤희순 기념사업회 김금분
윤희순 의사의 애국애족의 "혼"이 담긴 애달픈 노래와 이역만리 타국에서 운명을 앞두고 남긴 유묵인 소망과 평소 윤 의사의 높은 민족정신을 흠모하던 김금분 시인이 바치는 헌시를 담아 숭고한 애국충정의 뜻을 영원토록 기리고져 이 비를 건립한다.

2009년 3월 18일
윤희순 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찬옥
묘소의 GPS상의 주소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21-1이지만 넓은 산 지역을 포괄한다.
대신, 묘에서 가장 가까운 번지인 349-1을 찾아가는 것이 좋다.
이곳에는 유홍석 선생 묘, 유제원, 윤희순 선생 합폄묘, 윤희순 선생 사적비, 유돈상 선생 묘가 있다.
유홍석 선생의 아들이 유제원 선생, 유제원 선생의 아들이 유돈상 선생으로, 세 인물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고흥유씨(고흥류씨) 집안 독립운동가이다.
윤희순 선생은 유제원 선생의 부인이다.